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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배회하는 소년들처럼, <해피엔드> 소라 네오 감독 인터뷰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5-05-09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의 세상은 온통 음악으로 가득하다. 밤늦게 친구들과 학교에서 음악을 들으며 놀던 둘은 교장의 차를 학교 한가운데 수직으로 세워두는 기행을 저지른다. 화가 난 교장은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해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후미(이노리 기라라)를 따라 코우는 목소리를 내지만, 유타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며 하던 대로 음악 작업에만 집중한다. 그런 유타와 코우의 행동반경은 서서히 달라진다. 소라 네오 감독이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공개했을 때만 해도 그가 이러한 세계를 품은 창작자일 거라 누가 상상했을까. 근미래 도쿄를 배경으로 소라 네오 감독은 내외면의 변화를 마주하는 10대들의 혼란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단순한 청소년의 성장 서사라 일축하기 어려운 <해피엔드>는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제61회 금마장 아시아영화의발견상을 수상했다. 첫 장편 극영화인 만큼 <해피엔드>에는 감독 개인의 경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다. <해피엔드>에 “영화가 끝난 뒤도 이 아이들은 계속 살아 숨 쉰다”(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는 찬사가 따라 붙는 건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 2022년 연출한 <슈가 글라스 보틀>에도 유타와 코우가 등장한다. 이 단편에서 <해피엔드>로 이야기가 확장된 것인가.

정확히는 <해피엔드>의 각본을 먼저 완성한 다음 <슈가 글라스 보틀>을 연출했다. <해피엔드>의 파일럿판인 <슈가 글라스 보틀>을 통해 유타와 코우의 관계성을 먼저 만들어봤다. <해피엔드>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영화에서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4~5명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이 유타의 집으로 모이던 것처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과 우리 집에서 놀곤 했다. 내게 우정은 나를 지탱해주는 단단한 지반과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정치적 의식이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동일본대지진,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한 뒤 도쿄의 반원전 시위에 참여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렇게 많은 일본인이 모여 열띠게 항의하는 걸 본 게 처음이었다.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월가 점령 시위, BLM 흑인 인권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질 때였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인종차별 시위와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2016년엔 미국 원주민들의 다코타 파이프 반대 시위를 바라보며 자본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관해 깊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등의 일본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내게 2010년대는 뜨겁게 시위하고 토론하는 정치의 계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 말한 오랜 친구들과 균열이 생겼다. 정치적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해피엔드>를 쓸 무렵엔 그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겐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그들은 내게 단단한 지반 같은 존재였으니까. 감정은 아무리 생생해도 눈에 보이는 꼴을 갖추고 있진 않지 않나. 그래서 이 감정을 골자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더불어 일본이 이 상태 그대로 나아간다면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사고 실험으로서 <해피엔드>를 만들게 됐다.

- 영화의 배경은 근미래지만 AI 감시 시스템 ‘판옵티’를 제외하고선 첨단기술, 기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슈가 글라스 보틀>에서 로봇 경찰견을 등장시킨 것과는 다른 행보다.

예전에 제작된 SF영화는 종종 상상에 기반한 미래 기술을 묘사하는데 그것이 미래를 예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과거로 회귀한 듯한 인상을 주곤 한다. 그래서 전에 없던 첨단기술을 집어넣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미래적 요소나 기술이 한데 집약된 세계를 떠올렸다.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상기하며 말이다. 한편으론 관객들이 <해피엔드>를 보며 근미래라는 배경을 인지하지 않길 바랐다.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가 영화에서 발휘됐으면 해서 첨단기술을 간헐적으로 등장시키면서도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근미래가 떠오르지 않도록 신경 썼다.

- 그래서인지 <해피엔드>를 보다보면 미래보다는 현재와 과거, 나아가 1990년대 동아시아영화들까지 연상되곤 한다.

