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영국은 유럽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고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홀리 아일랜드에 모여 살아간다. 오랜 고립과 생존으로 작은 공동체를 이룬 주민들은 현대 의복을 입고 활을 둘러매고 있어 중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직 한번도 섬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12살 소년 스파이크(앨피 윌리엄스)는 아버지 제이미(에런 존슨)와 함께 본토로 여행할 채비를 한다. <28일후...>는 2002년 개봉 이후 아포칼립스의 감염자 묘사의 변형과 실험적인 디지털 촬영 방식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뒤 <28주 후>로 이어진다. 대니 보일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은 <28년 후>는 <28주 후>보다 첫 작품인 <28일후...>와 많은 면에서 연결고리와 공통분모를 지닌다. <28년 후>는 문명이 사라진 아포칼립스에서 다시 소년의 성장 서사로 회귀한다.
무너진 질서 안에서 가장 사소한 것으로 무장하기
<28일후…> 시리즈의 세계관에서 감염을 퍼뜨리는 원인인 분노 바이러스는 2000년대 초 유효하게 작동하던 시대적 불안과 긴장을 반영한 설정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병실에서 깨어난 <28일후...>의 짐(킬리언 머피)은 어른 남자의 모습이지만 소년처럼 행동한다. 바이러스로 세상이 미쳐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연인도, 자기 가족도 아닌 부모 집을 찾는다. 이후 영화는 짐이 서서히 남성으로, 전사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다. <28일후...>가 현대 좀비 장르를 다시 정의내린 영화로 평가받는 이유는 달리는 좀비를 보여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비틀린 인간성의 상징인 감염자보다 같은 생존자에게서 공포가 비롯된다는 점에서 장르의 근간을 흔들었다.
<28년 후>의 스파이크는 짐과 같이 성장의 기로에 있다. 이 영화에는 또 한명의 소년 지미가 등장한다. 지미(잭 오코넬)는 이미 무엇이 되어버린 소년이다. 스파이크는 고립된 섬의 공동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의 세계를 모두 겪어낸다. 스파이크는 아버지와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전사가 되는 법을, 어머니의 잃어가는 기억 안에서 사랑을 떠올리며 죽음을 기리는 법을 배운다. 아버지의 질서는 좀비 장르의 명맥을 이어가는 방법이고 어머니의 세상은 가장 평범한 인간의 드라마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28년 후>에서 비틀어진 장르 공식은 바로 이 가족 서사와 함께 놓여 있을 때 가능해진다. 문명이 바스러진 세계에 뿌려진 재앙은 감염자에게 물려 죽는 것 외에도 다양하다. 이미 망해버린 것 같은 세계의 생존자들은 질병에 걸릴 수도, 기억을 잃게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평화로운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아포칼립스 위에 놓인 운명 역시 평범한 인간의 삶이라는 드라마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족의 붕괴 역시 평범하지만 좀비 호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소년에게 있어 전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무너지는 이유는 누군가 감염자에게 당해서가 아니라 아들의 눈앞에서 외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부 아버지의 세상을 스파이크가 벗어나 후반에 도착한 어머니 아일라의 세상에는 문명의 신호가 속속 도착한다. 활 대신 외국 군인이 가져온 군용 무기나 휴대폰, 마을 전경에서 지직대는 무전기의 신호음이 그렇다. 아버지가 중세와 전사, 죽음을 관장할 때 어머니는 문명과 구원, 사랑을 가르친다. 본토의 남서쪽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시체를 태우는 켈슨(레이프 파인스)은 장르적 세상에 순응하며 생존을 도모하는 전사가 아니라 장례를 치르는 인물이다. 새롭게 진화한 감염 유형 중에 알파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기로 묘사된다.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알파에게 삼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알파가 잠시 정신을 잃었어도 켈슨은 그의 목을 베거나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켈슨의 정신은 어머니 아일라와 연결되어 있다.
가장 강력해야 할 장르적 공포 안에서 드라마적 요소가 작동하는 이질감이야말로 <28년 후>의 매력이다. 덕분에 여느 좀비물에서 보기 힘든 역설적인 장면을 낳기도 한다. 절대적 공포로 군림하는 알파가 제방길을 따라 스파이크와 제이미를 뒤따를 때, 뜀뛰는 그의 발소리는 거대한 심장 박동처럼 울린다. 바닷길 위 하늘은 은하수로 가득 메워져 있어 알파는 마치 우주에서 태어난 신비로운 하나의 생명체로 그려진다. 이따금 스크린을 채우는 켈슨의 화염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재앙과 멸망을 예고하는 이미지로 해석되기 쉬운 화염 이미지는 켈슨이 추모비를 세우고 죽은 이들을 화장해 장례를 치르는 의식을 통해 붉은 화마는 병든 세상의 죽음을 정화하는 의미로 뒤바뀐다.
죽은 자들이 뼈에 붙어 썩어가는 살점만 남은 몸으로 산 자들을 향해 근원을 알 수 없는 갈망을 드러낼 때마다 고개를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어째서 죽은 자들은 서로를 갈망하지 않는가. <28년 후>는 여전히 장르 법칙을 비틀되 장르의 완전한 금기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대신 스파이크가 겪은 성장통은 지미의 아버지가 감염자에게 물리기 직전,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음이 아니라 구원’이라 말하는 회의주의에 정면으로 맞선다. 대니 보일 감독이 시리즈의 다음을 예고하며 그것은 악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언급했을 때, <28년 후>는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가장 희망적일 수 있는 소년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지미와 스파이크, 두 소년은 아포칼립스에서 살인귀가 될 수도 있고, 사랑을 알아 어린것을 지키려는 전사로 자랄 수도 있다.
오래도록 반복되는 풍경
대니 보일이 창조한 세상은 <28일후...>와 <28년 후>를 오가며 반복된다. 짐과 스파이크는 유사한 장소에 발 디뎌 성장의 길에 이른다. 세상이 아주 오래 멈춰 있었다는 신호와 같은 먼지 쌓인 고요한 주유소, 무성한 초원을 달리는 말과 사슴 무리, 무력한 군인, 온전하게 남은 유적지와 결코 안전하지 못한 교회 예배당, 불안하게 울리는 무전기의 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반복은 시리즈의 형식적 연속을 넘어 아포칼립스의 풍경을 전승한다. 시대와 인물은 달라졌어도 익숙하게 펼쳐지는 정적과 폐허는 놀랍도록 닮았다. 과거에 펼쳐졌던 장소가 현재에 되풀이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 짐과 스파이크가 걷는 길은 하나의 궤도처럼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