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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길을 잃은 청춘들이 모이는 최적의 장소, <브레이킹 아이스> 앤서니 첸 감독
최현수 2025-06-05

싱가포르 감독 앤서니 첸의 영화에는 언제나 물기가 담겨 있다. <웻 시즌>에선 고온다습한 우기 속 장마가 사제 관계를 감싸안았고,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드리프트>에선 지중해의 바다가 이방인들의 상처를 보듬었다. 그런 그의 영화가 이젠 냉기가 깃든 땅 연길로 향했다.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남자 하오펑(류호연)은 여행 가이드 나나(주동우)와 그의 친구 샤오(굴초소)와 함께 일주일을 보낸다. 얼음처럼 금방 결속된 세 사람은 흔들리는 청춘답게 여러 차례 미끄러져 넘어지고 배회한다. 지난해 <브레이킹 아이스>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앤서니 첸 감독과 <씨네21>이 만난 날도 때마침 궂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다가도 얼음처럼 단단하게 변하는 그의 언어는 자신의 영화 세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북한과 중국이 맞닿는 국경지대 연길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

=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느낀 속박감에서 벗어나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공간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열대기후의 싱가포르와 달리 혹독한 추위가 있는 지역을 원했다. 중국 지도를 살피던 중 백두산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은 북한이고 절반은 중국에 속해 있더라. 답사를 위해 백두산으로 향한 날 천지를 보며 엄청난 울림을 느꼈다. 대여섯번 방문해도 안개에 가려 못 보는 경우도 허다한데 운이 좋았다. 반드시 영화에 이 풍경을 담겠다고 다짐했다. 도착지가 정해진 뒤 출발점이 될 도시를 물색할 차례였다. 인근 도시를 찾던 중 연길이 눈에 들어왔다. 국경을 접하면서도 인구의 50%가 조선족이라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온통 중국어와 한국어가 병기된 거리의 간판을 보면서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길을 잃은 청춘들이 모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제작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나.

= 전에는 시나리오 작업에만 2, 3년을 몰두했기에 캐스팅부터 로케이션까지 모두 정확하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처음으로 몇 페이지 정도의 컨셉만 잡은 트리트먼트 수준에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연길에 도착해서야 내가 바라본 것들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중개업자와 나나의 아파트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잠시 뜨는 시간이 있었다. 근처를 둘러보다 공원을 발견했다. 도심 한가운데에 사슴과 원숭이가 있었다. 무척이나 초현실적 광경이었다. 그래서 이 동물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게 됐다.

- 낯선 땅 연길에 여행객으로 온 하오펑처럼 연길을 카메라로 담는 당신도 이방인이다.

= 이 영화를 철저히 이방인의 시선에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 와서 연길이라는 공간으로 모이게 된다. 여태 나의 영화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묘사했지만 이번 작품은 몽상이나 초현실에 기대어 감정을 풀어갔다. 이방인에게 타지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유영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그 때문인지 연길을 묘사한 다른 영화와 달리 다채로운 풍경이 담겨 있다.

= 중국 북부 지역은 빈곤하다는 인식이 많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이 가난, 범죄, 암울함 등 쟃빛으로 중국 북부를 묘사한다. 하지만 내가 본 연길은 아주 다채로운 색이 존재하는 도시였다. 연길에 사는 조선족들 대다수는 남한에서 일을 하고 그때 접하게 된 패션이나 문화를 고스란히 갖고 돌아온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사람들도 잘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공유하고 싶다. 연길이 인구당 카페 수가 가장 많다는 사실을 아는가? 카페 문화가 번성한 이유도 사실 남한의 영향이 크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즐기는 커피 문화가 연길에도 정착되어 어디를 가나 카페 천지였다.

- 조선족 전통 혼례부터 단군신화와 아리랑까지. 한국인에게 익숙한 문화 요소들이 등장한다.

= 단군신화와 아리랑은 전부 백두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의 혼례 장면도 연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노래를 유심히 들어보면 남한의 노래가 아니라 북한의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공간에서 느낀 감정을 시나리오에 녹여내면서 이런 요소들도 함께 따라오게 됐다. 연길에 머물면서 단군신화를 다시 읽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신화가 실존하는 이미지로 구현됐으면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에 곰이 등장하는 장면을 넣었다. 이런 요소들이 한국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 등장인물이 전부 얼음을 매개로 이어져 있다. 눈이 아닌 얼음을 택한 이유가 있나.

= 겨울 배경 영화에서 눈이 주로 활용된다. 마치 로맨틱한 드라마나 크리스마스처럼 춥지만 따스한 느낌을 주지 않나. 하지만 이 이야기는 눈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얼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면 하룻밤 사이 거대한 강도 순식간에 언다. 냉동고에 물을 얼리는 데에도 몇 시간이면 충분하다. 얼음은 빨리 어는 만큼 빨리 녹기도 한다. 얼음을 테이블 위에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물로 변한다. 이러한 얼음의 속성이 세 사람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아주 빨리 친해지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지는 관계다. 결국 이들이 함께했던 추억과 감정만 남을 뿐이다.

- 영화에 드러난 청춘의 불안감은 <웻 시즌> 속 중년의 위기나 <일로 일로>의 가족의 위태로운 일상 혹은 <드리프트>의 난민이 느끼는 고독감과는 궤적이 달라 보인다.

= 청춘의 불안감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세계 각지에서 젊은 세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많이 접했다. 이런 보편적인 불안과 무력감은 주로 기성세대나 정부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커다란 벽을 마주하면서 이런 무력함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모두가 느끼는 집단적인 우울감에 일말의 단초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명료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이 궤적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려 했다.

- 당신의 영화 속 인물들은 결국 찰나의 연대에 성공한다. 작금의 시대에도 연대의 가능성을 믿는 것일까.

= 나는 낙관주의자에 가깝다. 세상은 여전히 가혹하고 잔인하지만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확실히 나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모티프 중 하나가 이방인들의 깊고 복잡한 유대감이다. <일로 일로>는 필리핀 출신 가정부와 싱가포르 소년의 연대를 다뤘고, <웻 시즌>은 말레이시아 교사와 싱가포르 학생 사이의 관계에 집중했다. <드리프트> 속 라이베리아 출신의 난민과 미국 투어 가이드도 마찬가지다. 이번 영화도 세 이방인이 주말 동안 일시적인 연대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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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