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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클로징] 보노보 폴리틱스
임소연 2025-05-15

어떤 내란은 내란으로 불리지 못한다. 한국여성의전화는 2009년부터 매년 ‘분노의 게이지’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된 여성 살해 사건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해왔다. 2024년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이고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74명이었다. 최소 15.8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이 처했다는 뜻이다. 지난 16년 동안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1560명에 이른다.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또한 심각하다. 2024년 한해에만 처음 본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던 여성은 최소 179명이다. 거의 이틀에 한명꼴이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여성 살해 범죄에 대한 정부의 공식 통계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모든 살해와 폭력 사건을 다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여성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2025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지난 5월4일 경기 이천의 30대 남성이 전 연인이었던 30대 여성을 살해했다. 지난 4월23일 서울 강북구 미아역 인근에서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60대 여성과 40대 여성에게 흉기를 휘둘러 60대 여성이 사망했다. 지난 3월3일 충남 서천에서는 30대 남성이 운동하러 나온 40대 여성을 살해했다. 그런데 분노의 게이지를 올리는 인간들의 뉴스들 사이로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영장류 보노보에 대한 뉴스가 눈에 띄었다. 올해 4월 국제 학술지 <커뮤니케이션 바이올로지>에 실린 콩고의 6개 보노보 집단 연구 소식이었다. 1993년부터 2021년까지 관찰된 총 1786건의 수컷 대 암컷의 갈등 사례 중 61%에서 암컷이 승리했는데 이는 다른 암컷과 팀을 이뤄 싸운 덕분이라고! 수컷 보노보가 공동체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에도 암컷 보노보들은 힘을 모아 수컷을 공격했다고 한다. 암컷 보노보가 수컷 보노보보다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컷에게 공동으로 대항함으로써 암컷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이다. 보노보 집단의 암컷 연대는 보노보 암컷의 안전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4월 국제 학술지 <커런트바이올로지>에 발표된 연구에는 콩고의 보노보 수컷 12마리와 탄자니아의 침팬지 수컷 14마리를 각각 2000시간, 7300시간 관찰한 결과가 실려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보노보 수컷이 침팬지 수컷보다 공격 행동을 2.8배 더 많이 하고 신체 접촉하는 공격 사례도 3배 더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노보 수컷은 암컷을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침팬지 수컷이 수컷보다 암컷을 공격하는 경향이 높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수컷 중심의 위계와 연대가 강한 침팬지 사회에서 수컷에 대한 공격은 집단적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암컷에 대한 공격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보노보 사회를 보며, 수컷이 암컷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사회, 암컷의 주도 아래 평화가 유지되는 사회는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한때 한국 정치판을 이해하게 해주는 책으로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가 회자된 적이 있다. 이제는 침팬지 수컷이 아니라 보노보 암컷에게서 정치를 배울 때다. ‘강남역 살인사건’ 9주기를 맞아 오는 5월17일 전후로 미아역 일대를 비롯해 서울 곳곳에서 열릴 집회에서 실현될 ‘보노보 폴리틱스’를 기대하며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