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 30주년 연속 기획으로 1502호에 봉준호 감독을 만나고 이번호에 미쟝센단편영화제를 재개하는 7인의 영화감독을 모셨다. 지난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현재 30~40대 감독들 중 내로라하는 재능 있는 감독들이 많은데 과거에 비해 산업과의 접점이 약화되어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든 지점을 언급했다. 장르영화의 상영과 발굴에 대한 의미뿐 아니라 미쟝센은 제작자, 영화계 관계자 등 젊은 창작자들이 실질적으로 업계 플레이어들과 만나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점을 짚어보고 싶다.
한준희 미쟝센단편영화제 재개 소식이 알음알음 소문이 났는지 연출팀 친구들이 자주 되물어왔다. 기다렸던 신인감독들, 이 업계에 얼마나 많겠나.
장재현 신인감독을 찾을 때 미쟝센 수상작, 출품작이라는 통로가 있으면 투자자와 제작사들에게도 좋은 물꼬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일단 검증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특히 장르영화제라는 점에서. 사실 신인감독을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업계 플레이어들도 막막할 것이다. 가령 코믹 시나리오를 맡을 만한 신인감독을 찾을 때 미쟝센 희극지왕 섹션에서 물색해보는 그런 루트.
한준희 부연하자면 물론 모두들 생각하시겠지만 단편영화나 독립영화가 반드시 상업 장편영화로 가는 계단이나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논의되어선 안된다. 하지만 산업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그런 효과도 뚜렷했다는 것, 확장력 있는 프로젝트로 나아가길 바라는 감독들에게 기여했던 역할을 되살리고 싶다. 그래서 지금처럼 극장과 영화계 상황이 조금씩 나빠져가는 시대에,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선순환되는 파이프라인의 형성이 창작자들에게 많은 에너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보게 된다.
장재현 심사하는 입장이 되어서도 미쟝센의 소중함을 느꼈다. 출품작들을 같이 보고 심사하면서 좋은 친구를 얻었다. 감독들끼리 사실 만날 일이 잘 없다. 성격도 다 이상하고. 그런데 심사하면서 서로 열정적으로 영화 이야기하고 스태프들 정보도 물어본다. 감독이 돼 처음으로 ‘네트워크’가 생겼다고 느낀 것이 미쟝센을 통해서였다. 또 여기서 눈여겨본 배우들이 캐스팅 풀을 넓혀준다.
한준희 <12번째 보조사제>의 이학주 배우, <남매의 집>의 구교환 배우, <차이나타운>의 많은 배우들이 미쟝센에서 기억해둔 배우들이었고…. 엄태구, 조현철, 이민지, 이수경… 미쟝센에서 만난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는 게 정말 큰 힘이었다.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없어진 뒤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졸업영화제도 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제도 가서 보는데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런 영화제가 감독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재능 있는 배우들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 장르영화의 위상 자체가 과거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시작할 때와는 달라졌다. 장르적 컨벤션, 만듦새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을 지나 현재는 오히려 장르의 포화가 지적된다. 단편영화의 대다수가 이미 장르영화다. 이어지는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이 가운데 새롭게 견지해야 할 부분이 있을까.
이상근 민주화 역사를 거친 대한민국에서 후일담으로서의 역사영화, 사회파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가 있었고 장르영화는 그 가운데서 인정받을 만한 무엇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초창기 미쟝센은 이른바 엄숙주의를 타파하고 환영받지 못했던 장르의 틈새를 열어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단편영화들이 기본적으로 장르성을 많이 띠고 관객 또한 그것에 익숙한 분위기가 됐다. 그러니까 오히려 장르영화제이기에 실험적인 영화를 품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하는 분도 있을 텐데 궁극적으로 좋은 단편을 소개하고 싶다는 면에서는 다른 단편영화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윤가은 만약 산업이나 시장에 고착화된 장르가 있다고 하면, 이 영화제에 대해 관객으로서 좋았던 점은 감독이 해석한 장르, 각자 변형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간 장르영화들을 만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감독 색이 묻어나는 영화제를 보는 곳이다. 그 이유는 아마 감독들이 수상작을 뽑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어쩔 수 없이 감독 색이 강한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것이 미쟝센이 다른 영화제들과 다른 무언가다.
장재현 장르별 단편영화를 발견하는 일에 더해 영화제를 통해 바라는 바는 새로운 크리에이터들이 산업에 많이 수혈되었으면 하는 거다. 앞으로의 10년, 한국영화계를 이끌어갈 사람들. 그것도 아주 독특한 창작자들. 영화제에서 주로 각광받는 단편영화들이 사회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라면 미쟝센은 장르영화제로서 창작자들의 새로운 개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더 삐딱해지고 싶다. 영화들이 안전해지고 평범해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영화제다운 정답이 아니라 삐딱하고 이상한 사람을 지지할 수 있는 분위기, 그런 것이 더 노골적인 영화제라면 좋겠다. 그리고 과거의 미쟝센단편영화제가 말 그대로 장르 단편을 찾는 것을 지향했다면 이제는 크리에이터들을 산업에 소개하는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한준희 지금 생각나는 역대 대상 수상작들은 다 이상한 영화들이다. <숲> <남매의 집>은 물론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2001년, 제1회 대상, 신재인 감독), <나만 없는 집>(2017년, 제16회 대상, 김현정 감독) 같은 영화들. 이런 영화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존재로서의 영화제를 꿈꾼다.
