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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치유할까, <달팽이의 회고록>
이자연 2025-05-01

‘This film was made by human beings.’(이 영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달팽이의 회고록>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볼 수 있는 이 문장은 애덤 엘리엇 감독의 많은 것을 상징한다. AI 기술이나 컴퓨터그래픽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자부심. 결코 무뎌지지 않는 손가락 끝과 작은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카메라 조리개처럼 힘을 주었다 풀기를 반복한 동공의 힘까지. 게다가 주변 사람들의 사연이나 자전적인 시선에서 풀어낸 픽션은 시간과 체력만큼 소모적이다. 몇초 만에 가볍게 무한 생성되는 것과 달리 닳고, 부족하고, 사라진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태생적으로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난 그레이스는 쌍둥이 형제 길버트의 수혈로 간신히 수술에 성공한다. 이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어진 탯줄처럼 모든 슬픔을 함께 맞닥뜨릴 운명에 있다.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도, 그레이스를 둘러싼 따돌림과 차별도, 연령대에 맞춘 교육의 부재도 모두 공평하게 두 쌍둥이 남매를 뒤덮는다. 그들 곁에 남아 있는 보호자 아버지는 하반신 마비에 알코올중독자지만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유일한 어른이다. 본래 파리에서 오래된 볼렉스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애니메이터였던 그는 기분 좋은 날이면 아이들에게 자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제작비를 벌기 위해 길 위에서 곡예를 부리다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고 그렇게 호주에 오게 됐다는 역사만이 지금의 불행을 조금 희석시켜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성실했다. 장애를 가진 처지를 비난하지도 지나치게 낙관하지도 않으며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보호했고 길버트에겐 곡예를, 그레이스에겐 만화 제작을 알려주면서 미래를 꿈꾸게 했다. 양질의 학습 환경은 아니었지만 쌍둥이 남매는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경험을 통과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쌍둥이는 입양이 어렵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주(州)에, 완전히 다른 가정환경으로 보내진다. 모든 슬픔을 반쪽씩 나눠 갖던 남매는 이제 모든 걸 온전히 1인분의 몫으로 감당해야만 한다.

그레이스의 새 부모는 온화하지만 다소 기괴한 성적 취향을 지녔고, 길버트는 아동 착취적이고 종교 강요적인 가정에서 조용히 굳어간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주로 그레이스의 시선을 좇아가면서 길버트의 자리를 미약하게나마 상상의 여지로 남겨둔다. 편지를 보내 근황을 전하거나 그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레이스의 첫 친구이자 버팀목이기도 한 핑키 할머니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만큼 친절하진 않다. 그레이스만큼이나 관객은 길버트의 고난과 슬픔을 상상한다. 멋대로 상상하면 할수록 더 크게 다가오는 슬픔의 위력을 생각하면 이는 이산가족의 비애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외부의 시련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만들었던 그레이스의 마음속 달팽이 껍질은 이제 당사자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불행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는 외부 세계와 모두 멀어졌다. 그레이스의 삶에 아무래도 희망은 없어 보인다.

‘창작’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치유할까

영화가 워낙 초반부터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맞닥뜨린 것들, 타고난 것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을 반복해 얘기하다 보니 이 모든 비운이 선천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운으로부터 은신하기 위해 정신적 달팽이 껍질로 몸을 잔뜩 웅크렸던 삶의 태도야말로 그레이스를 그 자리에 영영 정지하도록, 뒤로 도망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애덤 엘리엇 감독의 자기 고백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섬세함과 정교함이 중요한 장르지만, 애덤 엘리엇 감독에겐 유전적인 수전증이 있다. 분명 작업에 치명적인 지점이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부터 직선이나 원형을 삐뚤게 그리기 일쑤였고, 이것을 자신의 한계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비균일함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애덤 엘리엇 감독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 수전증을 영원히 고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차라리 그것을 환영해주기로 했다. 나만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결함. 나만의 비완벽함.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을 끌어안았다. 미약함을 포용할 때 비로소 나만 할 수 있는 스토리가 완성된다. 우리는 각자 다르기 때문에 외로워하지만, 다른 덕분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는다. 우리 모두, 이 다름을 축하하면 좋겠다.” 따라서 <달팽이의 회고록>이 오롯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선언은 이 작품이 완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그러나 인간만이 끌어안을 수 있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 있다는 성찰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성은 그레이스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레이스가 폐쇄적이고 고립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난 순간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배운 방식대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순간이었다. 창작 노동을 거쳐 어엿한 작품을 완성한 바로 그 순간. 그리고 이제 그는 안다. 해방된 슬픔은 더이상 과거의 것과 같지 않다. 발화된 슬픔은 장력이 느슨해져 더이상 자신을 가두지 못한다. 사람들 앞에 나선 슬픔은 새로운 관계 맺음을 준비한다. 애덤 엘리엇이 창작의 힘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치유했듯, 그레이스 또한 창작의 경험으로 자유를 얻어냈다. 물론 모든 현실이 천국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돈을 벌어야 하고, 집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하고, 더 많은 관객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것들이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오랜 친구, 핑키 할머니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그게 인생이란다. 당당히 맞서렴. 용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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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해피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