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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흠집조차 귀여워 보이는 사랑의 접촉사고, <바이러스>
남선우 2025-05-07

비 내리는 오후, 택선(배두나)은 카페에 앉아 수필(손석구)과의 첫 만남을 기다린다.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오기는 했지만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음이 다 녹도록 나타나지 않는 남자를 굳이 만나야 하나 싶던 찰나 크로스백을 멘 수필이 등장한다. 지각한 것도 모자라 연신 땀을 훔치는 수필은 택선에게 기다린 보람을 주지 못한다. 수필도 택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서로 연애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직감한 남녀는 깔끔하게 안녕을 고하나 그날 저녁 다시 재회한다. 수필이 꽃다발을 안고 택선의 집으로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이튿날 택선도 이상행동을 보인다. 자동차 딜러인 동창 연우(장기하)의 영업 메시지에 설레 그에게 바닷가 드라이브를 청한 것이다. 달콤한 시간도 잠시, 택선은 수필과 자신이 차례로 벌인 기행이 ‘톡소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증상이었음을 전해 듣는다.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끼게 하는 데다 치사율이 100%라는 이 바이러스를 퇴치하려면 이균 박사(김윤석)를 찾아야만 한다는 전언도 따라붙는다. 우여곡절 끝에 접선한 택선과 균은 치료를 위해 동행하며 갖은 소동에 휘말린다.

<바이러스>는 이지민 작가의 소설 <청춘극한기>를 강이관 감독이 각색하고 연출한 영화다. <사과>(2005), <범죄소년>(2012)과 같이 차분한 호흡으로 관계의 심도를 파고든 감독의 전작에 비춰봤을 때 <바이러스>는 기분 좋은 의외성을 선사한다. 영화가 ‘사랑의 묘약’ 모티프를 전염성 질환으로 변주하면서 엉뚱하고도 귀여운 상상력을 구석구석에 침투시킨 덕이다. 수필, 택선 외에도 톡소 바이러스 피해를 입은 경로당 노인들이 지칠 줄 모르고 춤을 춘다거나 바이러스 박멸과 함께 들떴던 기억도 희미해질 수 있다는 설정 등이 그 예다. 배우들은 이처럼 붕 뜰 수 있는 소재에도 노련하게 현실감을 더했다. 연애에 무감하던 여자가 하룻밤 만에 애정으로 충만해지는 변화를, 배우 배두나는 발간 두볼을 잇는 입꼬리로 설득해낸다. 진지한 남자가 천진한 여자에게 스며드는 로맨틱코미디의 클리셰는 배우 김윤석의 음성에 힘입어 서사를 얻는다. 극 초반 긴장감을 불어넣는 손석구, 장기하의 존재감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만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 사건과 감정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다소 맥없이 결말에 도달하는 인상이다. 인물간의 교감을 이끈 매개를 그들 손으로 끊어내야 한다는 갈등을 착실히 다루는 대신 ‘사랑은 곧 바이러스’라는 비유를 또렷이 전달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선택과 집중에 흔쾌히 끄덕일 수만 있다면 <바이러스>가 취한 태도마저 동화적 장치로 환영할 만하다. 사랑할 여유가 부족한 시대, 사고로라도 사랑을 감당하고픈 이들을 미소 짓게 할 영화로는 충분하다.

close-up

조상경 의상감독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는 마젠타 빛깔의 보호복은 바이러스의 출몰을 재난이 아닌 (사랑에 빠지라는) 제안으로 읽고 싶게 만든다. 현실적인 컬러는 공포감을 줄 수 있고, 판타지에 가까운 컬러는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 끝에 낙점되었다는 이 짙은 분홍색은 택선의 달뜬 뺨, 씰룩이는 입술 색과 묘한 그러데이션을 이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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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감독 강이관, 2005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꽃다발을 안겨주는 남자, 강이관 감독의 첫 장편 <사과>에도 있었다. <바이러스>에서는 해프닝처럼 끝나지만 <사과>에서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이 행동은 복수의 남성과 애정 전선으로 얽히는 각 작품의 주인공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여자인지를 상기시킨다. 그들이 각자의 여정을 일단락하면서 사랑에 필요한 ‘노력’을 되새긴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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