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는 채워져야 한다. 교황 선종 이후 콘클라베가 시작되자 시스티나성당 안은 오직 선거의 중력만이 팽배하게 작동하는 닫힌 우주가 된다. 이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기도의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은 결코 교황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주인공까지도 어느새 욕망하게 한다. 추기경의 내면도 중력 법칙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들은 본능적으로 언어, 인종, 문화적 배경의 적절한 공모점을 식탁으로 삼고 선거의 판세를 읽는 명민한 몇몇 주도자들에 의해 양강 구도를 형성하려는 분위기는 점차 팽팽해진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조성된 콘클라베의 비밀성은 이렇게 외려 밀봉된 권력투쟁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영화 <콘클라베>의 역량도 여기에 있다. 현실의 정치적 의제를 벼려내 사유하는 작품이기보다 콘클라베를 무대 삼아 집단적 믿음의 역학을 시험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이 집단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올바르다는 대내외적 자부심을 공유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점도 역설을 더한다.
추기경을 넘어 관객조차 감화시키는 로렌스(레이프 파인스)의 강변에 빗대어보면, 지나친 자기 확신은 멈춘 나침반과 같다. 결코 길을 잃지 않지만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멈춰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성벽을 쌓는다. 그렇다면 혼란은? 언제나 거기서 틈을 찾는 일이다. 노쇠한 교황의 판단, 알코올중독자인 추기경의 증언, 낯선 인물의 등장, 평소보다 좀더 긴 식전 기도, 지하로 향하는 수녀들의 가능성을 살피는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전반부에 이미 정답을 설파한 주인공의 실질적 행로다. 아데예미가 득세하자, 테데스코 대 벨리니 구도로 투표 권력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한 가운데 로렌스는 뜻밖에도 중도표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갈등하고 의심하는 자로서의 주인공이 이를 반길 리 없고 그는 여전히 주요 후보자들의 정당성을 조사하는 데 몰두한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며 벨리니가 로렌스를 질책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벨리니의 위기의식에 보다 선명하게 초점을 둔다. 이쯤에서 <콘클라베>의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어느새 확신은 벨리니나 테데스코의 것만이 아니라 로렌스의 것이기도 하다. 닫힌 집단의 역학이 그로 하여금 투표용지에 자기 이름을 적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믿게 한다. 어느 시점에, 그는 그저 잠시, 그렇게 된다(물론 그 유려한 연기력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신과 교황 앞에서 이보다 더 궁핍하고 나약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이프 파인스의 재능도 이 미묘한 전개에 한몫한다). 그러니 <콘클라베>가 관객의 심리를 조율하는 측면은 관객조차 어느새 로렌스의 편에 서서 그가 교황이 되어도 좋겠다고 바라는 데까지 교묘히 이끄는 데 있다. 언뜻 자연스럽게 우리를 끌어당겨 매몰되게 하는 힘이 닫힌 성당을 넘어 영화 <콘클라베> 안팎으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가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린 <최후의 심판>을 올려다볼 때 별안간 폭탄이 터진다. 시스티나성당의 창문이 깨어지고 파편들이 날아 꽂혀 살갗에 피를 낸다. 하늘에서 날아와 확신의 성벽을 부수는 폭탄. 말 그대로 천벌이다. 테러를 직감한 추기경들이 공포에 떨고 이후 긴급회의가 이어질 때 베니테스가 처음으로 공적 발언에 나선다. 영화의 예기치 못한 분기점인 폭탄 테러 장면 이후 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뜻밖의 기회에 베니테스가 표심을 사로잡았다는 표면적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평온이 종전의 긴장을 대체하는 것이다. 출현한 것은 그저 구멍. 그러나 그 사이로 햇볕과 그림자, 바람과 새소리가 영향을 끼쳐온다. 시몬 베유가 <중력과 은총>을 통해 남긴 말을 접붙이자면 이러하다. 추기경에게도 예외 없이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 비신앙인의 관점에서 은총의 주체를 특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은총의 통로는- 로렌스의 우려를 뒤로하고- 확실해 보인다. 거대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영화가 진정 채워지는 순간은 메꿀 수 없는 틈을 마주했을 때다.
그러자 문득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올랐다.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해 기독교적 모티프를 다분히 품은 이 영화에서 신애(전도연)는 그나마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살인범의 딸을 미용실에서 만난다. 그녀를 살리는 힘은 단단히 손맞잡은 교인들의 기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가 어질러진 정원 구석의 햇볕 한 조각에 있다. <콘클라베>의 신은 로렌스가 신념과 권력을 착각할 때에 비로소 나타나며, 교조주의와 실용주의의 개념적 대립이 아니라 학살과 테러로 뒤엉킨 생의 현장을 보라고 가리킨다. 피 흘리며 쓰러진 로렌스와 분노하고 까무러치는 신애처럼 인간은 그 뜻 앞에서 당혹해하기 마련이지만 고역 끝에 두 영화가 안착한 지점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바라본다. <콘클라베>는 닫힌 문으로 시작해 열리는 창문으로 끝나고, <밀양>은 자동차 앞 유리에서 올려보게 되는 높은 하늘로 시작해 작은 마당 안뜰의 구석에서 끝난다. 미풍의 존재를 느끼면서 흰 종이에 새 이름을 적어내려가는 추기경들에게 작용하는 힘은 중력일까, 은총일까. 종찬(송강호)에게 거울을 들려 놓고 반쯤 잘린 머리를 다듬는 신애는 구원받는가 아니면 스스로 구원하는가. 끈적한 권력과 내면의 고립에서 벗어나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으로 초연해진 얼굴을 보여주는 이들 영화에서 나는 적어도 스크린의 은총만큼은 확실히 감지한다.
<콘클라베>의 마지막 장면. 문이 열리고 여성들이 햇볕으로 나오고 웃음소리가 스며 나온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열림이다. 이 엔딩이 감탄스러웠는데 그간 숨쉴 틈 없이 꽉 짜인 스릴러적 연출을 지속한 영화가 택한 묘사치고는 사뭇 은은한 제스처였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열린 창문 앞에 선 주인공의 상태처럼 이 순간 영화의 스타일 역시 완전한 겸손의 자리로 내려간다. 이것은 굳건한 겸손이다. 영화에 단 7분51초 등장하며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그네스 수녀가 교회의 가부장제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냈듯이, 비로소 한발 물러난 카메라에 담긴 가만한 평화에는 <콘클라베> 속 어떤 정치적 투구보다도 확실한 빛이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