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영화 연출자들의 마스터스 토크
시네마엔 국경이 없다는데, 게다가 같은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들이 만나면 대화가 더 잘 통할까. 이번 마스터스 토크는 이같은 호기심에서 출발해 그 가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사회문화적 맥락이 녹아든 블랙 호러 영화 <씨너스: 죄인들>(이하 <씨너스>)을 연출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지난 5월16일 러브 스토리와 호러를 절묘하게 엮은 <잠>의 유재선 감독과 온라인으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었다. 전통적인 고딕호러의 소재인 뱀파이어를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로 이식시키는 이야기로 운을 뗀 이날의 대화는 오랫동안 쿠글러 감독을 사로잡았던 공포소설과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번 마스터스 토크는 미국의 86년생 젊은 감독과 한국의 89년생 신인감독간 만남으로도 요약할 수 있다. 기존 창작자들과 달리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원작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씨너스>로 북미 극장가에서 흔치 않은 흥행 기록을 세웠다. 오리지널 영화가 2억달러를 돌파한 것은 가족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 이후 8년 만의 기록이다. 게다가 그는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와 협상을 벌여 2050년이면 <씨너스>의 저작권을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많은 영화인들이 원작이 될 창작물의 판권을 사거나 리메이크에 몰두하는 사이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기존의 관행을 깨는 파격적인 행보는 쿠글러 감독 특유의 젊은 에너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작품 내적인 이야기는 물론 그가 이끄는 제작사 프록시미티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도 마스터스 토크 지면을 통해 공개한다. <씨너스>를 본 관객은 물론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을 줄 이날의 대화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유재선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씨너스> 굉장히 잘 봤고요. 감독님의 열렬한 팬으로서 마스터스 토크에 참여하지만 이제 영화 한편을 연출한 감독으로서 배우는 학생의 느낌으로 <씨너스>를 보고 궁금했던 질문들을 왕창 쏟아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라이언 쿠글러 아닙니다. 유재선 감독이 품은 어떤 질문이든 그를 바탕으로 대화할 수 있어서 행복한걸요. 이렇게 유 감독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며, 부산에서 제 영화 <블랙 팬서>를 촬영하고 그곳에서 큰 시사회를 가진 적 있습니다. 부산이 참 그립네요. 젊은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완성한 유재선 감독의 멋진 커리어에도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 첫 번째 장편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마쳤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땐 저 역시 영화를 계속해서 배우는 중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장편영화, 단편영화, 학생영화, 뮤직비디오, 광고 등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도전하는 걸 결국 해냈다는 의미더군요. 지금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실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저는 유 감독님을 학생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우리가 만난 ‘마스터스 토크’라는 코너도 적합한 제목이라 생각합니다.
유재선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 운이 좋은 케이스였습니다. <블랙 팬서>를 한국에서 촬영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봉준호 감독님의 <옥자> 연출팀으로 일하던 당시, 많은 스태프들이 <블랙 팬서> 촬영에 참여했고 그 현장을 너무 즐겁게 추억하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요. <블랙 팬서>가 한국을 배경으로 두었기 때문에 한국 관객에게도 특별히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씨너스>를 이야기하는 자리지만 <블랙 팬서>도 굉장히 잘 봤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독님의 데뷔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잖아요. 전작인 <크리드>는 원작 영화가 있었고, <블랙 팬서>는 원작 코믹스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씨너스>는 감독님의 오리지널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연출하셨을 때 전작과 다른 접근 방식이나 마음가짐의 차이가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이언 쿠글러 정말 많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전작을 창작하면서 배운 것들을 교훈으로 삼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 영화가 데뷔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처럼 하룻밤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24시간 영화’가 되리란 걸 알았어요. 다만,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처럼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든, 코믹스를 각색하든, <록키> 세계관을 다른 방식으로 그리든 간에 거기엔 연출자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존재해요. 예술가에겐 쉽지 않은 일이죠. 이번 작품 <씨너스>는 따라야 할 스토리의 규칙이 없고, 이 영화를 보러 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관객도 감을 잡을 수 없어 오히려 신났어요. 물론 문학과 영화, 텔레비전에서 이미 다룬 ‘뱀파이어’를 소재로 작업했기 때문에 관객이 뱀파이어 서사에 기대하는 지점과 규칙들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화나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때와 비슷한 지점도 있으나 더 쉽기도 했고, 때때로 더 어렵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씨너스>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영화를 판매하는 거였어요. 