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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앞으로도, 프리마돈나 조수미➀
정재현 사진 오계옥 2025-05-01

<유스>

- 워낙 영화 보기를 즐긴다고 들었다. SNS에 영화 감상문도 자주 올리지 않나.

일과가 없는 날엔 두세편도 거뜬히 본다. 지금 거주 중인 리스본 집 근처에 영화관이 있어서 쉬는 날이면 극장을 찾는다. 최근엔 <빙 마리아> 라는 프랑스영화를 보았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을 당시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가한 일을 극화한 작품이다.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한국을 찾았을 당시 호텔과 같은 건물에 위치한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전부 보았다. 이번 방한 때도 동일한 극장에서 영화 두편을 관람했다.

- 조수미만의 영화 감상법이 있다면.

영화관 객석이 아닌 감독의 의자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 프레임의 세팅 방식, 배우의 의상과 연기 등에 어떤 디렉션이 담겼을지 끊임없이 고심하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단 한번 관람으로는 영화에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내가 출연한 <유스>를 세번 봤는데,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 오페라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지 않나. 영화나 시리즈를 보며 연기해보고 싶은 배역을 찾기도 하는지.

오페라에선 18, 19세기의 히로인을 주로 연기하다 보니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극적이다. 사랑 하나만 믿다 죽는 여자, 사랑에 배반당해 미쳐 날뛰는 여자…. 그런데 본래 내 성격은 활달하고 웃긴 편이다. 긍정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북돋는 것도 좋아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까진 아니더라도 도시에서 밝고 재미있게 살아가지만 가끔 엉뚱한 모습도 보이는 역할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시트콤이나 코미디영화를 보는 걸 무척 즐긴다. <두 남자와 1/2>이나 <빅뱅 이론> 등을 좋아한다.

매혹당한 영화들 - <나인스 게이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유스>

<나인스 게이트>

- 조수미가 매혹된 영화 세편의 리스트를 사전에 부탁했다. 세편 모두 가창과 출연 등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한 영화다. 사운드트랙 제의가 오면 어떤 점을 주요하게 고려하나.

나의 목소리가 작품에 시너지를 내는 일이니 허투루 허가할 수는 없다. 여러 요건을 검토하는데 그중 흥행 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살핀다. 이왕 나의 목소리가 쓰인 만큼 영화가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았으면 좋겠다. 감독의 전작이나 출연진 정보 등 주요 자료를 스크랩해보면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하다. <히말라야>의 엔딩 시퀀스에 등장한 <그대 없는 날>처럼 감독이 직접 영화의 스토리를 설득해주고 음악이 아름다워 참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나저나 어떻게 세편만 꼽아달라고 하나. 리스트를 선정하는 일은 언제나 잔인하다.

- <나인스 게이트>의 삽입곡 <Vocalise>로 처음 영화와 협업했다.

로만 폴란스키가 에마뉘엘 자이그너와 나의 파리 공연에 찾아왔다. 자이그너가 연둣빛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데, 순간 그 눈빛에 압도돼 얼어붙었다. (웃음) 이후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자이그너의 분위기가 <나인스 게이트>와 더없이 어울리겠더라. 영화음악의 전설인 보이치에흐 킬라르의 음악은 말하면 입만 아프다.

- 곡을 녹음한 날을 회상하면 어떤 기억이 먼저 떠오르나.

클래식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체코 프라하에서 녹음했다. 음악을 녹음한 스메키 스튜디오와 녹음에 참여한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모두 영화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이다. 덕분에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날 프라하의 분위기가 큰 공을 세웠다. 생기발랄한 햇살 아래 시민들이 바깥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는 날이었다면 절대 그 느낌이 안 났을 텐데 그날따라 비밀을 품은 듯 날이 흐렸다. <Vocalise>의 기이한 분위기를 내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지. 곡 특유의 음산함을 만들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며 음악에 접근했다. 보통은 음악감독이 이런저런 디렉션을 주기 마련인데 킬라르는 내가 직접 곡을 채색할 수 있도록 많은 부분을 믿고 일임했다.

- 어떻게 곡의 느낌을 찾아갔나.

대개 첫 네 마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음색을 잡는다. <Vocalise>와 같이 나를 위해 작곡된 음악은 전례가 없어 일정 부분은 싱어가 프로듀서처럼 곡의 느낌을 만들어가야 한다. 비유하자면 백지 위에 새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 그림이 평생 남는 격이니 쉽지 않다. 곡의 제목이기도 한 보컬리제는 가사가 없는 성악곡의 일종이다. 오직 성악가의 목소리에 따라 곡의 느낌이 천양지차로 변한다. 소리로만 세상의 모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노래라 많은 소프라노들이 보컬리제에 도전한다. <유스>에 삽입된 <Simple Song #3> 또한 간주 이후 보컬리제 구간이 등장하는데, 음색이 연주와 영화 전체에 알맞게 섞여야 하는 터라 쉽지 않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IMDb에 따르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소프라노 조수미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통칭 <밤의 여왕 아리아>)을 처음 사용한 영화다.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돈 존슨멜라니 그리피스가 주연한 <파라다이스>가 먼저다. 어디서도 한 적 없는 이야기다. 맨해튼에 있는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봤는데, 상영 도중 작품에서 내 목소리가 나오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나. 내 목소리를 사용하겠다는 제작진의 프러포즈가 없었다. 당시 성악계 라이징 스타들의 노래를 모아 발매하는 컴필레이션 앨범이 인기였는데, 그 앨범 중 하나에 수록된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을 사용한 듯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경우 메이저 음반사와 녹음한 세번의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중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노래를 직접 라이언 머피 감독에게 추천 했다.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속 리즈(줄리아 로버츠)가 로마에서 파스타를 맛있게 음미하는 장면과 자라스트로를 살해하라는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의 섬뜩한 가사가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전혀. 오히려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은 소프라노의 아리아 중 가장 현란한 고음과 파워를 요한다. 라이언 머피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리즈가 스파게티 알 포모도로를 먹을 때 느끼는 충족감을 충만한 카타르시스를 지닌 아리아와 딱 맞아떨어지도록 연출했다.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속 한 승려가 예견한 리즈의 미래는 소프라노 조수미의 궤적과 일부 닿아 있다. 여행을 자주 하게 될 것, 자기 분야 이외의 일을 수만 가지 해볼 것 등이 그렇다.

