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연대, 새로운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진입
이러한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 진영의 실천적 답변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느슨한 연 대의 차원이다. SNS와 온라인을 통해 각종 집회, 촬영 정보가 공유되긴 했으나 집회의 규모와 형태가 급속도로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개인 작업에도 제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그들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 지난해 12월 말경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차한비 사무국장과 박소현 감독 등은 현장에 나서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텔레그램 방을 개설했다. 처음엔 6~7명이 함께했지만 “현장에서 마주치는 감독들이 텔레그램 방의 존재를 공유” (허철녕)했다. 알음알음 모인 30명가량의 감독이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며 현장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촘촘하고 조직적이라기보단 다소 느슨하지만 각자의 아카이브를 공유할 수 있는 장”(박소현)이 마련된 것이다.
과거 기성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주축이 됐던 비상행동 미디어팀 역시 차근차근 새로운 형태를 갖춰갔다. 2월경부터 김영욱 팀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는 다양한 성질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민미디어팀을 모집하자 20대 대학생부터, 여러 노조를 통해 활동하던 50~60대 활동가”까지 10여명이 모여 팀을 결성했다. 3월 초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석방되기 이전 정기적으로 열렸던 토요 집회와 다양한 시민 프로그램 현장을 기록했고, 석방 이후 산발적인 집회가 늘어났을 때도 구성원들은 자율적으로 많은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갔다. 1500여 단체가 모여 각종 시민행동과 집회를 주최했던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기조 영상을 만들고 현장의 각종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미디어팀 소속이자 <오류시장> 등을 연출한 최종호 감독은 “카메라의 존재가 많을수록 카메라의 오용 역시 늘어나는 시대이다 보니 시민들 역시 자신이 촬영되는 일에 민감한 경우”가 있었지만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이라는 소속 덕분에 더 친밀하게 집회 참여자들의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라는 소감을 들려줬다.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의 빈자리를 채우며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 신진 다큐멘터리스트들 역시 나타났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보지 않았던 영상방송학과 전공자 박채한 감독은 SNS를 통해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 참가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온라인의 반응을 보면 과거 민주화 운동권 세대와 달리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말이 보이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이 정세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대학생들의 결집을 막고 극우 세력의 여론이 대학생들의 활동을 억제하는지”(박채한) 알릴 필요를 느낀 것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개인적으로 이어오던 최호영 감독은 “2016~17년 촛불 집회 당시엔 모인 사람이 많았으나 그 결과물이나 후속 조치가 아쉬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미디어팀 활동으로 여러 현장을 다니며 세상에 이토록 많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기록에 대한 욕망”을 다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더 많고 다양한 카메라로
최호영 감독의 말처럼 12·3 계엄 이후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고심인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가능성이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진영의 두 번째 실천적 답변은 바로 ‘다양한 카메라의 가능성’이었다. 민중의 수많은 카메라 속 다큐멘터리영화에 대한 효용을 묻자 홍다예 감독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카메라가 현장을 기록하면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카메라는 외려 현장의 증거와 증언을 기록한다는 일종의 책무에서 벗어나 더 새로운 실험과 모험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교육제도란 공적문제에 지극히 사적인 서사를 엮었던 그의 전작 <잠자리 구하기>처럼 “윤석열이 쫓겨난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의제가 해결되지 않는 형국인 만큼 탄핵을 축으로 모인 갖가지 문제에 연출자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엮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 참여했고 12·3 계엄의 현장을 찍기도 했던 박명훈 감독도 군복무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와 성소수자로서의 고민을 엮은 자전적 다큐멘터리 <클린>을 제작하던 중, “사회운동의 현장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큐멘터리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치유의 힘”을 느꼈다는 소회를 전해왔다.
