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그랜드 투어>(감독 미겔 고메스)와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감독 파얄 카파디아)은 공교롭게도 동시대 아시아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적 화면과 멜로를 탐색하는 픽션의 지대를 아우른다. 두 작품을 연이어 보는 동안, 영화가 현실을 풍경화하는 문제에 생각이 닿았고, 그 생각이 촉발한 질문들이 <그랜드 투어>의 모험적인 시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랜드 투어>의 활력에 감응하면서도 어쩐지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의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가 된 것 같다.
풍경 바깥에서 본 ‘풍경’
<그랜드 투어>가 미얀마,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일본, 중국 등지에서 찍은 장면들과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도 뭄바이 거리 장면의 성질은 달라 보인다. 전자가 풍경 바깥에 자리한 시선으로 포착한 이미지라면, 후자는 적어도 여행자의 눈과는 다른 감각으로 바라본 산물이다. 전자가 외부인의 시선으로 풍경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무엇을 찍을지의 문제와 먼저 마주한다면, 후자는 내부인의 시선으로 일상을 다시 응시한다는 맥락에서 어떻게 찍을지의 문제에 좀더 시급하게 당면한다. 물론 이러한 규정은 도식적이고 식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찮게 지나칠 사실은 아니다. 더욱이 이 구분은 <그랜드 투어>의 형식을 되묻는 유효한 길목이 된다.
미겔 고메스는 인터뷰를 통해, “여행 중 찍은 이미지들로 아카이브를 구축한 뒤 거기에 픽션으로 반응”(<필로> 41호)하는 과정에 대해 “영화의 배경은 1918년이지만 개별 장소들이 현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확인하고 그 이미지를 포착해 영화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씨네21> 1498호)고 밝힌다. 21세기 동아시아의 풍경에서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삼은 허구의 이야기가 지나간 흔적을 느껴보고자 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의 파편들에 흐름을 불어넣는 인위적 힘이 영화의 독창적인 가능성으로 <그랜드 투어>를 지탱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다소 일차원적인 궁금증이 새삼 앞선다. 여행지의 수많은 풍경 중 어떤 면모가 고메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일까.
그의 말에서 추론해보자면, 그것은 미지의 지대가 사라진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난생처음 보는 무언가”의 느낌, 시청각적 “순수함”을 되찾게 하는 대상의 운동성이다. <그랜드 투어>가 다큐멘터리적 풍경에 허구의 세계를 결부한 방식은 이미지를 그것이 놓인 통념적 맥락에서 분리해 새로운 영토와 연결함으로써 대상 자체의 고유함을 발견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고메스는 이를 “사회적으로 확립된 어떤 것들을 비교적 원상태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만의 “전복적인 힘”이라고 강조한다(<필로> 41호). 그러한 믿음을 탐구하지 않는 영화를 우리는 신뢰하지 않는다. 고메스의 바람을 더없이 활기차게 실현한 영화 속 장면들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둘러싼 사정이 그리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감각에 “순수함”을 되돌려줄 “원상태”의 활동. <그랜드 투어>가 이국의 풍경에서 발견하고, 영화로 소망하는 궁극의 지평은 아마도 직감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작동할 것이다. ‘직감적인 경험’이라는 감상 태도 혹은 수용 방식은 그 모호함 때문에 종종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차원에서 경탄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운동이란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를테면 영화사 초창기,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항구를 떠나는 배>(1895)라면 그 감흥의 당당한 사례로 불릴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감동은 그냥, 느껴지는 것이다. 파도가 친다. 그 파도와 함께 배가 항구를 출발한다. 배에 탄 남자들의 몸도 출렁인다. 배가 멀어진다. 여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이 짧은 숏 하나가 ‘영화’로 불려 마땅한 이유는 카메라의 위치가 자연에서 발견해낸 피사체의 구도와 움직임의 방향성으로 더없이 평범하고 단순한 사실들만을 조응시켜 의미작용 없이 시각적 활동성의 경이, 완전한 표면의 활력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투어>의 도입부를 강렬하게 장식하는 미얀마의 관람차 장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좀 다른 결이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장면이 발산하는 쾌감이 “순수함”과 “원상태”의 활동에 기인한다고 여긴다면, 이 느낌은 그 운동성에 대립하는 혹은 비교되는 항이 존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미얀마의 관람차 장면에서 고메스와 우리를 홀린 희귀한 생동감의 정체가 기구의 활기찬 원형 움직임과 이를 온몸으로 수행하는 인간 육체의 직접성이라면, 이 감상의 무의식의 저변에는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서구식 대관람차, 먼 곳을 조망하며 모터로 우아하게, 천천히 돌아가는 기계의 위용과 분위기가 전제될 것이다. 대상을, 이미지를, 풍경을 ‘순수하게’ 즐긴다는 것의 함의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여행자의 시선이 포착한 이국의 풍경에 관해서라면, 이미지가 그것이 놓이고 환기하는 맥락들을 포함하지 않은 투명한 상태로 수용되고 소비될 수 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랜드 투어>는 이미지를 향한 순수한 시각을 복원한 영화이기보다는, 이미지의 순수한 향유라는 ‘환상’을 현시한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인상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할 확률이 높지만 이 영화는 편견 없는 여행자의 맨눈과 때를 벗은 대상 이미지의 만남이라는 환상 앞에서 우리를 종종 멈춰 서게 한다.