취향을 숨기는 게 참 어렵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 학교에 수직으로 서 있는 노란 자동차, 도시를 배회하는 두 남학생 등 영화의 중심이 되는 강렬한 이미지들이 있다. 초기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둔 주요 장면들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다. 특히 처음부터 반드시 가져가고자 한 건 아무도 없는 밤의 대도시에서 두 청소년이 거대한 서브우퍼를 옮기는 이미지였다. 차가 수직으로 서 있는 장면 역시 그러한데 처음부터 자동차의 색까지 정해두진 않았다. 내겐 이미지뿐 아니라 소리도 무척 중요하다. 소리는 내 상상력을 돋운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내겐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동시에 전세계를 덮는 듯한 소리와 음악이 있고, 이걸 잘 표현해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미국에서 살다 일본으로 이주했을 때 새롭게 느낀 게 있었다. 진도가 제대로 잡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파에 깊이 기대앉거나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을 때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내 심장의 움직임인지, 세계를 울리는 작은 진동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 일본에 오래 거주한 이들은 이미 익숙해져 감지하지 못할 텐데 나는 그렇지 않다보니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머릿속 한편에 항상 지진에 관한 생각이 자리했다.

- 영화에서 재난을 그린 방식이 인상적이다. 지진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지시키면서도 피해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진 않았다. 지진의 미세한 진동과 소리에 반응한 감독 개인의 경험과는 반대로 유타와 코우가 지진을 피해 숨는 장면을 무음으로 처리했다.

지진 시퀀스의 소리를 채집하긴 했지만 그 상황이 일종의 단절된 순간임을 드러내고 싶어서 무음으로 처리했다. <슈가 글라스 보틀>에는 지진 알람과 진동 소리를 넣었는데 영화를 관람한 일본 관객이 굉장히 무서웠다고 하더라. 지진을 겪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 소리에 관해 더 이야기해보자. 테크노 음악을 자주 활용한 건 본인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인가.

그렇다. 정말 좋아한다. (웃음) 나의 유년 시절과 음악, 테크노는 불가분의 관계로 뭉쳐져 있다. 특히 나의 정치적 사상이 구체적으로 형성될 시점에 테크노를 많이 들었다. 다양한 디제잉 사운드를 듣고 싶어 장비가 좋은 클럽에 자주 들렀고 그곳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다니던 대학의 기숙사도 디제잉 공연이 자주 펼쳐지던 곳이었다. 그때마다 서브우퍼를 창고에서 꺼내 옮기는 일을 했는데 서브우퍼가 상당히 무거워서 꼭 두 사람이 옮겨야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두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것이 영화의 주요 이미지가 된 것이다. 클럽과 대학 기숙사에서 공연이 진행될 때마다 물건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울림이 몸에 전해졌다. 이는 지진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게 근원적인 안도감을 안긴다. 비유하면 마치 어머니의 태내에 있는 듯한 안도감이다.

- 주인공들이 반드시 고등학생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나. 듣다 보면 대학생으로 설정하는 것도 가능해 보이고 권력에 대한 저항, 우정과 같은 주제는 어른 캐릭터를 통해서도 풀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대학생은 무척 자유롭지 않나. 싫으면 떠나면 그만인데 고등학생은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시스템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또 어른이 된 후엔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마련인데 고등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자라면서 서로 생각이 달라지더라도 유년 시절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으로 인해 여전히 친구로 지내게 된다. 고등학생은 어린 나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부조리를 감지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자신만의 언어를 아직 정립하지 못했을 뿐이다.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같은 이를 만났을 때, 자신의 분노와 기쁨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누군가가 불을 켜고 나를 찾아준 느낌이랄까. 과거에 이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정립하고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고 생각을 나눌 동료를 만드는 과정을 코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 유타의 진심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부조리함에 반발하는 코우와 달리 유타는 ‘세상은 이미 망했으니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저항감이 부재하거나 태평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불안해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말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유타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어머니도 집을 자주 비운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지진에 굉장히 민감하고 지진을 항상 무서워한다.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매번 친구를 찾고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음악을 듣는다. 유타는 코우와 다른 의미로 정치적이다. 코우처럼 목소리를 높여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빠져나간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 기반한 행동이고 이를 급진적인 정치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타는 어떤 의미에선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캐릭터다.