요컨대 광장에 모인 카메라의 수는 더한 가능성이되 한계로 작동하진 않는다. 허철녕 감독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목표로 했던 촛불 집회 이후 8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에 꿈꿨던 부당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등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과제”라며 다큐멘터리영화가 단일한 목적의 수단이 아닌 여러 사안의 지속적인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그래서 이번엔 윤석열 퇴진뿐 아니라 성폭력 사안을 공론화했다가 부당 해임된 교사, 거제·통영·고성에 있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권리 등 더 다양하고 세밀한 사회적 의제들이 발현되고 있는 현장을 기록하며 새로운 다큐멘터리적 체험”(허철녕)을 겪었다고도 덧붙였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의 형식적인 시도도 이어졌다. <옵티그래프> <오색의 린> 등 주로 필름영화를 작업한 이원우 감독은 ‘인스타360 ONE RS 1인치’ 카메라를 백팩에 부착하고 광장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세밀한 사건들을 채록했다. “여의도광장에선 지상파방송의 드론 카메라 등 워낙 화려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송출됐으니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선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도입을 고민” (이원우)한 결과였다.
상술했던 다큐멘터리영화의 위기는 반복돼왔고 언제나 새로운 답을 찾고 있었다. <미국의 바람과 불> <돌들이 말할 때까지> 등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김경만 감독은 “과거에 보도 언론과 주류 언론사가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독립다큐멘터리가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통해 책임졌던 것”처럼 “현장성과 신속성과 같은 부분은 원래 독립다큐멘터리영화의 몫이 아니었던 듯하다”라고 말했다. 박소현 감독도 “미디어, 영화 생태계가 변하긴 했으나 막상 현장에 나선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마음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라며 “각자의 일상에서 이어지는 활동과 연구 차원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손으로 더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 등장할 수 있게 됐다”라며 지금 다큐멘터리 생태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지금도 여전히 사회에서 덜 조명되는 곳, 사회에 덜 알려진 광장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들을 밝히는 일”(최종호)은 다큐멘터리영화의 변치 않은 존재 이유다. 이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와 카메라의 움직임이 “나는 새로운 상상의 나라를 보고 있다”(<내가 꿈꾸는 나라>)라는 희망의 발로로 곧 관객을 찾길 바란다.
<비상123>(가제) - 상행동 시민미디어팀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은 오는 7~8월경 이번 탄핵 정국의 다양한 현장을 채록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비상123>(가제)을 공개할 계획이다. 김영욱 시민미디어팀 팀장을 비롯한 박채한, 이명훈, 이현호, 장병철, 최종호, 최호영, 홍다예, 허철녕 감독이 작품 기획과 연출에 참여한다. “사실상 계엄을 ‘당한’ 비상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직접 시민들과 호흡한 결과물”이자 “시의성을 강점으로 두고 있되 금방 휘발되어버리는 SNS, 유튜브 콘텐츠와 달리 지난 5개월을 차근차근 복기하는 차원의 작품” (김영욱)이 될 예정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이되 이번 탄핵 정국을 통해 새로 독립다큐멘터리 신에 진입한 여러 신진감독의 다양한 시선을 종합하는 영화다.
<고양이 돌봐드립니다> - 박소현 감독
박소현 감독이 2022년부터 제작해온 <고양이 돌봐드립니다>는 원래 빈집에 홀로 남게 되어 돌봄이 필요한 고양이들, 그리고 나이도 많고 아픈 자신의 고양이들을 함께 돌봐야 하는 연출자의 일상이 전개되는 영화였다. 그 와중에 박소현 감독은 갑작스러운 탄핵 정국을 맞이하게 되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광장에 나갔을 때 발견한 ‘집에 돌봐야 할 고양이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 깃발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는 개인이 일상에서 겪던 돌봄에 대한 감각이 광장으로까지 확장되는 감각을 주었으며, 전작인 <야근 대신 뜨개질>과 같이 개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광장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경험을 반복하게 해주었다. 박소현 감독은 “다시 한번 일상과 정치는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즉 수많은 사회정치적 의제의 발현이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미시적이고 내밀한 사적 경험으로 환원되는 작금의 현상을 포착하려는 시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