물론 고메스의 말대로 이미지를 상투로 고착화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변모하게 하려면, 그것을 기존의 토대에서 해방시키는 상상력이야말로 영화의 중대한 역량이라고 할 만하다. <그랜드 투어>에서 그 믿음을 구현한 장면들은 고메스의 희망처럼 쾌활하게 변화해간다.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한 일례로, 태국의 무도회에서 베트남의 오토바이 행렬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왈츠를 추며 무대를 뱅글뱅글 도는 허구 속 인물들의 모습은 작은 배 한척이 물 위를 떠가는 현실의 풍광으로 연결되고 이 장면에 등장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경로를 알려준 뒤, 베트남 도심에서 로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들의 압도적인 광경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의 거리, 세계의 불균질한 속성과 시간의 간극은 왈츠의 선율로 부드럽게 통과되고 감싸이고 엮인다.
베트남 거리에 쏟아져 나온 오토바이들의 움직임은 현실 안에서는 노동과 결부된 급박한 생활의 감각이지만, 화면에 느린 속도로 확장된 그 운동성은 앞선 허구의 춤 장면에 화답하는 매끄러운 동선처럼 시각화된다. 그러니까 <그랜드 투어>의 화법은 장면들을 가르는 물적 토대나 조건의 차이 대신, 각 세계에 잠재된 음악성과 리듬의 친연성을 적극적으로 깨우고 구축해서 잇는 식으로 화면내 움직임들을 유희의 운동으로 수평화하며 서로에게 반응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에 근거한 이미지의 연쇄는 감각의 전복을 유도하지만, 서로 다른 지대의 풍경들이 수평적으로 접속하는 황홀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 망각하거나 탈각된 것들 또한 생각하게 한다. 오토바이들로 가득 찬 거리의 소음, 매캐한 공기, 일터를 오가는 소란, 말하자면 그 풍경을 살아가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는 일상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은 우아하게 증발한다.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유연한 이동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 풍경이 생성하는 미감을 해치는 요소들, 쾌적하지 않은 물질들의 아우성을 정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리얼리티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관습이나 현실 구조에서 구해내 낯설게 활동하게 하는 시도(의 욕망)와 한 장소의 풍경(의 역사와 일상)을 납작하게 다림질하는 일의 동시성을 상기해보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위치에서, 눈은 비로소 울퉁불퉁한 현실을 이미지로 단면화할 수 있다. 이국의 풍경을 담은 트래블링숏이 기이한 평온함을 생성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면, 그건 카메라와 풍경 사이의 완고한 거리가 선사한 여유에 기인한다. 집을 나선 여행자의 눈, 그러나 이국의 풍경에 속하지 않은 채 거니는 눈은 시각적인 자유를 누린다.
물론 풍경 안팎 어느 한쪽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눈의 운동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뭄바이 도심의 실제 새벽 장면으로 문을 연다. 카메라가 거리에 쭉 늘어선 시장과 사람들의 풍경을 응시하며 수평으로 이동하고 출근길 차들로 빽빽한 도로에 이르러 그 복잡한 행렬에 동행하는 동안, 익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뭄바이에 산 지 오래됐으나 이곳이 아직도 집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언젠가는 다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건조한 음성. 아마도 저 새벽의 풍경을 이루는 군중,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하층계급 노동자 무리 중 하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여행자는 아니지만, 풍경 안에 정주하지도, 바깥에서 산책하지도 못하는 외롭고 빈곤한 이방인이다. 도입부의 카메라 움직임이 어쩐지 눈길 둘 데 없이 떠밀리는 시선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 ‘집을 찾아 집을 떠났으나 집을 갖지 못한다는 자각’ 속에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고스란히 흡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첫 장면에 불러들인 뭄바이의 현실 풍경은 이미지의 활동성을 실험해보는 장이 아니라, 픽션에서조차 사랑을 나눌 안온한 보금자리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연인들이 거듭 내몰릴 길, 사방이 뚫린 위태로운 거처를 환기한다. 다큐멘터리적 풍경이 픽션의 막을 뚫어 영화 안으로 자꾸만 흘러들고 인물들은 둘 사이에서 헤맨다.
