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 에피소드3 <아주 오랫동안>
어느 자살자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침실로 오지 마. 집에 냄새가 안 나게 창문을 열어뒀어.” 유서의 주인공 빌(닉 오퍼먼)은 자신이 직접 설계한 마을의 방어벽을 조엘(페드로 파스칼) 외엔 누구도 살아서 넘지 못하리라고 믿은 듯싶다. 생존주의자의 자부심을 구태여 활자화한 웃음소리 ‘하하하하하하’로 보건대 주인의 심장박동이 멈춘 이후에도 유머의 기운은 불멸이다. 그의 바람대로 편지는 정확한 수신자에게 가닿는다. 조엘의 새 동행자 엘리(벨라 램지)가 대독하는 편지 말미엔 퉁명스런 어조를 무마하는 고백이 뒤따른다. “나의 모든 무기와 장비를 너에게 줄게.”
그로부터 20년 전인 2003년, 미국 소도시. 동충하초 곰팡이가 인간에 기생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마을 주민들은 모조리 격리 구역으로 이송되고 숨어 있던 빌만 남는다. 정교한 CCTV 시스템, 각종 총기와 탄약을 비롯한 무기류, 황산, 가스 마스크, 식량을 완비한 지하실에 숨어 있던 그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세상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된다. 요컨대 편집증과 실행력을 고루 갖춘 종말론적 대비자(서바이벌리스트)의 승리다. 이어지는 몽타주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을 통틀어 가장 활기찬 시퀀스라 할 만하다. 지옥으로부터 절묘히 고립된 남자는 자급자족을 위한 농작과 사육을 시작하고 전기 발전소를 개인화하며, 중요한 일과로서 고급 와인을 쟁여두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앞선 두 에피소드에서 좀비보다 끔찍한 인간 자치 공동체의 폭력을 마주한 시청자들은 이 ‘유능한 혼자됨’에 차라리 안도한다. 이후 무려 4년. 평화가 이어진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모든 종류의 침범은 필연이다. 시즌1의 가장 훌륭한 에피소드라고 주저 없이 칭하고 싶은 3화에서 침입자는 사랑의 형태로 찾아온다. 빌의 경우를 빌리자면 사랑은, 구덩이에 묻어버릴 수도 있는데 기어코 사다리를 내려 건져올린 무엇이다. 사랑은 갑자기 내 요새 안으로 쳐들어온 낯선 사람. 뻔뻔하게 밥을 얻어먹고, 따뜻한 물을 마구 쓰고(“5분만 더 샤워해도 되나요?”), 먼지 쌓인 피아노를 함부로 열어젖혀 구닥다리 멜로디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첫눈에 서로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것.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을 살려주는 것. 며칠만 두고 보기로 하고는 오랫동안 함께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랫동안.
원작 게임에선 조엘과 라디오 주파수로 통신하며 물자를 교환하는 캐릭터였던 빌-프랭크 커플에 주목한 <HBO> 시리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 살아남은 게이 연인의 사랑 위에 생존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결합이라는 흥미로운 층위를 더했다. 오래 살아남기 위한 구호로써 철저한 자원 관리를 중시하는 빌과 달리, 그의 연인 프랭크(머레이 바틀릿)는 오직 둘만 살아가는 마을의 건물 외벽 페인트를 보수하고 정원의 잔디를 깎으려는 남자다. 한편 빌과 프랭크의 과거 서사가 소개되기 직전인 시리즈의 현재 시점에서 조엘은 연인 테스를 잃었다. 조엘의 애도를 표층에서 섣불리 장면화하는 대신 이 시리즈는 빌의 염려를 무릅쓰고 외부인과 교류하기 시작한 프랭크가 조엘과 테스라는 외부자를 최초로 집에 초대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빌은 총구 끝을 조엘에게 겨냥한 채 식사할 정도로 타인을 경계하지만, 이내 조엘과 테스의 관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쪽이 조엘이란 사실도 알아차린다. 두 보호자들이 서로의 신원을 파악하는 험상궂은 대화를 이어갈 동안 테스는 프랭크에게 한줌 씨앗을 건넨다. 정원에 영근 딸기를 베어물고 환희에 찬 두 남자를 보여주는 다음 신에서 나는 테스가 조엘에게 선사했을 기쁨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본다. 철조망을 치는 손과 그 아래 열매를 가꾸는 손이 맞잡고, 한쌍의 손이 두쌍이 되어 유대하는 방식으로 인간은 종말 ‘이후’의 삶을 짓는다.
오늘날 각광받는 시리즈물들이 선호하는 한 경향 중에는 다중시점의 내러티브를 꼽아볼 만하다. 조엘과 엘리를 두고 빌-프랭크 커플에 주목하는 3화의 기술은 그러므로 새로워서가 아니라 절묘하기에 훌륭하다. 테스의 죽음으로 별안간 둘만 남겨진 조엘과 엘리는 아직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상대다. 이들의 긴 여정을 앞두고 3화는 약 20년에 걸친 어느 관계의 시간을 대범히 돌아본다. 세월이 흘러 빌과 프랭크의 동화는 좀비나 폭도의 습격이 아니라 투병 중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프랭크의 의지로 중단된다. 빌도 기꺼이 그 죽음에 동반하기로 한다. 조엘과 엘리가 그들의 거실에 도착했을 때, 연인은 2층 침실의 방문을 단단히 잠가두었고 마지막 만찬의 흔적만이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어쩌면 빌에게는 프랭크와 함께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결정이 아니었을까?). “난 예전에 세상이 싫었고 사람들이 전부 죽었을 때 기뻤어. 하지만 내가 틀렸어. 구할 가치가 있는 한 사람이 있었어.” 빌은 이제 조엘에게서 총구를 거두고 아직 지킬 것이 남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 이것은 프랭크가 빌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열리면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유능해진다고, 생존의 본능보다 사랑의 본능을 중시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낭만주의자 작가들은 믿는다. 20년 전에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조엘과 엘리가 곳곳에 헌신이 깃든 아름다운 집 안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잠시 쉬어간다. 연인을 잃고 동생을 구해야 하는 와중에, 인류 유일의 바이러스 면역 보유자로 알려진 소녀와의 동행이 버거운 조엘이 처음으로 임무를 인정하는 것만 같다. 3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인 카메라의 시선은 린다 론스테트의 컨트리송 <Long Long Time>(아주 오랫동안)을 배경 삼아 떠나는 조엘과 엘리로부터 서서히 물러난다. 카메라의 자리는 어느새 이층집의 열린 창문 안쪽이다. 닫혀 있던 문 너머의 침실. 그러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연인의 바람대로 시신으로부터 완전히 등진 채로 그저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1시간15분에 달하는 에피소드의 중턱까지도 행여 낯선 손님이 돌변해 1인분의 안전을 망칠까 졸아붙었던 마음에 바람이 드나들게 내버려두기로 한다. 유유히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드높은 담장의 문을 열어젖히고 석양 속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이 보인다. 어떤 이야기는 기어코 창을 열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