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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시간,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하성국 배우의 촬영 일지
하성국 2025-05-15

저는 지금 전주에 와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영화제로 전주를 방문했습니다. 올해는 다른 일정으로 왔습니다. 같은 시기 두번의 방문이 저에게 지난해를 더 선명히 추억하게 만듭니다.

지난해 영화제가 끝나고, 곧장 촬영을 하나 했습니다. 제목도 내용도 아무것도 없었던 홍상수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촬영했던 날들과 비슷한 시기에 이제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닭백숙이 이끈 산, 영화의 시작

2024년 2월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여행자의 필요>가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수상했습니다.

3월 초

서울 모처에서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작은 축하 자리가 있었습니다. 다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식사 자리가 이어졌습니다. 그날의 음식 차림으로 맛있는 닭백숙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함께했던 강소이 배우의 부모님이 전원생활을 하며 직접 닭을 기르고 백숙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감독님이 부모님에게 자신을 초대해주면 어떻겠냐고 농담을 건네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며 그날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며칠 후, 감독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번 모임에서 얘기가 나왔던 강소이 배우의 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것을 여쭤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강소이 배우에게 연락했고, 부모님에게서 흔쾌히 초대해주신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3월 말

감독님, 제작실장님과 함께 강소이 배우의 부모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작은 산의 한면을 자연스럽고 어지럽지 않게 잘 가꾼, 시간과 정성을 들였음이 느껴지는 멋들어진 집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집을 구경시켜주셨습니다. 주차 공간과 집 안, 잘 정돈된 작은 길을 따라 있는 닭장과 아름드리나무들, 그리고 산꼭대기에 있는 넓은 잔디밭까지. 꽤 인상적인 집을 둘러싼 자연 속에서 감독님과 아버지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닭백숙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백숙이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도시 일대를 차로 둘러보았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장소는 이날 직접 방문했던 곳입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 다 함께 닭백숙을 먹었습니다. 만약 촬영하게 된다면 협조를 부탁드렸고, 강소이 배우의 부모님은 이번에도 흔쾌히 응하셨습니다.

큰일 났다, 그래도 좋은 마음을 갖자

4월 중순

본격적인 촬영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소이 배우의 부모님 댁의 사정과 당시 방문했던 곳들의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의상과 최근 모습들의 사진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면도를 하지 말고 수염을 길러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난생처음 결이 느껴질 정도로 수염을 길러보게 되어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월10일부터 25일까지의 촬영 일정이 정해졌습니다.

5월

촬영에 앞서 간단히 고사를 지냈습니다. 그날 참여한 인원으로 누가 영화에 출연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권해효·조윤희 선배님, 강소이·박미소 배우, 그리고 제가 참여했습니다. 서로 안부를 나누고 인사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누가 무슨 역할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고사를 지낸 후 감독님과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연기할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고 하셨습니다. 현장 답사 때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셔서 당연히 어른들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젊은 시인인데, 소이 배우와 연인 사이이고 집 근처에 잠깐 왔다가 부모님과 언니를 만나게 된다.” 이 정도로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다른 배우들에게도 짧은 설명만 해주셨습니다.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물론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주셔서 늘 감사드리고 영광스럽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촬영 날까지 별생각을 다 했습니다. (물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인이라고 하니 글을 좀 써둘까 싶어 몇자 끄적이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건강하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감독님이 늘 촬영 전에 해주시는 ‘좋은 마음만 가지고 현장으로 오라’는 말을 이번에도 믿기로 합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며 촬영 날을 기다립니다.

자연 속으로. 촬영을 시작하다

촬영 첫날

아침 9시에 모두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커피와 차 한잔씩 나눠 마시며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이제는 당연하게 무슨 내용을 촬영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확정되지 않았던 의상들을 하나씩 입어보고 결정합니다. 그날 아침에 써서 출력된 대본을 전달받습니다. 영화사 직원 분의 실제 오래된 차가 등장합니다. ‘하동화’라는 제 배역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됩니다. 감독님 촬영장의 진행 방식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당일에 받은 대본으로 연기하는 건 늘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긴장했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걸 한다는 설렘도 있습니다. 많은 대사량에 놀랄 새도 없이 숙지하기 시작합니다.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다 상관없어지고, 집중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공간과 시간만 따로 떨어져 있는 듯 기묘한 느낌을 감각합니다.

여자 친구 ‘준희’와의 첫 등장 장면을 죽어라 연습합니다. 우리끼리 대사를 주고받고 있다 보면 어느새 감독님과 카메라가 옆에 와 있습니다. 대사와 동선의 미묘한 차이를 조금씩 수정하다 보면 카메라 앞에는 배우만 남겨져 있고, 첫 장면 촬영이 시작됩니다.