수평적 연결의 환영
<그랜드 투어>의 픽션도 일견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흔들림이나 균열 없는 구조 위에 서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풍경과 20세기 초를 기반으로 한 픽션은 주인공들의 행적을 최소한으로 단정하게 설명해주는 음성적 화자에 의해 연결된다. 그런 설정이 두 시공간을 통과하는 관객의 자발성을 의도한 설계라고 해도,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랜드 투어>가 자신의 명백한 토대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애매하게 괄호 친 문제, 즉 식민주의라는 민감한 화두와 관련된다. 이 영화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그대로 취한다거나 서구가 아시아를 허구화하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비판적으로 겨냥한다는 주장 모두 미진하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그 둘을 별다른 부담 없이 가볍게 오간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태도와 행보는 <그랜드 투어>의 방법론이나 전략이기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결합에서 영화의 지평을 개척해보려는 고메스의 시도, 그 작업의 경쾌한 자율성을 보존하려는 의지와 야심이 식민주의를 둘러싼 엄격하고 다층적인 문제 의식을 누른 결과로 보인다.
<그랜드 투어>가 불러일으키는 궁금증은 재현방식 이전에 영화의 뼈대를 향한 것이다. 사실 그 물음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1918년 식민지 미얀마에 부임한 영국인 남성과 그를 쫓는 여성의 이야기는 피식민지의 역사적 상흔이 여전히 잠재된 21세기 동아시아의 풍경 무엇에서 태생된 허구일까. 이 영화에서 허구의 행로를 여는 남녀의 이야기는 여느 여행객의 멜로가 아니라, 제국의 시대, 상류층 백인들이 자국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벌이는 나른한 사랑의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성찰과 반성을 시늉하는 섣부른 제스처보다 이국에 사로잡힌 여행자의 호기심, 탐색, 애정전선에 천진하게 몰두하는 면모가 이 영화의 저돌적인 활력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동시대 아시아의 풍경을 거듭 소환해 접촉을 시도할 때마다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랜드 투어>에서 식민지의 얼굴과 피식민지의 얼굴, 20세기 제국의 얼굴과 21세기 아시아의 얼굴, 허구의 얼굴과 역사의 얼굴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표층들로 공존하고 친밀하게 어울린다. 영화는 이 표면들을 충돌에 무감한 얼굴들로 다룬다. 고메스가 원하는 건 앞서도 언급했듯, 그 표면들의 수평적인 연결이다. 그가 영화의 급진적 역량으로 여길 ‘수평적인 연결의 감각’은 그러나, 그 얼굴들을 이루는 뾰족한 정치성의 층위를 평화롭게 조율하고 조정한 이미지의 단면들로 성취한 것이기도 하다. 그 연결의 감각이 내내 단절 없는 꿈결처럼 아련한 향수의 정취로 영화를 맴돈다.
극 중에서 에드워드는 결혼을 피해 도망치는 자로, 몰리는 그를 뒤쫓는 자로 그려지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이국으로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 이들은 각자의 환영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자의 초상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미얀마의 현실 풍경에서 시작한 영화는 아시아의 현재로 돌아오는 대신, 죽은 몰리를 영화 안인지 바깥인지 불분명한 경계에서 조명 빛으로 부활시키며 끝난다. 이 결말에서 되살아난 것의 정체는, 포기되지 않는 연속의 열망은 무엇일까. 고메스가 마지막까지 바라보는 방향은 그들의 ‘그랜드 투어’가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자기 충족적인 세트, 상상 속의 이국인 것일까. 에드워드와 몰리를 끝내 이국의 땅에 머물게 한 허상의 그림자는 고메스가 <그랜드 투어>의 이미지들로 좇은 ‘수평적인 연결의 감각’이라는 환영이기도 할까. 그 허상과 환영은 신비롭고 유려하지만, 기꺼이, 선뜻, 향유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