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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마음으로 하는 것, 소프라노 조수미➁
정재현 사진 오계옥 2025-05-01

- 2016년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에 <Simple Song #3>가 올랐지만, 생방송에 맞춰 원곡의 길이를 수정할 수 없다는 원곡자의 요청에 의해 시상식 당일엔 라이브 무대를 갖지 않았다. 이후 리사이틀 무대 등에서 이 곡을 부른 적 있나.

가사가 참 아름다운 노래인데, 언젠가 이탈리아 공연에서 한번 부른 이후로는 무대에 올린 적이 없다. <Simple Song #3>가 <유스>의 마지막 장면에 쓰였기 때문에 곡 전체의 맥락이 살아나는 노래다. 영화 전체를 상영하고 이 곡을 부르면 모를까. 그저 이 노래만 무대에서 부르자니 음악 안팎의 이야기가 너무 귀중하다. <노팅 힐>에서 애나(줄리아 로버츠)가 말한 “난 그냥 남자에게 사랑을 바라는 평범한 여자다”라는 대사와 통하는 가사가 <Simple Song #3>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가사 한줄이 그렇게 나의 심금을 울린다. 이건 작가의 비상한 필력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 파올로 소렌티노페데리코 펠리니 못지않은 감성을 타고난 천재다.

예술은 마음으로 하는 것

- 20년이 지나도록 한국의 주요 국제행사 때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주제가였던 <Champions>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이 유독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나.

이 노래를 들으면 힘이 난다. 웅장한 전주 아래 ‘너와 나~’가 흐르고, ‘이기리라!’라는 가사가 실린 고음을 듣고 고양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다들 이 곡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히딩크호의 4강 진출 기적과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하던 영예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다. 적시에 적절한 방법으로 소구된 노래라 곡의 생명력이 길 수밖에 없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사실 <Champions>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 정말인가.

그때 내가 워너클래식&에라토의 소속이었다. 음반 시장의 법도상 한 음반사와 독점 계약을 맺으면 다른 회사와의 작업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그런데 <Champions>를 작곡한 에릭 레비는 유니버설뮤직그룹 소속이었으니 애당초 컬래버레이션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섰다. “2002 한일 월드컵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행사이고, 나는 대한민국 홍보대사이기 때문에 이 노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표를 설득하니 회사에서 결국 이해해주더라. 여기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면 좋았겠지만 녹음 또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는 이 곡의 간주에 꼭 국악을 넣고 싶었다. 그런데 여러 이견이 있었고 결국 두 가지 버전의 <Champions>가 발매됐다.

- 202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의 초빙석학교수로 임용돼 화제를 모았다. 현재 산하의 조수미 공연예술연구센터가 인간과 AI가 음악 분야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연구 중이다. 2023년엔 직접 포럼에 나서서 AI 피아니스트와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예술과 기술은 서로에게 어떤 도움을 주며 상생할 수 있다고 보나.

예술과 기술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는 시대다. 예술이 예전처럼 마냥 전통만 고집하자니 새 시대가 도래했고,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고 실험하는 데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교수로 임용될 즈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나의 홀로그램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실감형 콘텐츠로 미니콘서트를 선보인 적 있다. 2026년에 국제무대 데뷔 40주년을 맞아 앨범이 나온다. 신보에 AI가 작곡한 노래 두곡을 수록한다. 한곡은 바흐풍의 멜로디를, 다른 한곡은 한국적인 멜로디를 만들라고 주문할 예정이다. 기술은 손으로, 예술은 마음으로 하는 것 아닌가. 이 둘이 융합될 때 정말 창조적인 결과물이 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일엔 분명한 전제 조건이 붙는다. 기술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선 최종 결정권만은 고유의 감성과 판단력을 지닌 인간이 가져야 한다.

- 혹시 경력 초기부터 기술 발전에 관심이 깊었나.

아니다. 테크놀로지라면 학을 떼는 아티스트였다. 나는 심지어 콘서트에서 마이크를 쓰는 것도 웬만하면 지양하는 사람이다. 오로지 인간의 호흡과 공간의 공명을 가지고 소리를 운용하는 것만이 예술의 순수한 가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KAIST의 이광형 총장님이 교수직을 제안했을 때 몇 차례 전화를 피했고, 예술과 과학의 합치 가능성에 대한 회의도 컸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나의 고정관념을 부수었다.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며 라이브 공연이 무더기로 취소되지 않았나.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동료들이 휴대폰으로 연주 영상을 촬영해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런데 내가 평화예술인으로 활동 중인 유네스코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계를 위해 슈베르트의 를 노래하는 영상을 담아달라고. 우선 피아노 앞에 앉았다. 휴대폰 카메라를 켰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더라. 사나흘을 고민하다가 큰맘 먹고 영상을 찍었는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이 담긴 감사를 건네받았다. 이날 이후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확연히 줄었다.

-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언어로 노래한다. 최근까지도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의 공인인증시험을 준비하는 등 외국어 학습에 열중했던 것으로 안다.

호기심이 나를 공부하도록 이끈다. 세상만사가 궁금하다. 어느 나라에 가든 현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길 즐긴다. 그들이 무얼 먹고 즐기는지 알고 싶다. 외국어로 노래할 땐 단순히 가사만 외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노래엔 깊이가 생길 수 없다. 가령 독일 가곡을 부른다 치자. 가사의 원류인 괴테가 쓴 시나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쓴 희곡을 파악하려면 철학 공부까지 마쳐야 한다. 가사가 쓰이고 곡이 만들어질 당시 어떤 사조가 융성했는지를 파악해야 그 곡의 온전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으니까. 덕분에 매일 언어 공부를 달고 산다.

- 지난 몇년간 무대 아래 조수미의 행보는 ‘아낌없이 주는 선배’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 수많은 국가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젊은 성악도들에게 수학의 기회를 제공했다. 지난해 프랑스 페르티앙보에서 개최한 제1회 조수미 국제성악 콩쿠르의 입상자들과 올해 6월 한국에서 전국투어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다. SNS를 통해 일면식이 없는 후배 음악인에게 조언을 건네는 모습도 수차례 보았다.

어릴 적부터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걸 좋아했다. 예술가로 살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악보도 혼자 보고, 여행도 혼자 다니고, 영화관도 혼자 찾는다. 그럴수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촉각을 곤두세워 관찰한다. 내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습득한 자산이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를 알리고 나눌 때 그 가치가 배가되지 않을까. 모든 건 주는 만큼 돌려받는다. 하루에 8명씩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몸은 녹초가 된다 해도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이 배우는 만큼 나 역시 아이들 모르게 큰 에너지를 얻고 돌아온다. 한때는 내가 잘나서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인식할 때 소중한 이들과 발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SNS에 사람들이 남기는 댓글도 일일이 읽고 전부 ‘좋아요’를 누른다. 그 행복이 나를 지지해 지난 40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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