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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가, 선전인가 - 정치 다큐멘터리의경향과 흥행을 떠올리며
정지혜(객원기자) 2025-05-02

※ 이 글은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고 3주가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작성됐다.

서두에 글 쓴 시기를 간단히 기입해두기.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이후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 됐다. 세상이 대체 어디까지 섬뜩해질 수 있는지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세상이 어디까지 황당무계할 수 있는지 매일 새로이 체감한다. 절박해질 대로 절박해진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시간을 기록하려 분투하고, 분투하려 기록한다. 세계가 중차대한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명한 신호가 기록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물며 기록매체인 영화는 어떻겠는가. 영화 역시 곤경에 처했다.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라는 말이 벼락처럼 내리친다. 문학도, 음악도, 그림도 아닌 ‘영화 같은 일’이란 대체 어떤 일인가. 믿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일,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된다고 여겨온 일이 버젓이 벌어졌을 때 터져 나오는 탄식의 클리셰. 그런 일은 오직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안도했는데 그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됐다.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라는 건, 영화와 영화 밖 세계를 가르는(가른다고 믿고, 합의해온) 얇고 투명한 막이 여지없이 찢겨나갔음을 뜻한다. 영화는 세상과 너무도 가까이 맞붙어 있지만, 영화와 세상 사이에는 엄연히 거리가 있지 않은가. 영화는 세상을 쏙 빼닮았지만, 영화는 절대 세상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영화는 세상의 것과 세상의 것 아닌 것 사이에서 어정쩡하고 애매한 상태의 예술이 아니던가. 영화와 세상이 존재론적으로 서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맺어온 은밀한 관계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기어코 일어난 영화 같은 일이다.

비상 상태, 공백 상태임이 틀림없다. 그 앞에서 존재론적 물음에 부쳐진 영화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현실 정치와 역사 앞에서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부쳐졌다. 기록장치인 카메라의 역능에 충실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는 발 빠르게 현장성을 담보하며 실시간 기록되고 스트리밍되는 속성의 유튜브 플랫폼의 영상과 경쟁할 수밖에 없지만, 경쟁할 수는 없다. 속성에 대항하는 숙성의 영화는 어떻게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시간을 버티고 나올 기록 영상은 필시 무엇에 대한 재발견이 돼야 할 것이고, 다양하고 다면적인 해석의 몽타주를 만들어내야만 할 것이다. 전후 쏟아져나온 수많은 아카이브 영상이 기록 보관소에서 다시 세상에 불려 나올 때, 이를테면 에세이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가능한 에세이영화가 이렇게나 많을 수 있음을 확인한 건 긍정적 결과의 한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에 대한 얼마간의 낙관이지 현실의 조건은 만만하지 않다.

<길위에 김대중>

비상 사태를 예비한 징후의 영화는 비상계엄보다 훨씬 먼저 도착했다. 이른바 정치다큐멘터리의 연이은 제작과 흥행이다. 지난해 한국 독립예술영화 흥행 순위 1위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 2024)으로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117만3927명이 들었다. 관행처럼 이어져온 언론시사회도 없이 후원 중심의 이벤트를 진행해 거둔 성적이다. 최근 국내 독립예술영화 시장 상황에서 보면 매우 이례적인 성과다. 3위는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길위에 김대중>(감독 민환기, 2023, 11만5336명)으로 언론시사와 텀블벅 후원을 진행했다. 4위는 8만10명의 <퍼스트레이디>(감독 아에몽, 2024)로 언론시사가 아닌 VIP시사를 진행했고 모금으로 후반작업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충당했다. 이들 영화는 적극적 후원자의 지원으로 제작부터 개봉까지 진행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호소하는 게 아니라, 영화 주제와 입장의 선명성을 바탕으로 팬덤에 구애하는 방식이다. 편향의 영화가 되는 것을 숨기지 않고 되레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편향을 만들어내는 중심에는 어김없이 유력한 정치인, 정치적이거나 정치화된 인물들이 있다. 정치적, 카리스마적 메신저의 영화가 후원금을 부른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는 다시 돈을 벌어들인다. 진영 논리를 떠나 동일하다. <노무현입니다>(감독 이창재, 2017), <노회찬6411>(감독 민환기, 2021), <그대가 조국> (감독 이승준, 2022), <문재인입니다>(감독 이창재, 2023)도 마찬가지다.