그 승려는 결말 즈음엔 리즈에게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회피가 평안을 가져다주진 않는다고 말한다. 리즈는 자기가 사랑하는 걸 잃을세라 도망치지만 이로 인해 자기 안의 평화가 깨진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갖고 단 하루든 3년이든 사랑을 해야 한다는 걸 영화가 가르쳐준다.

-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오래 거주했으니 영화에서 강조하는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 무위의 달콤함)의 라이프스타일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왜 한국어 표현 중에 ‘멍 때린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나도 천성이 한국인이라 멍을 때릴 일이 거의 없다. 앉아 있을 때도 머릿속을 끊임없이 가동하고 시간을 쪼개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 이탈리아인에겐 돌체 파 니엔테가 삶으로 예술을 이룩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가만히 커피만 마시고 40도가 넘는 햇빛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나. 난 1분도 못 버티는데. (웃음) 한강에서 매년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린다던데 필요한 대회라고 본다. 나의 복잡한 삶과 상관없이 머리를 비우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생각이자 명상이니까.

- <HBO>의 <밀드레드 피어스>에선 작중 성악가로 등장하는 베라(에번 레이철 우드)의 목소리로 발탁됐다.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을 비롯해 <Caro Nome> <Qui la voce sua soave> 등 수많은 아리아가 등장한다.

토드 헤인스가 나를 캐스팅한 이유를 듣고 엄청 웃었다. 본인이 아는 소프라노 중 내가 체격이 가장 아담해서 베라의 퍼스낼리티와 잘 맞을 거라고 판단했다더라. 아무래도 베라가 어린 성악가다 보니 막연히 음색이 예쁘고 체구가 작은 소프라노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살다살다 신체 조건으로 캐스팅된 건 처음이었다. (웃음)

- <유스>에서 주인공인 지휘자 프레드(마이클 케인)에게 중요한 <Simple Song #3>를 불렀다. 가수로 참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소프라노 조수미로 출연해 영국 왕실 행사에서 <Simple Song #3>를 가창하는 장면을 연기했는데.

런던 워털루 근처의 극장에서 이틀간 촬영했다. 솔직히 현장 분위기가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심기를 거스르는 스태프들이 꽤 있었거든. 마이클 케인이 이미 준비를 해왔음에도 현장에서 대역 배우와 함께 철두철미하게 지휘 연기를 준비하는 순간도 목격했고, 제인 폰다가 속사포로 대사를 쏘아붙이다 엔지가 나서 속상해하는 모습도 봤다. 세계적인 배우들이 같은 공간에서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잘해야겠더라. 피올로의 비위를 맞추며 현장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야 테이크를 20번씩 안 가겠다 싶었고. (웃음) 마이클 케인의 부인인 샤키라 바크시가 내 바흐 앨범을 들고 온 것도 잊지 못한다. 마이클 케인이 “나는 바흐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내 덕분에 매일 당신 목소리를 듣고 있다”며 고개를 젓던 풍경이 생생하다. 앨범에 사인도 해주었다.

- 녹음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영화감독들이 대개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나. 파올로 소렌티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작곡가인 데이비드 랭은 나한테 최대한 곡의 주도권을 맡기는 편이었는데 파올로는 노래의 템포를 바꿀 것을 포함해 까다로운 디렉션을 거듭 건넸다. 평생 녹음을 두번 이상 한 적이 없었다. 한데 <Simple Song #3>는 파올로가 로마 녹음본에 불만이 있어서 런던에서 재녹음까지 했다.

- 까다로운 디렉팅을 건넸다지만 파올로 소렌티노로부터 직접 캐스팅 연락을 받지 않았나.

이탈리아에 <Rai>라는 공영방송이 있다. 한국의 KBS처럼 보유한 채널도 다양하다. 파올로가 그중 클래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Rai 5>에서 우연히 내가 이탈리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무대를 보게 됐다고 한다. 심지어 파올로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열렬한 추종자인데 내가 카라얀 선생님의 제자라는 걸 알자 바로 연락을 해왔다. 내 이름 조수미로 영화에 등장할 수 있게 조치하겠다는 이야길 듣고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출연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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