영화를 홍보하고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다는 게 무척 어려웠죠. 세상엔 볼거리가 많잖아요. 관객 입장에선 익숙한 세계관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안전하죠.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선택하기엔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케팅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실화를 기반으로 하거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 오리지널 영화를 홍보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유재선 이 영화를 제작했을 때 어려운 점이 영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마케팅 부분이라고 말씀하셔서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감독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프로듀서인 아내에게 최초로 피칭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본 적 있습니다. <씨너스>를 처음 어떻게 소개하고 피칭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이언 쿠글러 네, 피칭했죠. 진지 쿠글러는 제 프로듀서이자 아내이고, 파트너인 세브 오해니언 세 사람이 같이 제작사 ‘프록시미티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어요. 우린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에 작업 전에 아이디어 테스트하는 것에 익숙해요. 아내 앞에서 스토리에 대해 피칭하고 제가 상상한 것들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진지는 정말 좋은 첫 번째 반응자예요. 저에 대해 잘 알고 제 취향에 대해서도 잘 알죠. 제가 얘기하면 진지는 “이건 잘 모르겠어” 아니면 “이거 좀 멋지네”라고 말하곤 해요. 이번엔 집에서 피칭했는데 이야기에 빠져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진지가 듣고는 “꽤 괜찮네”라고 말했어요. 이야기를 다듬어서 캐릭터들이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이 어떤지에 대해 확고히 해야 했죠. 이 영화는 블루스 곡 <Wang Dang Doodle>를 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한 건물에 여러 친구를 불러 파티를 여는 내용의 노래예요. 시끄러운 사람들이 모여 멋진 파티를 열고 그 파티에 초자연적 만남이 벌어지는데 정말 멋지죠. 진지와 저는 이 아이디어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뱀파이어가 돼야 할까? 늑대인간이 돼야 할까?”라면서요.
유재선 아이디어 단계에서는 늑대인간 소재도 고려했는데 뱀파이어로 최종 확정 지은 계기는 무엇인가요.
라이언 쿠글러 뱀파이어는 제 초기 아이디어 중 하나였어요. 다른 신화적 존재들이 뭐가 있을까 살펴봤지만, 계속 뱀파이어로 돌아왔어요. 제가 뱀파이어를 가장 좋아하거든요. 스티븐 킹의 뱀파이어 소설 <살렘스 롯> 덕분에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살렘스 롯>은 정말 강렬한 책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무서운 소설이었어요. 저는 항상 이 소설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유령, 늑대인간, 크리처, 그리고 좀비들까지 다 좋아하지만 이번엔 뱀파이어가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들보다 뱀파이어가 이 영화에 잘 어울렸습니다.
유재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뱀파이어가 아닌 다른 무엇을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뱀파이어 설정이 테마와 맞물려 있어서 이보다 더 완벽한 선택이 있었을까 싶어요.
라이언 쿠글러 네, 확실히요. 음악산업, 자본주의, 편견, 종교 등 모든 것이 뱀파이어란 개념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현대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 모두 그랬죠. 지금 돌이켜보면 뱀파이어 외에 다른 소재였다면 이렇게 영화와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프록시미티 미디어
프록시미티 미디어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제작자인 진지 쿠글러, 제작자이자 시나리오작가인 세브 오해니언이 2018년에 설립한 멀티미디어 제작사다. 음악감독 루드비그 예란손도 공동 창업자로 참여했다. 프록시미티 미디어는 영화는 물론 다큐멘터리, 시리즈, 사운드트랙 음반을 제작한다. 설립한 지 약 3년 만에 프록시미티 미디어는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로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에 후보 지명을 받았으며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결과를 냈다. 참고로 라이언 쿠글러는 1986년생, 진지 쿠글러는 1985년생, 세브 오해니언은 1987년생 젊은 영화인들로 알려져 있으며, 라이언 쿠글러와 오해니언, 예란손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문이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을 사로잡은 <살렘스 롯>이란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이 1975년 출판한 공포소설로, <캐리>에 이어 두 번째 집필한 책이다. 주인공 소설가 벤이 다음 소설을 쓰기 위해 25년 만에 고향 메인주 ‘살렘스 롯’으로 돌아오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로, 벤은 마을의 텅 빈 유령의 집이 오스트리아 이민자 커트에게 팔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긴 여행을 떠났다는 커트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고, 어쩐 일인지 마을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사망했거나 사라진 주민들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돌아다닌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살렘스 롯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으로, 책 <살렘스 롯>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킹은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활용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유재선 감독의 마스터스 토크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