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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립영화의 기반은? - 제작 위원회와 미니시어터, 해외 합작의 모델들
글·사진 이우빈 2025-05-09

올해 칸영화제의 주요 부문에 한국영화가 진출하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영화 6편은 경쟁부문과 감독주간 등 주요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국내 언론은 앞다투어 한일 영화계를 비교하며 ‘한국영화 12년 만의 굴욕’, ‘韓 영화계 위기’, ‘도전과 혁신 사라진 한국 영화계’ 등등의 헤드라인을 쏟아냈다. 다수 언론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영화의 침체, 신진 창작자에 대한 투자와 지원의 미비, 그리고 역시 ‘포스트 봉준호, 박찬욱’의 부재를 거론하는 중이다. 씨네큐브 개관 25주년을 맞아 내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향해서도 한일 영화계의 대조에 관한 질문이 이어질 정도였다. 한국영화가 해외영화제 실적에서 부진을 맞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일 양국의 영화산업·체제의 차이에 대한 논의 없이 무조건 적인 비교를 하는 일 역시 마땅친 않아 보인다. 비판을 위해선 일본영화계에 대한 더 세부적인 탐색이 필요하다. 칸영화제에 얽힌 한일 영화계의 차이와 근황을 최대한 실질적으로 맥짚기 위해서 일본 현지에서 활동 중인 영화계 관계자들과 감독들을 주로 취재했다.

<사무라이 타임 슬리퍼>

우선 일본은 상업영화와 자주영화(한국의 독립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일군의 영화를 뜻함)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는 일련의 시네콘(시네마 콤플렉스의 줄임말로, 한국의 멀티플렉스와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 극장) 영화가 한결같이 상업영화 진영을 단단하게 봉쇄하고 있다. 일본의 대형 영화사(도호, 도에이, 쇼치쿠, 가도카와 등)가 TV방송국, 출판사, 음반사, 문구사 등과 제작 위원회를 꾸려 만든 대규모 상업영화가 주로 내수시장을 위해 제작되고 소비된다. 4월30일 기준 17주차 일본 박스오피스 순위(출처 ‘렌트랙’)에서 일본영화는 대부분 만화 실사영화나 해외엔 잘 수출되지 않는 작품들이다. 1위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이 차지했고, 4위는 도에이가 제작한 멜로영화 <페탈스 앤드 메모리스>, 5위 역시 애니메이션 <파티피플 공명>의 극장판이다.

자주영화의 제작 환경은 한국 독립영화에 비해 열악한 편이다. <모든 밤을 기억하다>의 기요하라 유이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를 토대로 한 한국의 독립영화 지원 정책을 일본의 젊은 감독들은 모두 부러워하는 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일을 오가며 영화를 만드는 전진융 감독에 따르면 “일본도 가끔 각지의 영화제에서 제작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소액 수준에 그치며, 지자체의 지원금을 받는 경우도 거의 없다”라며 “저예산 상업영화는 메이저 제작사가 참여하더라도 개인이 끌어오는 후원과 펀딩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라고 전했다. 한일 영화계를 모두 경험한 감독 A씨에 따르면 “한국만큼 영화과나 관련 아카데미가 많지 않아 한해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자주영화, 단편영화는 한국의 4분의 1 수준으로 체감”된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미니시어터 ‘시네마 베라’의 전경. 종이 팸플릿, 가이드북 등이 다수

다만 배급·상영 환경은 한국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는 편이다. 근간은 미니시어터다. 팬데믹 이후 그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도쿄에만 30여개에 가까운 민관 미니시어터가 운영 중이다. “개인 단위나 작은 배급사여도 미니시어터와 상영 계약을 하기가 쉽고, 대개 극장과 제작자가 5:5로 가져가는 구조이나 극장 지배인의 호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일본 영화계 관계자 B씨) 미니시어터마다 계약 방식이 다르지만 홍보·마케팅 비용을 극장에서 부담한 후 제작자에게 수익을 환원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미니시어터라는 공간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오는 관객이 모르는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정대희 감독)가 많고 “팸플릿, 메이킹북 등 굿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집 문화도 활발”(전진융)하기에 미니시어터 개봉을 통해 작은 영화가 상영되고 인기를 얻는 사례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지난해 8월 미니시어터 시네마 로사의 1개 관에서 개봉한 <사무라이 타임 슬리퍼>는 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중견 배급사 GAGA가 배급에 참여했고, 11월 말에는 전국 340여관에서 상영하게 됐다.

