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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두 시간뿐인 바캉스*
김사월 2025-05-08

“예전에 엉덩이쪽에 금이 가서 고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만 고쳐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또 다른 금이 생기더라고요. 저번에는 상태가 더 심해지게 되면 수술을 하자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때 보이나요?”

“지금 진행 상태로는 아직 괜찮을 것 같은데 한번 살펴봅시다. 두 시간 정도 후에 오세요.”

분주한 평일 오후에 잠깐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생겨버렸습니다. 치료받을 녀석들을 기다리며 어디에나 있을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아 대기할 수 있는 정도로 검소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좋았겠지만, 두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알맞은 귀여운 카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인간이기에 아직 돈도 못 모았고 집도 못 샀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커피를 마셨다면 3일째에는 의식적으로 마시지 않고 버텨서 몸속에 흘러다니는 카페인이 배출될 기회를 주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춥고 비 오는 오늘 같은 날에는 뜨끈한 라테 한 사발이지’ 하고 생각하는 인간이기에 오늘 밤도 잠을 설치게 되겠네요. 아무튼 우연히 주어진 시간을 커피를 마시는 데 쓰기로 결정한 저는 설레는 걸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 A가 생각났습니다. 한때 늘어난 분점들로 서교동 일대를 주름잡던 그 카페는 2010년대 홍대 카페 전쟁(커피 맛은 기본이고 멋에 대한 감각도 있는 독립적인 브랜드들이 점점 몸집을 키워가며 카페 문화의 대중화가 절정에 다하던 시기를 일컫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현상의 이름입니다. 이름도 저 혼자 지어낸 것이지만…) 당시 해당 지역을 탈출해서 다른 동네로의 진출까지 성공했기에 지금까지도 명성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짧지 않은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카페는 너무 요즘 스타일을 따라간 것 같습니다. 의자만큼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고 비지엠(배경음악)은 알앤비 힙합 스타일입니다. 변화의 물결을 잘 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지만 저는 왠지 문을 열었다가 슬며시 닫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으로 둘러본 카페 B는 카페 공부족과 중년 수다족을 모두 사로잡은 넓은 스타일의 매장이었습니다. 이런 곳은 운치는 없지만 눈치(누구에게 어떤 눈치를 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를 보지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카공족들이 모여 있는 큰 테이블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조용히 라테를 마시며 책을 읽는 정도의 기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호소력 짙은 노랫소리가 매장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어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는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진한 고백은 다음에 듣기로 하며 카페를 빠져나옵니다.

이 정도로 예민한 사람을 어느 누가 맞춰줄까요. 차라리 보편적이고 무난한 느낌을 주는 스타벅스를 가는 것이 속 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개인적인 신념으로 누가 기프티콘 같은 걸 보내지 않는 한 굳이 제 돈을 스타벅스에 쓰지는 않습니다…. 이쯤 되자 덤으로 얻은 것 같던 두 시간의 자유가 조금씩 닳는 것 같아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페 A도, B도 큰 문제 없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기 있는 가게입니다. 그런 매장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자신의 까다로움이 새삼 웃깁니다(사실 안 웃깁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 맛있는 라테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피해 비 오는 거리를 아주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걸어서 10분 거리의 동네까지 와버렸습니다.

카페 C는 2010년대 카페 전쟁 당시 제가 가장 즐겨 가던 가게였습니다. 전성기 시절엔 어딜 가나 이 카페의 분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수완 좋음이 대단하기도 하고 좀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 가게를 좋아했습니다. 그건 이 가게가 너무 튀지 않으면서 적당히 세련된 브랜드 디자인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커피 맛과 메뉴의 톤이 디자인과도 잘 어울렸고… 사실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과 자주 왔던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 많던 매장도 이제는 몇 군데 없습니다. 월요일이라 문을 닫았으려나 싶어 가게 안에 불빛이 켜져 있는지 살펴보니 약간 선팅된 듯한 창가 유리 속에 미묘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약간 안심하는 자신을 조소하며 카페 유리문을 엽니다. 꽤나 오래된 카페인데 지금 봐도 좀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꽤나 오래된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 아이랑 먹었던 메뉴는 예전에 사라졌지만 거의 비슷한 메뉴를 시켰습니다. 최고의 라테를 찾아 헤매다 아예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네요.

예술가들의 미팅인 것이 분명한 한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요즘은 너무 진하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멋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슥슥 했는데 멋있는 것이 추세인 것 같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귀가 솔깃하지만, 나만의 시간을 위해 이어플러그를 낍니다. 마침내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읽던 책을 마저 읽을 수 있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얻었습니다. 슬슬 녀석들을 찾으러 가야 하나 생각하던 차에 마침 알림 문자가 도착하며 이렇게 두 시간뿐인 바캉스는 마무리됩니다.

“리페어샵입니다. 맡기신 코르도바 클래식기타 & 길드 통기타 배터리 교체 & 줄교체 다 되셨으니 편하실 때 찾아가시면 되세요~^^*”

*두 시간뿐인 바캉스(二時間だけのバカンス)

우타다 히카루시이나 링고의 듀엣곡 제목, “다정한 일상을 사랑하고 있지만 때때로 스릴이 나를 구원해”라는 가사와 끈적 미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담은 뮤직비디오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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