장재현 (심각한 얼굴로) 부제를 그렇게 가야 하나? ‘누가 누가 더 이상한가.’
훔치고 싶을 만큼 좋은 영화를 기다립니다
- 한 사람의 관객이자 동료로서 앞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보고 싶은 영화는 뭔가.
이옥섭 … 훔치고 싶은 영화!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장재현 감독답다. 감독이니까 드는 생각이지.
이상근 이거 봐, 말을 많이 해봤자 소용없어. 짧게 임팩트 있는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옥섭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소개됐던 영화들을 보고 진짜 많이 배우고 훔쳤으니까.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다 남아 있다. 들킨 것도 있고, 아직 안 들킨 것도 있고.
이상근 이름 붙입시다. 대도 이옥섭으로. 이 얘길 들으니 나도 문득 생각나는데 데뷔한 감독이 본심 심사를 한다면 기존 수상자, 조감독 출신 등이 예심을 보곤 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옛날엔 DVD로 예심작을 배부했는데, 이제 와 고백하자면 두어 작품을 내 컴퓨터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계속 보고 싶고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그게 <4학년 보경이>다.
장재현 이상하고 좋은 영화를 만나면 그걸 만든 감독이 궁금해진다. 이거 만든 사람 꼭 한번 보고 싶다, 이런 느낌.
조성희 근데 막상 만나보면 전부 실망하게 되지 않아? (일동 웃음)
장재현 그치, 우리가 좀 바보 같지.
조성희 요즘 내가 계속하고 있는 고민은 유튜브에 넘쳐나는 재밌는 콘텐츠들에 대해서다. 시나리오도 좋고 촬영도 좋다. 그럼 굳이 단편영화를 왜 만들어야 할까.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영화적이라는 것, 시네마틱함의 실체에 대해 질문거리를 들고 있다. 새롭고 이상하고 돌연변이 같은 영화를 나 역시 기다린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과거에 봤던 훌륭한 영화들에서 느꼈던 그것. 그 무언가를 다시 찾게 해주는 작품도 보고 싶다. ‘그래, 이런 거 만들려고. 이런 거 보려고 영화가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 비정성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4만번의 구타, 절대악몽, 희극지왕까지. 미쟝센단편영화제의 정체성을 대변했던 섹션명은 어떻게 바뀔까.
장재현 매우 분분한 논의를 거쳐왔다. 기존처럼 영화제목으로 섹션명을 가져가되 상징적인 한국영화 제목들, 2000년대 초반 정도로 연대를 조금 가까운 곳으로 당겨오면 어떨까 싶다.
한준희 현재도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장재현 처음 모였을 때부터 가장 많이 회의한 부분이 영화제의 세부 사항들을 적극적으로 개조할 것이냐, 보수적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기존 영화제가 지닌 긍정적인 전통을 최대한 지키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섹션명을 손보는 것 외에는 부문 자체의 변경 등은 없을 것 같다.
- 끝으로 공동의 추억과 취지를 갖고 모인 서로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한준희 장재현 감독이 정말 고생 많았다.
장재현 각자의 고충이 있었을 뿐이다. 성격 급한 내가 저질러놓은 것을 이리저리 해결해주셔서 모두에게 감사하다. 미쟝센을 다시 이어가자는 프로젝트 자체가 막막한 때도 있었다. 답보 상태에서 이걸 왜 자꾸 붙잡고 있나 싶고. 그런데 끈질기게 붙들고 있으니 이렇게 이어지잖나. 그리고 특히 이상근 감독님이 2021년 20회 미쟝센단편영화제의 굿바이 트레일러를 찍었는데 이 프로젝트의 십자군이 되어주어 의미 있게 생각한다.
이상근 다 <파묘>가 잘된 덕분이다. (웃음)
조성희 이렇게 돌진하는 몇몇 사람이 있어야 힘이 모이고 움직임이 생긴다. 새삼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기 계셔서 하는 말이 아니라 <씨네21>이 없었으면 이 프로젝트는 불가능했을 거다. 우리끼리 해서는 안되겠는데, 그런 국면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들도 많고.
이상근 꿈을 꿨지. 21회니까 <씨네21>이 나타난 건가 싶기도 하고. 운명 같지 않나, 일이 되려니까 도와주는 사람도 나타난다.
엄태화 사단법인 만드는 과정에서 <씨네21> 사무실에 모이는 날 7인 감독에게 각자 챙겨오라고 한 서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여기 7명 중 단 한명도 제대로 써온 사람이 없었다.
윤가은 전부 틀렸다.
이옥섭 전부!
이상근 근데 다행히 <씨네21> 사무실 바로 옆에 또 동주민센터가 있네? 금방 해결이 됐잖아. 그것도 운명 같아. (웃음)
장재현 다들 수고가 많으셨고, 이제야 체감하기를 이 일을 근 20년간 이끌어온 이현승 감독님. 긴 시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고군분투를 이어오신 것을 잘 알겠다. 김성수 감독님을 비롯해 영화제를 지지해주신 선배 감독님들에게도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도록 해주셨으니 이제는 새롭게 잘 이어가보겠다는 출사표를 함께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