올해 3월 기준, 2600만엔의 제작비로 10억엔가량의 수익을 거두고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까지 받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한국과 달리 일본 자주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의 관객수와 매출액은 외부에 잘 공개되지 않는다. 대신 자주영화에 대한 평가는 “‘필마크스’와 같은 영화 기록 앱이나 SNS의 입소문에 따라 판가름되는 정도”(정대희)로, 영화 자체에 대한 예술적 성취에 더욱더 직관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에 일본영화계 관계자 B씨는 “자주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에 뛰어들기가 어렵고 그 표본과 재정적 성공에 대한 관심이 적은 만큼 한국보다 일본이 젊은 신인감독들의 재능을 인정받기 쉬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미니시어터 ‘시네마 베라’와 ‘유로스페이스’가 있는 도쿄 시부야의 건물 외관.

올해 칸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일본영화의 면면은 다양하다. 칸영화제에 진출한 6편의 일본영화 중 제작 위원회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상업영화는 감독주간에 초청된 이상일 감독의 <국보>가 있다. <골든 카무이> <킹덤> 등 만화 원작의 실사화 작품을 주로 만들어온 대규모 제작사 크레데우스가 주요 제작을 맡았다.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8번 출구>도 도에이가 주요 제작·배급을 맡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사례처럼 “유럽의 자본과 시장이 한국의 저예산 상업영화 정도 되는 일본영화에 꾸준히 관심”(전진융)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경쟁부문에 오른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르누아르>,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후카다 고지 감독의 신작 <연애 재판>과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먼 산줄기의 빛>은 각각 프랑스(아르테 프랑스 시네마, 쉬르비방스)와 영국(넘버 9필름스) 제작사가 투자하고 합작한 작품이다. 가장 눈에 띄는 예외적 사례는 첫 장편 <전망하는 세대>(見はらし世代)로 감독주간에 초청된 단즈카 유이가 감독이다. 1998년생으로 알려진 단즈카 유이가 감독은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감독 등이 만들어 미야케 쇼 감독 등을 배출한 도쿄영화미학교 출신이다. 요컨대 이번 칸영화제에서 일본영화가 거둔 성취는 대규모 상업영화, 외국 자본을 투입한 저예산 상업영화, 학생 수준에서 만든 자주영화가 고루 포진돼 있다는 다양성에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영화계 전반에 걸친 특성 중 하나는 특정 감독에게 상업성과 대중성, 게다가 해외영화제 실적이라는 예술적 성취까지 한번에 요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일본영화계 관계자 C씨의 말마따나 “하마구치 류스케가 해외영화제를 석권했다 해도 막상 일본에선 한국의 봉준호처럼 인기를 얻는 스타 감독이 되진 못한다”라는 것이다. 즉 일본의 자주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는 제작의 재정적 어려움, 그리고 내수시장을 꽉 붙잡고 있는 제작 위원회 기반의 상업영화 체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해외영화제나 해외자본을 노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제작 환경의 어려움과 자본의 논리에서 여러모로 탈출하려는 일본영화계의 분투가 지금의 결과를 도출한 셈이다.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 이를 두고 단순히 성공으로 포장하는 건 곤란하다. 일련의 성과들이 축적되어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비판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2020년 이후 일본영화의 질적인 성취와 양적인 풍성함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잔잔한 파도들이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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