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액션신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소설을 읽다보면 인물들의 움직임이 머리에서 그려질 정도로 액션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에서도 투우와 조각 등 방역업자들이 등장하는 액션신을 공들여 연출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액션 장면을 집필하고 연출할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여겼나. 참고한 자료도 있는지.
구병모 소설의 경우 액션이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나. 날고 구르고 뛰어다니는 장면을 실제로 수행해볼 순 없으니 대부분 상상력에 기반해 썼다. 조각이 사용한 무기와 관련된 자료나 신체의 특정 부분을 가격했을 때 어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에 관해 범죄 사전을 참고했다. <파과>를 쓰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자료를 충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군대, 군사 관련 사전들은 절판일 때가 많아 웃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일본에서 따로 구해오기도 했다.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본 액션신 중 하나는 조각이 병원에서 링거 병을 깬 뒤 강 선생에게 그 조각을 들이미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이 신을 심혈을 기울여 썼다. 총과 칼을 사용하는 장면은 판타지의 영역이지만, 병은 눈앞에 있기만 하다면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액션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동선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다. (동선은 어떤 식으로 그려보나.) 주로 누워서 상상한다. (웃음) 더구나 해당 신에선 조각이 누워 있던 터라 어떤 자세로 일어나야 링거 병을 깨고 튀어나가는 게 가능할지, 그러려면 조각과 강 선생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할지에 관한 것들을 관한 것들을 고려했다. 요즘엔 링거가 더이상 유리병이 아니라 비닐 팩으로 보급되더라. 안타깝지만 그래도 병을 깨는 상황이 필요해서 그렇게 집필했고 영화에도 해당 신이 그대로 반영돼 좋았다. 후반부의 액션신들도 소설보다 화려하고 실감나게 구현돼 만족스러웠다. 감독님은 배우들과 실제로 촬영하기 위해 여러 레퍼런스를 필요로 하셨을 것 같은데.
민규동 병원에서 강 선생과 조각이 마주하는 장면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연출하고 싶었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요즘엔 병 링거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영화에는 리얼리티 체크라는 복잡한 과정이 있다. 그래서 어디까지 영화적 허용을 할 것인가에 관한 확인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정리된 부분은 병원에 병 링거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사람에게 놓는 주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체크를 해나갔고 또 치료를 받은 조각의 신체가 잠시 드러났을 때 오랜 시간 전투를 겪어왔다는 흔적이 엿보일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로케이션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거의 전국에 있는 모든 동물병원에서 촬영을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보니 장소 섭외가 녹록지 않았다. 소설에서 후반부의 액션신을 읽을 때 느낀 건 묘사의 밀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구병모 어떻게 다르다고 느꼈나.
민규동 묘사가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후반부의 액션신만큼은 내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 정말 잘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구병모 이야기를 쓸 적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문장이다. 영화에 비유해 이야기하자면 미장센이나 카메라워킹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어떻게 영상으로 재현하겠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다. <파과>의 영화화가 결정됐을 때 문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아예 버리고 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더욱 영화화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감독님이 문장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챙기려고 노력하신 흔적이 곳곳에 보여서 감사했다.
민규동 원작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조각과 투우의 이름은 꼭 지키고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다만 이름이 가진 느낌을 더 영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고민했고 ‘손톱’과 ‘조각’(爪角)이 지니는 의미와 분위기를 더 구분해보려고 했다. 또한 투우에 관해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상대의 주변을 맴돌다가 그가 미칠 지경에 이르러서야 고통스럽게 보내준다는 설정을 영화 속 투우의 정체성과 맞닿을 수 있도록 설정했다. 해우의 이름을 ‘초엽’으로 바꾼 건 투우와 이름이 유사해서다. 소설에선 등장하지 않았던 손 실장의 이름도 지었고 특별 출연으로 ‘구병모’도 넣었는데 보셨는지 모르겠다.
구병모 봤다! (웃음)
민규동 어쨌든 작가님을 영화 속에 등장시키고 싶었고, 원작을 보신 관객들도 재밌게 보실 수 있게 장치를 하나 숨겨두었다.
상실을 살아간다
-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작가님이 해우를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꼽았더라. 초엽으로 이름을 바꿔 구현된 해당 캐릭터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민규동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엽은 런던 오타쿠다. 내가 설정한 디테일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도 런던아이가 있고 그 밖에 키보드 같은 소품,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스타일링에도 전부 런던의 요소가 느껴질 수 있도록 세팅했다. 그리고 초엽은 조각을 대할 때 거리낌이 없다. 조각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심지어 투우는 목숨 걸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초엽은 악의 없이 툭툭 말을 건넨다. 그만큼 조각을 편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애정을 갖고 존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손 실장만큼이나 초엽 역시 영화에서 중요한 키를 쥔 존재다.
- <파과>의 인물들은 소중한 이를 잃고 힘들어하면서도 떠난 상대와의 기억을 삶을 지속할 동력으로 삼고 살아가기도 한다. <파과> 에 등장하는 상실과 상실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나.
구병모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라는 문구가 있다. 조각이 비로소 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채 상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산다는 건 상실을 품고 사는 것일 수도, 상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소설에선 조각이 ‘나는 이제 현재와 현실을 살 것이다’라며 류와 방역업자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저벅저벅 걸어나가는 느낌으로 묘사했다.
민규동 류는 지켜야 할 상대를 만들면 안된다며 조각이 자기 원칙 안에서 진정성을 지키는 게 최고의 선이라 여기는 실존주의적 영웅으로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영향이 강력했던 만큼 조각은 항상 류가 했을 법한 말을 중얼거리며 그를 곁에 둔다. 이러한 조각의 모습과 더불어 작가님이 말씀해주신 상실을 대하는 조각의 태도를 영화에도 반영하고자 했다.
- 마지막으로 <파과>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구병모 코로나19 팬데믹 등 영화가 어려운 과정 속에서 흘러왔다. 원작자로서 영화를 무척 재밌게 관람했기 때문에, 내가 <파과>를 예뻐하는 만큼 관객들도 작품을 예쁘게 봐주시길 바란다.
민규동 <파과>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란 가능성은 전부 찾아봤다. 영화를 쉽게 만든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버전을 만들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파과>가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축하해야 할 기적과 같다. 소설이 그랬던 만큼 영화에도 중층적으로 쌓여 있는 모티브와 퍼즐이 있다. 차량 번호판 하나에도 암호가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런 요소를 찾아보는 깨알 같은 재미가 관객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