- 연기 경험이 없는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가 어떤 면에서 유타, 코우 역에 잘 어울릴 거라 판단했나. 게다가 한 GV에서 밝히기로 이들과의 오디션을 이자카야에서 치렀다던데.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이자카야가 영업을 하지 않아 빈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웃음) 영화를 봤다면 느꼈을 테지만 (옆자리의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를 가리키며) 이들을 보자마자 유타와 코우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먼저 일정을 마친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는 감독의 옆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경청하고 있었다.-편집자.)

-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지닌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이들 각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줬다.

5명의 주인공에겐 스포트라이트를 줬지만 그 밖의 다른 친구들은 그들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화면에 비치도록 연출하고 싶었다. 개별 인물마다 서사를 부여해 차별과 정체성에 관해 논하기보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말이다.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은 것이다. 인종 등의 카테고리로 사람을 구분하면 해당 카테고리 안의 이들을 동일시하기 쉽다. 막상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절대 동일시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그런 점도 짚어내고 싶었다.

<해피엔드>

- 클로즈업을 적게 쓴 반면 풀숏은 자주 활용했는데.

너무 자주 사용하면 그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클로즈업을 정말 중요할 때만 소중하게 사용하려고 했다. 풀숏을 자주 활용한 건 그들이 이런 환경 속에 있다는 걸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구조물의 중량을 느끼게 함으로써 지진으로 인해 이것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하고 싶었다.

- ‘웃으면서 우는 것 같은 장면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영화의 어떤 장면을 가리키는 것인가.

엔딩, 특히 잠시 멈췄다가 다시 진행되는 그 장면이다.

- 그 밖에 좋아하는 장면을 더 꼽는다면.

지진이 발생한 일련의 시퀀스다. 설득력 있게 구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생각했던 대로 잘 표현됐다. 또 대부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장면인데 음악 기기를 빼앗긴 5명의 주인공이 교무실에 우르르 몰려간 신을 좋아한다. 모든 리듬을 상세히 계산해서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가령 지나가던 선생님이 앞으로 나왔다 되돌아가는 타이밍 같은 것들 말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에서도 사람이 들고 날 때의 리듬감이 있지 않나. 해당 신에서 좋은 리듬감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고민했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럽게 나왔다.

- 영화 전반에서 리듬감을 고려한 것이 느껴진다. 특히 엔딩과 오프닝 신 모두에서 잠시 멈추는 구간이 있다.

영화의 리듬을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 리듬감이 나쁜 영화는 잘 못 보겠다.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할 때 교수님이 말씀해준 게 있는데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선 첫째로 하루에 영화를 세편씩 보고 둘째로 과학을 공부해야 하며 셋째로 드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드럼 대신 베이스를 쳤다. 베이스 역시 리듬 섹션의 악기니까. (웃음) 엔딩 신의 잠시 멈추는 구간은 편집감독의 장난에서 시작됐다. 그는 내 대학 시절 친구인데 함께 테크노를 듣고 만들던 사이여서인지 리듬감이 좋고 나와 잘 통한다. <해피엔드>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그가 휴식 시간에 잠시 멈춘 엔딩 신을 농담처럼 보여줬는데 너무 좋았다. 엔딩을 어떻게 할지 고심하던 차에 편집감독이 보여준 걸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다. 엔딩을 그렇게 마무리 지었으니 오프닝 신도 그에 맞춰 편집했다.

- 제목을 <해피엔드>로 정한 이유는. 제목과 연관 지어 묻자면 엔딩 이후 유타와 코우는 재회했을까.

영화의 원래 제목은 ‘지진’이었다. 하지만 지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이들이 있고 내 영화가 지진 현상과 트라우마를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바꿨다. <해피엔드>라는 제목은 직관적으로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다) 유타와 코우가 재회했는지에 관해선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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