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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관찰한 세상을 우리가 본다면 - <소년의 시간>을 통해 ‘어린이 당사자성’을 다룬 스토리의 조건을 돌아보다

<소년의 시간>

넷플릭스가 지난 3월 공개한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동급생 살해 혐의를 받는 13살 소년 제이미 밀러(오언 쿠퍼)가 자신의 방 침대에서 긴급 체포되면서 시작한다. 이후 정황을 바짝 붙어 따라가는 1회 1시간 분량의 에피소드는 모두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원제가 ‘Adolescence’ (청소년기)인 이 드라마의 시청자는 주로 비청소년, 어른들인 것 같다. 마지막 회에서 제이미의 아버지 에디 밀러(스티븐 그레이엄)는 사려 깊은 딸 리사(아멜리 피즈)를 가리키며 아내 맨다(크리스틴 트러마코)에게 “우리가 어떻게 리사를 저런 애로 만들었지?”라고 묻는다. 맨다는 “제이미와 똑같은 방법으로”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은 서사의 핵심을 관통한다.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제이미는 리사와 마찬가지로 이들 부부가 낳고 길렀다. 더불어 이 장면은 “제이미를 저렇게 만든 것은 우리 둘만의 책임은 아니다”라는 항변을 암시한다. 엇비슷한 정성과 무관심으로 두 아이를 길렀지만 리사의 남동생 제이미는 짐작할 수 없는 암전의 영역을 지닌 아이가 되었다. 이런 제이미를 “만드는 일”에 함께 참여한 누군가가 더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남성 청소년을 향해 특정한 맥락에서 오염된 정보를 발신해온 디지털 미디어에 주목한다. 이에 시청자들은 스마트폰과 SNS, 인터넷 사이트로부터 아이들을 격리시킬 방안을 고민한다. 만약 어떤 A와 B가 우리 아이들을 저렇게 ‘만들었다면’ A와 B를 제거했을 때 우리 아이들은 해맑게 회복될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진단은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답도 아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당사자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동청소년문학 비평에서는 어떤 텍스트를 볼 때마다 어린이, 청소년 당사자의 시선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아동청소년을 위한 텍스트라면 이는 제1의 조건이며, 비청소년이 주로 보는 텍스트라도 어린이의 당사자성은 긴밀하게 고려하는 조건이다. <소년의 시간> 은 후자에 속하는데, 제기하는 사안의 의미와 높은 극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당사자들의 시선은 작품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본다. 가해자 제이미와 피해자 케이티 외에도 제이드나 라이언 같은 청소년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자이크처럼 움직이며 시종일관 비청소년들의 염려가 담긴 관점으로 관찰된다. 제이미를 관찰하는 형사 루크(애슐리 월터스), 심리학자 브라이어니(에린 도허티)를 카메라가 관찰하고 시청자가 그 카메라의 시선을 원테이크로 따라간다. 중첩된 관찰 구조는 시청자에게 대단한 집중력을 제공하지만 비청소년의 시선 안에서 그러하다. 작품 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기회를 얻기 어려우며 그들의 할 말은 나오려다가 끊긴다. 의도는 아니겠지만 미디어와 유착해 괴물이 된 요즘 애들이라는 타자화된 결론으로 수렴한다. 원테이크 촬영기법은 제이미로 대표되는, 현상으로서의 청소년과 살인의 배후를 사실적으로 뒤쫓는 방식으로서 효과적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 드라마의 타깃 시청자는 비청소년이며 4부작 시리즈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 있다.

콘텐츠가 어린이 청소년의 당사자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어린이는 외부에 의해 쉽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양육자의 지대한 영향 속에 있고, 당대의 미디어와 환경에 시시각각 반응하겠지만 그들은 어떻든 스스로 자라려고 애쓴다. 통제나 조정의 대상이 아니다. 예전 어린이는 말을 잘 듣고 온순했는데 요즘 어린이는 난폭한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는 자신이 자라고 싶은 방향으로 그 여린 줄기를 비튼다. 뿌리를 뽑아 다시 똑바로 심으면 일렬로 잘 자랄 거라는 예측은 맞지 않는다. 뿌리든 잎이든 결국은 그들 자신이 뻗는다. 다만 존재의 독립성은 보장된 권리가 커지면서 운영 범위를 넓히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현대의 어린이가 더 자율적인 삶을 상상하며 나아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기 힘들었던 그 확장의 추진력을 미디어가 제공 중이다. 제이미는 아마도 그 여행 중에 고립됐을지 모른다. 어른은 그 여행을 막을 수 없고 동행할 수 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동행자가 거의 없었음을 드라마는 증명한다.

두 번째로, 어린이를 관찰되는 대상이기보다는 관찰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일로 내재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이 종종 잊는 것은 어린이가 세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이의 관찰을 바깥을 향하며 그 바깥세상에는 어른도 포함된다. 어린이들의 관찰은 본래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데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는 그 도달 지점을 대폭 넓혀놓는다. 어린이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를 나란히 상상하지 못한다면 어린이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이 드라마가 말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어린이에게 24시간 깊게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무시하며 행동하곤 한다. 너는 왜 그러느냐는, 어린이를 향한 다그침은 어른 자신에게 던져야 할 물음일 때가 많다. 늘 그래왔지만 디지털 미디어 안에서는 개별 어른이 아니라 공동체의 수많은 불특정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관찰된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어느 집안에서 뭘 보고 자랐느냐는 타박은 의미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다 같은 집안이 된 셈이다. 어린이가 만날 어른은 밝은 방향이 든 어두운 쪽이든 무궁무진하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서 어린 관찰자들이 만나는 어른이 그들과 멀리 떨어진 나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비양육자도 어린이에게 더 수월하게 관찰되는 새로운 환경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학대받고 방치된 어린이들에게 희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전보다 멀리 있지 않다.

어린이는 비청소년의 도피처가 아니다

세 번째로, 어린이는 회상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비청소년들의 은은한 도피처가 아니다. 어린이의 존재 목적은 현재와 미래에 있으며 그것은 ‘내 안의 어린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된 나의 고단한 현재를 위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시간 나름대로 의미를 지녔던 소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오늘의 수단으로 호명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비청소년에게 권장하고 싶은 태도다. 그러나 많은 이야기들이 어린이를 회상의 대상으로 아련하게 불러내고 어린 시절을 이용하려 든다. <소년의 시간>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제이미의 시간을 함부로 회상하려 들지 않는 작품 속 어른들의 거리두기에 있다. “나도 그 시절에는”이라는 말을 아무도 던지지 않는다. 그것은 감독의 현명함이었을 수도 있고 감지하기 어려운 각도로 변화해버린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간 간격의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시간>은 더 많은 비청소년들에게 시청을 권하고 싶은, 비청소년을 위한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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