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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이나 작가주의로만 환원되지 않는 논의를 위하여, 김병규 평론가
이다혜 사진 오계옥 2025-06-30

평론집 <빈손의 영화> 출간한 김병규 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첫 영화평론집 <빈손의 영화>가 출간되었다. 2018년 영화비평 잡지 <필로>를 시작으로, <씨네21> 영화평론상에 당선된 후 꾸준히 써온 글을 모았다. 평론가이기 이전에 영화 연출을 배운 그가 영화를 보는 작업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빈손의 영화>에 실린 글은 여러 시기에 제각기 다른 영화에 대해(특히 동시대 영화에 대해) 쓴 글의 모음이지만 서문에 등장하는 문장( “고전기 스튜디오시스템의 질서가 붕괴한 이후로 영화가 잃어버린 것은 손이라는 특별한 장소의 감각일지도 모른다”)처럼 돌아보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지는 책이 되었다.

- <빈손의 영화>라는 제목은 직접 지었나.

책에도 실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리차드 쥬얼>에 대한 글 제목이 ‘빈손의 영화’다. 서문에도 썼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른바 현대영화의 증상은 손이 점점 불투명해져가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그랜 토리노>의 한 장면이었다. 서부극의 총잡이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마을의 갱단 앞에 마지막으로 섰을 때, 총을 꺼내는 게 아니라 라이터를 든 빈손을 꺼낸다. 그것이 더이상 20세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영화의 운명적인 느낌으로 강하게 다가왔다. 마음에 남고 글로 응답하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이 유독 그런 빈손에 노출된 영화들이었다. 장뤼크 고다르, 빅토르 에리세, 아오야마 신지처럼 이 책에서 특별하게 거론되는 작가들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 2018년에 <필로>와 <씨네21>에 평론가로서 지면을 얻기 전에도 블로그에 영화 글을 꾸준히 써왔 다. 평론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글을 쓰는 게 돌파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영화 연출을 계속하기 위한 생각의 돌파구 같은 느낌이었던 걸까.

비평의 언어를 의심하듯 적어본 게 시작이었 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거창한 생각들을 떠올린다. 상징, 주제, 감정…. 그런데 정작 영화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켜면 너무 평범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찍힌다. 영화를 만드는 상태와 만들어진 영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결과적으로는, 영화를 만드는 절차 안에서 훨씬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단순히 장면 하나의 의미에 집착하기보다 설계되고 배열된 장면이 어떤 상호 관계를 이뤄 의미를 작동하게 하는지 항상 고민한다.

- 평론가로서 정체성이 선명해진 계기가 있나.

나는 숏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영화의 비밀, 그 극히 세부적인 요소에 대한 집착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평론가로 글을 쓰면서는 갈수록 영화사라는 맥락을 고려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단위에서 시작해 가장 거대한 흐름, 역사 라는 문맥으로 향해 움직여가는 과정을. 내가 영화를 보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건드리고 싶은 신호는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느냐는 세부에 있지만, 그런 요소를 개별 감독의 감수 성이나 재능으로 환원하는 데 불만이 있다.

- 단행본으로 엮기 위해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달라진 부분이 있다고 느끼나.

전체적으로도 원고를 꽤 수정했고. 내게 있어 비평의 의미가 이행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문맥을 그대로 보존하는 대신 과거의 글과 현재의 수정이 대화하는 형태를 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한 것은 하룬 파로키와 크리스 마커에 대한 글 <몽타주의 이면>이다. 하룬 파로키에 대한 글은 2019년에 <씨네21> 지면에 발표했던 글을 개고해서 구성했고, 거기에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에 대한 글을 새로 써 덧붙였다. 책의 분열적인 어떤 부분을 노출하는 파트가 된 것 같다.

- 어떤 부분들을 주로 손봤나.

이 책에선 의도적으로 시대착오적인 글을 묶고 싶었고 항상 그것을 실천하고 싶었다. 동시대 영화를 다룬 글이지만 과거의 영화적 유산과 접속하는 지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책에 실린 소마이 신지에 대한 글 <벌거벗은 신체>를 예로 들면 ‘1980년에 첫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된 감독은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가’ 라는 부분을 진단해보고 싶었다. 또한 그런 접근을 통해 저널리즘에서 통상적으로 활용하는 작품론이나 작가주의로만 환원되지 않는 논의로 이어지길 바랐다.

-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를 지나온 이후에야 시도될 수 있을 텐데.

일단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나는 영화가 20세 기의 문화로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이라면 20세기의 영화가 될 수 없는 영화의 무능력을,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 자체를 직면할 수는 있다고 본다. 이 책은 그 무능력에 대한 증언일 수도 있다. 빈손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매개로서의 장소 역시 그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사후적으로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영화가 어떤 신호를 노출하는 지점이 있다는 현상에 대한 관찰로서 <빈손의 영화>가 읽힐 수 있다면 좋겠다.

