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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실재와 허구, 경계의 틈에서 새 나오는 증언과 외침, <올파의 딸들>

문틈 사이로 두 젊은 여성과 그 뒤에 손을 모으고 있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올파의 딸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 담으려고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젊은 여성, 그 뒤로 포커스 아웃된 중년 여성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중년 여성의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이 이어지고 “올파의 네명의 딸 중 두명은 올파와 같이 살고 나머지 두딸은 늑대의 먹이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파의 딸들>은 튀니지의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가 2015년 튀니지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고프란과 라흐마 자매의 이야기를, 실존 인물인 올파와 남은 두딸들이 심리치료극에 가까운 재연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영화다. 북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튀니지에 사는 올파는 딸만 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가족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남장을 하고 운동을 하면서 관습적인 젠더를 거부하던 올파는 있으나 마나 한 무능력한 남자와 결혼해서 딸 넷을 낳는다. 고프란과 라흐마는 올파의 첫째, 둘째 딸이며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젊은 여성들이 셋째 에야와 넷째 타이시르다. 2011년 튀니지는 오랜 독재정권에서 해방되고 올파는 자신의 삶을 혁명한다면서 남편으로부터 탈출한다. 그 후 그녀는 네명의 딸들을 키우기 위해서 인근 국가로 이주노동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실재와 허구의 경계, 배우와 실제 인물의 경계 그 사이를 교묘히 뒤섞은 영화는 현실과 재연을 실제 배우와 실존 인물을 통해 오간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올파 역을 맡은 배우가 “배우는 캐릭터와 이야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 스스로의 감정과 상태를 보호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하자 올파가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너무 진짜 같아서요”라며 부연한다. 이것은 어쩌면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는 회한처럼 들린다. 올파는 어릴 때 가족과 본인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했던 것처럼 엄마가 되어서도 딸들을 지키기 위해 억척스럽고 엄격한 엄마 캐릭터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캐릭터는 올파의 딸들을 지키지 못했다.

관습적인 젠더 규범에 저항했던 올파는 결혼식날 여성이 여성에게 악습을 대물림하는 관행을 경험한다. 첫날밤 신랑과의 성행위를 거부하던 올파의 방에 쳐들어온 언니는, 동생 올파에게 신랑에게 굴복하고 빨리 성행위를 해서 처녀임을 증명하라며 윽박지르고 동시에 신랑에게 남자답게 강제로 해버리라고 강요한다. 감독은 부부간 강간을 조장하는 이 장면을 심리치료극으로 전달한다. 올파는 자신의 언니를 직접 연기하며, 그때의 억압과 고통을 자신에게 가한다. 놀라운 건 올파가 그 역할을 즐기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캐릭터에 거리를 두지 못해 걱정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올파는 언니 역할을 하면서 배우에게 “애원하지 말아라, 나는 애원하지 않았다”, “저쪽 구석으로 몰아라” 등의 디렉팅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올파가 얼마나 강하게 젠더 규범에 저항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올파(가 연기하는 그의 언니)가 흔드는 피 묻은 시트는 처녀성의 증거가 아닌, 올파에게 맞은 신랑이 흘린 코피를 닦아낸 시트다. 올파는 그날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신나게 증언한다. 하지만 올파는 자신의 언니처럼 무자비한 젠더 억압을 딸들에게 보호를 명목으로 되풀이한다. 기존의 올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버바팀 연극(Verbatim Theatre)은 인터뷰, 증언, 진술, 대화 등을 통해 녹음 혹은 채록된 현실의 말을 배우가 발화하는 다큐멘터리 공연의 형태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종종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올파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습 장면이다. 녹음된 올파의 증언을 들으면서 연습을 하는 배우의 복잡미묘한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연기에 있어 몰입의 과정은 즉각적인 공감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론 인물과 배우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면서 배우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물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거나 배우 자신의 상황에 투영하면서 일어난다. 올파를 연기한 배우는 올파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 그리고 지지를 복합적으로 표현한다. 카메라는 그 배우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얼굴을 함께 보여주며 인물과 실제, 배우와 관객의 이중적 반영을 만든다. 이 미장센이 결국 버바팀 연극을 차용한 영화의 형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배우는 캐릭터를 수행하며 내적갈등에 빠지기도 한다. 그 수행이 본인이 품고 있던 가치관과 철학에 반하는 행동인 경우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올파의 새 남자 친구에 대한 재연극에선 재연배우가 마약에 취해 누워 있고 에야가 그의 옆에 앉아 무덤덤하게 (성범죄로 추정되는) 피해 사실을 말한다. 증언의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고 행동하는 에야의 연기에 오싹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때 재연배우가 단지 잠시 쉬고 싶다는 이유로 중단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에야는 괜찮다며, 지난 과거를 자신은 이제 극복했다면서 증언을 이어간다. 감독은 실존 인물이 증언을 통해 심리치료극 형식으로 상황을 재연하며 그 상황 속의 자신을 다시 보게 하면서 자신이나 동시에, 배우 역시 인물을 통해 동질감과 이질감을 체험하게 만든다. 관객 역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배우와 실존 인물 사이의 경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며 관객 역시 수동적으로 보는 관람자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경계의 틈 사이를 통해 배우가 수행하면서 감각하는 모든 것들- 내적갈등과 공감, 충돌과 이해- 을 함께 경험한다. 심지어 이 영화 속 배우들은 올파의 증언 중에도 개입하여 추궁하거나 현재의 삶에도 개입해서 딸들과의 관계나 그녀의 가치관에 대해서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어느덧 감독의 영화적 장치는 충고와 조언과 공감과 갈등을 관객의 것으로 전이시킨다. 수동적인 관람에서 적극적인 감각경험의 형태로 관객을 전환시킨 이 감각의 촉발은 공감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영화가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들은 국경을 초월해 세계 각국 어디에서든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두 자매가 늑대의 먹이가 되는 과정을 통해 올파를 둘러싼 가난과 속박이 대물림되는 환경과 올파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 그들을 어떻게 몰아갔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아랍의 봄’ 혁명 전후의 아랍 사회의 불안정함일까. 올파로 상징되는 악습의 관행일까. 혹은 대물림되는 가난과 억압, 비틀어진 사춘기의 반항, 사회관계망(SNS)의 영향일까.

2015년 10월9일 체포되어 감옥에서 15년형을 받고 살아가는 올파의 딸들, 남은 자매는 언니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언니들이 자신의 삶을 망칠까봐 두려워한다. 해결하지 못한 양가적인 감정이 남겨진 가족들을 휘감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에야의 증언으로 마무리된다. “언니들을 망친 이 가족이 나의 삶을 망치게 두진 않을 거야.” 이 말이 끝난 뒤 화면은 감옥에서 자라고 있는 8살 난 올파의 외손녀 파트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 증언과 그 속에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의 모습은 처절한 외침이 되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영화는 끝났지만 우리의 질문과 반성, 그리고 연대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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