촬영을 진행하다 보면 참 많은 일들이 생깁니다. 어떤 날은 촬영이 끝나고 집에 와선 거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합니다. 밥을 먹기 힘든 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들도 많습니다. 그런 믿음의 연속이 계속 촬영을 해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이번 촬영은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 촬영하다 보니 신비롭고 재밌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무들, 벌레와 동물들 소리, 햇살과 촉촉이 젖은 흙 내음까지. 요소들을 열린 자세로 활용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현장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 속 사람과 자연에 가까운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달 구경하러 올라갔다가 저 혼자 누워 있는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촬영 당시 모든 요소가 잘 맞았던 것 같은 여운을 안겨줍니다.

에라 모르겠다, 술을 마시자

배우들이 모두 모여 술과 닭백숙을 먹는 긴 장면 여러 개가 등장합니다. 술자리 장면이 있기 전에 늘, 실제 술 또는 비슷한 색의 음료 중에 선택권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조금 더 용기를 내 ‘에라 모르겠다’ 정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차 없이 술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술자리 장면은 실제로 음식을 먹고, 잔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고 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장면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의 부모님과 밥을 먹게 된 상황은 다소 어색할 수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연기 중에 잠깐의 정적이 흐르기도 했는데, 해효 선배님이 상황에 딱 맞는 연기로 자연스럽게 술 한잔을 더 따라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대본에 없던 한잔이지만 촬영이 반복적으로 진행될수록 마음이 더 편해지고(?) 좋았습니다. 덕분에 연기 상황이 잘 맞물려 돌아갔고, 감독님도 한잔 술 더 따르는 것이 좋다며 장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술자리 장면의 마지막엔, 동화의 시 낭송과 동화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긴 장면이 있습니다. 장면도 길고 대사도 많고 감정도 복잡했습니다. 부담도 좀 되고, 소극적으로 혼자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윤희 선배님이 옆에 오셔서 끝까지 제 템포에 맞춰 기다려주고, 대사를 하는 인물의 입장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는 열정적인 시 낭송을 실제로 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해효 선배님이 시범을 보이며 제가 준비할 때까지 여유롭게 장난도 치시며 기다려주셨습니다.

감독님은 촬영 전반에 걸쳐 제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대사 너머 방대한 공간으로 자리한 인물의 입체적이고 진실된 감정을 끌어내주기 위해 설명하고 연출해주셨습니다. 영화 만드는 일은 결국 사람들이 모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란 사실을 또 깨닫습니다. 저도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지만 아마도 이번 작품은 제가 감독님과 선배님들, 함께하는 동료들의 도움을 훨씬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차량 장면이 전날 밤 촬영에서 이어졌습니다. 다들 조금씩 지치고 힘들었지만 마지막 장면이란 걸 알아 집중했습니다. 좁은 시골 도로였으나 아침에는 통행량이 많아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해가 건너편 산 위로 한참 올라가고, 그렇게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짧다면 짧지만, 집중한 시간과 날들을 생각하면 또 길게도 느껴지는, 동화처럼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좋은 꿈을 꽤 오래 꾼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정말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찍었다는 것, 믿음을 되새긴다는 것

2025년 2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열정적이었습니다. 웃고 박수치고 안타까워 탄식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큰 화면에 제 얼굴이 나오니 처음엔 당황스럽다가도 금방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호응하며 관람한 관객들 덕분에 즐거운 분위기에서 끝까지 즐길 수 있었습니다.

촬영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인물들간의 관계와 장면들의 연속에 균형감이 느껴져서 신기했습니다. 또 많은 요소들(할머니, 나무, 산, 개, 사리탑, 죽음)이 저로 하여금 기묘하고 미스터리한 인상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촬영 당시 실제로 머물렀던 공간과 영화 속 공간이 신기하게 겹치고 또는 분절된 것처럼 표현되어서 신기했습니다.

정말 꿈을 꾸었나 싶을 만큼 촬영했던 일이 멀게 느껴지곤 합니다. 오늘처럼 하나씩 기억을 꺼내어보면 배우로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느끼고 생각할 게 참 많은 작업이었습니다. 오직 영화와 연기에만 집중하는 한달여의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작업 전체에 걸쳐 감독님과 나눴던 대화와 과정이 지금과 앞으로의 나에게 큰 힘이 되는 기분이 듭니다. 하나의 작업, 하나의 장면, 하나의 대사에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걸고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 또한 되뇌어봅니다. 감독님은 촬영이 끝나면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도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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