- 영화를 볼 때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영화를 보고 선명하게 그 영화를 기억하게 되는 요소는 어떤 것들인가.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이 서사 비평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인과율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화면의 인과율, 그러니까 어떤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의 비밀이 궁금 했다. 그 중 하나가 몽타주의 비밀이었다. 몽타주가 한 장면 내부에서 뭔가 요청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지, 연출자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결정되는 사항인지가 궁금했다. 내러티브 분석을 하는 사람이라면 장면이 연결되는 흐름에서 드라마적인 문법과 인과율을 볼 텐데 나는 화면과 화면을 결합하는 그 시각적인 세부 요소의 인과율을 궁금해한다. 그런 순간들에서 연출자가 개입한 흔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분명하게 연출이 그것을 요구한, 정확한 타이밍과 외형으로 컨트롤되고 수행되는 연쇄적인 화면 안에서 제시된 요소들. 저널리즘은 물론 비평가들조차 연출에 대한 통합된 생각이나 의견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연출자는 정말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연출이라는 행위는 정말 어디에서 발현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보고 싶었다.

- 영화 전공자가 아닌, 영화평론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영화에 혼재하는 “영화적인 것과 비영화적인 것은 무엇인가”가 아닌가 한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겠는가.

내가 글을 쓰면서 꾸준히 하고 싶었던 작업 중하나는 ‘무지한 비평’이었다. 필요에 따라서 감독이 어떤 영화들을 만들어왔고 어떤 영화의 흐름이 있었는지 언급하기는 했지만 내가 화면 내부에 집착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영화를 함께 봤다”라는 것 외에는 같은 지식을 전혀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때 거기 그 장면이 있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영화를 둘러싼 배경 지식은 없어도 돼, 몰라도 돼. 그런데 이 장면은 우리 다 같이 본 거야. 다만 ‘그 장면’은 영화를 본 모두가 기억하는 두드러진 장면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분명히 봤지만 머릿속에서 잘 인지되지 않았던 장면, 하지만 그런 장면들이 쌓이고 쌓여서 영화를 보는 경험에 강력하게 쌓이게 되는 신호들을 토대로 우리가 느꼈던 경험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자고 생각했다. 함께할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비평이 지식의 공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평론에서 이론을 비롯한 글 인용을 거의 하지 않고 대신 많은 영화의 장면들을 부지런히 호출한다.

내가 쓰는 글이 50, 60년대 미장센 비평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비평이 화면 세부에 있는 것들을 기술하고 거기서 얻어낸 감정을 소묘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인용을 한다는 건 ‘내가 이걸 봤더니 내 몸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라는 그 지식의 공유인 동시에 평자를 드러내는 작업인데, 나는 다른 이론 혹은 비평의 인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들의 배열로서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나름대로는 인과적인 흐름을 따른다고 생각하는데, 그 인과적인 흐름은 내게 있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비약적, 비논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나의 설득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 <씨네21> ‘프런트 라인’에 쓴 글은 개봉작에 국한되지 않았다. “쓰고 싶다”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들은 어떤 영화들인가. 무엇을 가진 영화들인가.

흉해질 때. 영화가 흉하다. 그 ‘흉하다’는 것은 만든 사람들이 훨씬 강하게 의식한다고 생각 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너무나 아름답고 유려 하고 잘 구성된 영화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다. 이를테면 <애프터썬>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 지만 한치의 흉함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랜드 투어>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흉하게 웃는 장면이 있다. 잘 짜인 흑백영화의 형식적 짜임새를 이탈해버리는 흉암이 스크린에 감각적으로 새겨지는 거다. 관객으로서는 그 흉함을 항상 즐겁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규격화된 영화를 언제나 뒤흔든다. 어떤 식으로든 영화가 흉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 영화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 신작을 기다리는 영화감독이 있나.

신작… 제일 어려운 신작. 이 책에 싣지 못해서 아쉬운 글은 브뤼노 뒤몽에 대한 것이다. 그의 급진적인 최근 작업에 대해 정리된 언어를 구체화하고 싶다. 브뤼노 뒤몽, 알베르트 세라, 페드로 코스타까지 세 사람이 내게는 화두다. 또한편으로는 변형된 서부극을 찍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을 항상 갖고 있다. <베스턴> 같은 영화. 작가가 속한 국가 단위를 벗어나는, 다른 방식으로 추방자들과 경계 지대라는 장소를 픽션화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영화들에 대해 생각 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어떤 공간을 영화적 장소로 담아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감독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천만원 이하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 가난한 감독들의 실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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