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달리 <히어>의 원작 그래픽노블에서 카메라는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서사가 있는 그림책’이라기보단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인 사진첩에 가깝다. 어떤 방법으로도 여기서 유의미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긴 어렵다.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해도 서사에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된 독자는, 비로소 선형적 구조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반면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너무나 서사에 얽매여 있다. 후술할 엔딩과 더불어 <히어>는 독특한 형식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작위적이고 구시대적 감동 서사를 지닌 영화다. 스크린에 끊임없이 프레임을 열며 원작 고유의 실험을 이어가지만, 어떤 기교를 부려도 영화는 무엇보다 톰 행크스라는 스타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결국 리처드(톰 행크스)와 마가렛(로빈 라이트)의 서사에 귀속되며, 둘의 시대가 아닌 시점에서 진행되는 나머지 장면들은 주인공의 분량을 잡아먹는 듯한 인상을 줄 뿐이다. 그리하여 <히어>의 서사가 빈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제약된 형식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영화에 비해 주요 서사에 할애된 시간이 실질적으로 부족해서다. 만약 <히어>가 <브루탈리스트>처럼 평균을 훌쩍 넘는 길이를 가진 영화였다면, 그래서 관객에게 리처드-마가렛 커플의 서사를 설득시킬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었다면, <히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메키스는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야 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창의력을 발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이사, 출산, 결혼 등과 같은 일생에 몇 없을 굵직한 사건만을 모은 단순한 이야기를 꾸린다. 그 화룡점정이 바로 엔딩 장면이다. 뭔가에 감동한 듯한 카메라가 마침내 움직이게 되는 할리우드식 해피 엔딩. 그러면 관객의 마음도 따라 움직일 것을 확신했던 걸까. 영화 내내 집을 떠나길 원했던 마가렛이 불현듯 옛 기억과 함께 “여기가 좋았다”라는 말을 뱉을 때, 기어코 울림이 생긴다. 따져 보면 결과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치매에 걸린 한 인간이 기억 하나를 떠올렸을 뿐, 그래서 병이 치유된 것도 아니며 궁극적으론 여기에서의 모든 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마음이 움직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히어>엔 디에이징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테크닉 외의 보이지 않는 비밀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인과관계가 없음을 드러내는 몽타주
<히어>는 원작이 지닌 의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론 보는 사람에게 상당한 능동적 태도를 요구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관객은 계속해서 생성되는 프레임 속 프레임들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실시간으로 답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물론 서로 다른 시간대로 진행되는 n개의 타임라인을 구분한 뒤 각 서사를 독립적으로 배치해둔 채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두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영화가 몽타주로 이어서 보여줄 때, 여기에 어떤 인과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 영화가 쌓아올리는 감정의 기반에 원인과 결과에 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터 등장한다. <히어>의 또 다른 주인공인 그 거실이 건축되고 있다. 정확히는 몇명의 인부들이 여기에 집을 올리기 위해 땅을 파고 있다. 이들이 여기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서 리처드가 태어나게 된다는 만들기 쉬운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러나 이 장면엔 동시에 인과관계의 복잡성을 암시하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이는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이 파인 땅 아래에 집을 지을 거냐고 묻자 인부들이 웃는다. 짧게 지나가지만 이 장면이 묘한 인상을 남기는 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늘 우리가 쉽게 처리해버리는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서다. 관련한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파일럿인 존이 아내에게 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존은 개가 우체부가 집에 올 때마다 짖는 건, 자신이 짖음으로써 침입자를 쫓아낸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이 개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진실이 아닌 인과를 당연히 여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존의 대사는 내 몸이라는 공간에 축적되어 있는 수많은 시간들을 돌아보고 재정비하게끔 만든다.
이처럼 <히어>엔 계속해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인과관계의 한계 혹은 오인에 관한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해 <히어>의 몽타주는 오직 의미를 연결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 사건의 결과가 죽음일 때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매우 의도적으로 로즈의 썰렁한 농담에 웃다가 사레가 들려 죽음을 맞이한 남자와, 아내가 우려하던 비행 사고가 아닌 독감으로 생을 마감한 파일럿을 한 묶음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웃다가 쓰러진 남자를 죽인 게 로즈가 아닌 걸 알지만, 그 인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파일럿의 장례식 참석자들이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그가 분명 비행 사고로 죽었을 거라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 같은 장면들이 스크린 위에서 연쇄반응을 보이며 공명할 때, 관객의 머릿속에선 각자의 현재를 지탱하고 있는 바닥에 어떤 과거가 파묻혀 있는 것인지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여기들’을 바라보는 저메키스의 카메라
그 여정의 끝에서 인간은 또 기어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아니, 의미를 찾는 것이 곧 인간일까. 그 대표 인간이 만든 <히어>엔 단절된 시간들의 서사를 머릿속으로 이어붙이려는 본능, 그리고 반대로 이를 끊어내려는 감독의 의도된 연결이 아이러니하게 공존한다. 영화는 끝내 최첨단 기술인 AI까지 동원하여, 마가렛을 연기한 로빈 라이트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노화되는 과정을 끊김 없이 드러내기에 이른다. 단절된 시간이 하나의 프레임 위에서 이어지지만, 그 누구도 마가렛이 몇년 동안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말 사랑스럽게도 인간은, 여기에 기어코 말 한마디를 얹음으로써 이 같고도 다른 표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당신, 또 딸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 대사로 인해 마가렛의 ‘지금, 여기’라는 사진첩에는 ‘딸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제목이 붙게 된다.
마가렛이 딸을 그리워하는지 아닌지를 몽타주만으로 판가름이 불가능한 것처럼, 마가렛이 사는 동안 ‘여기’를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를 이미지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가렛의 말을 듣고 집을 벗어나 하늘에 오른 카메라의 마음 또한 영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 확실히 보이는 건, 이곳에 마가렛과 리처드의 ‘여기’ 외에도 수많은 ‘여기’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여기’들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메키스의 카메라는 이렇게 높이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깊이 아래로 파고들었을까. 저메키스의 이번 ‘여기’가 영화 자체로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의 이 모든 ‘여기’들을 바라보는 방법론과 마음 자체가 녹슬었다는 생각엔 동의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