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런던 어느 클럽 앞. 정보국 소속 최고 요원인 조지(마이클 패스벤더)는 동료 요원인 미첨(구스타프 스카르스고르드)과 접선한다. 미첨은 수천명을 죽일 수 있는 비밀 기술인 ‘세버러스’가 내부 배신자에 의해 사라졌다고 말한다. 유력한 다섯명의 용의자 중 한명은 조지의 아내인 정보 분석가 캐슬린(케이트 블란쳇). 둘은 정보국 내의 대표 부부다. 미첨은 일주일 내로 범인을 색출하라고 말한다. 다가오는 일요일, 조지는 식사 대접을 빌미로 용의자 모두를 집으로 초대한다. 캐슬린을 제외한 네명은 각각 부부로 총 3커플이 식탁에 모여 게임을 시작한다. 빈정 상하는 말이 오가고 부부간에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다. 조지는 조용히 이를 관찰한다. 월요일 아침이 밝고, 조지는 출근한 사무실에서 미첨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블랙 백>은 정보국 요원인 부부가 서로를 의심하며 추악한 진실을 파헤치는 한편의 근사한 스파이 스릴러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으로 <스파이더맨> <쥬라기> 시리즈를 집필한 할리우드 대표 시나리오작가 데이비드 켑이 각본에 참여했다. 둘은 앞서 저예산 공포영화인 <프레즌스>(2024)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켑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 인물이 그것을 돌파하는 것에 관심을 보여왔다. 소더버그가 그렸던 인물 역시 켑의 인물과 공통점을 지닌다. 둘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 <블랙 백>은 난관에 부닥친 인물인 조지를 중심으로 그물망을 그려나간다. 조지는 요원이었던 아버지를 감시해 아버지의 결혼 생활과 커리어를 한방에 날려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나이다. 그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인물들의 말이다.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는 말의 향연, 말의 액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의 대사량은 상당하다. 영화는 격투나 총격 신 없이 오직 대화로 긴장감을 유지하며 극을 이끌어간다. 냉혈한의 면모를 지닌 조지는 다섯 용의자의 말들을 솎아내어 사건의 실체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는 법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중간 회색지대에서 조지의 판단을 유보하는 인물이 바로 아내 캐슬린이다. 영화는 그녀를 의뭉스러운 인물로 그려 궁금증을 유발한다. 캐슬린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은 소더버그와 호흡을 맞춘 <굿 저먼>(2006)에서 전후 도덕적으로 붕괴돼 회색지대에 놓인 인물인 레나 브란트를 연기한 바 있다.
레나 브란트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았다면, <블랙 백>의 캐슬린은 남편 조지와 함께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만 타협은 불사한다. 어떤 결과를 초래해도 상대를 구한다는 것이 이 부부의 철칙이자 장수 커플의 비결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업무상 기밀이란 뜻으로 쓰인 ‘블랙 백’은 정보국 요원들이 자주 뱉는 말로 직업의 특수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언제든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신뢰를 담보할 수 없는 이들 세계 속에서 부부는 지속이 불가능한 취약한 형태의 관계로 등장한다. 거짓말에 노출된 세계인 <블랙 백>에서 조지와 캐슬린은 서로를 향해 의심과 믿음을 동시에 내보이며 둘만의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close-up
클럽으로 입장하는 조지를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팔로업한다. 동료 미첨을 밖으로 불러낸 조지는 그에게서 비밀 임무를 하달받는다. 이들의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본다. 영화는 이 시점숏 하나로 관객에게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환기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의 메인 테마인 ‘감시’를 간단하면서도 담백하게 보여주며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내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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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감독 더그 라이먼, 2005
부부가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감시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하다. 부부 사이의 믿음은 이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논리에 의해 시험에 든다. 액션보다는 주로 대화로 상대를 파악하는 심리전을 펼치는 <블랙 백>과 달리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는 유쾌하고 화끈한 액션영화다. 최전성기 시절의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년 전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부부 상담 컨셉을 활용한 연출을 선보였기에 각종 상담 콘텐츠가 즐비한 한국 상황과 묘하게 공명하며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