편향의 영화는 재현 대상과 만드는 이 사이의 거리, 재현 대상과 영화의 외측이라 할 수 있는 세상, 영화와 세상 사이를 가르는 막이 희미하거나 막을 적극적으로 지운다. 이승만, 김대중, 노무현, 노회찬의 영화는 부재의 인물, 과거라는 유령을 통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재를 장악하는 시뮬라크르로 작동한다. 장악할 수 없는 과거를 어떻게든 눈앞으로 불러내려는 강력한 욕망은 노스탤지어와 이어진다. <문재인입니다> <그대가 조국>처럼 아직 인물에 대한 평가의 시간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는 입장들 앞에서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는 쪽을 택한다. 영화가 먼저 재현 대상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강렬한 파토스의 영화 되기를 자처한다. 해석의 다른 몽타주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 욕망에 한없이 투명한 영화는 그래서 앙상하고 단조롭다. 이런 영화가 흥미롭고 재밌을 리 없다. 역사적 진실과 진위를 둘러싼 경합, 이견의 상호 검증, 반박과 재반박에 관심이 없는 영화는 내적 밀도와 긴장감이 떨어진다. 정치인 다큐멘터리에 관한 전반적인 기대감도 떨어뜨릴 게 뻔하다. 여기에 더해 이를테면 <건국전쟁>처럼 “4·3은 남로당과 북로당의 작품”, “이승만이 미국에서 3·1운동을 주문했다”는 역사왜곡, 자의적 해석, 논리 비약, 확증편향까지 더해진다면, 정치의 예술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직 영화가 그 자신의 내부로만 수렴되고 그 안에서만 맴돈다면 영화의 외측, 재현 대상이 아닌 타자, 다른 존재의 가능성, 영화 밖 세상은 삭제된다. 영화와 창작자와 세상 사이의 막이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구는 영화야말로 반(反)영화적이다.

<건국전쟁>

정치인을 중심에 둔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의 제작과 흥행은 당분간 이어지고 어쩌면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개봉 당시 이미 5편까지 제작하겠다고 밝힌 <건국전쟁>은 우선 <건국전쟁2-인간 이승만>으로 이승만의 인간적 면모를 조명할 계획이다. <길위에 김대중>의 후속작 <대통령 김대중>(감독 정성훈, 2024)은 지난해 5월 텀블벅 펀딩을 마치고 ‘국민과 함께했던 대통령, 국민이 함께 만드는 영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작비 후원 모금을 진행했다. <그대가 조국>에 이은 <다시 만날, 조국>(감독 정윤철·정상진, 2025)은 5월14일로 개봉일을 확정했다. 연출자들은 이 영화로 제21대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주고 싶다는 목표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3월13일자 방송). 다큐멘터리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주의 주장의 도구로 쓰이길 바란다. 그렇게 영화는 선전에 복무한다.

영화의 정치화, 프로파간다 영화의 출현을 지켜보는 건 곤혹스럽다. 당위의 영화가 블랙홀처럼 모든 걸 끌고 들어가 아름다움을 말하는 일이 주저될 때도 끔찍하다. 논의나 비평의 장에서 특정 영화를 삭제해버리는 일 또한 검열이자 위험이다. 프로파간다 영화 혹은 강력한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영화, 그런 정치적 인물을 통해 현실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는 영화만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지금의 시장은 위협적이다. 제한된 팬에게만 환대받고 소구되고 그 안에서 순환되다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입장의 대항 영화와 맞붙고, 역사적 검증을 거치며, 정치적 토론과 미학적 평가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종합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이 과정이 유기적으로 작동돼야만 상호 견제와 경합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와 세상의 막이 회복되기 위해선 사회적 공론장이 건강하게 자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비상하고 수상한 시국이고 프로파간다 영화를 이곳에 불러낸 현실이라는 막강한 힘이 작동한다. 이 무지막지한 현실의 힘에 기생해 성장하는 영화 역시 반(反)영화적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다큐멘터리 전문 잡지 <DOCKING>에 연재하는 ‘한국다큐 in史 시즌2’의 원고 ‘반(反)영화의 시대: 프로파간다 정치 다큐멘터리의 현재’(2025년 봄호)를 얼마간 축약하고 새로이 덧붙여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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