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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상실과 회복의 누아르, <파과> 민규동 감독
글·사진 김소미 2025-03-06

136번째 수정고에 이르러서야 <파과>는 마침내 빛으로 나아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마주한 60대 여성 킬러 서사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원작을 출발지 삼아 긴 창작의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고 끝에 완성된 이 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준 첫인상은 중층의 누아르로서 지닌 매력이었다. 원작보다 액션이 강조된 장르적 완성도에 더해, 기억으로 침잠하는 인물의 멜랑콜리가 편집의 기조와 절묘히 만났다. 독일의 영웅 서사 <니벨룽의 노래>가 묘사하는 ‘인간적 약점’을 조각(이혜영)의 그것에 대입한 민규동 감독은 냉철한 표정을 지닌 킬러의 손톱 밑에서 아프게 까끌거리는 삶의 가시가 <파과>의 진면모라고 바라본다.

- 액션과 감정을 모두 심도 있게 소화할 60대 여성 페르소나가 필요한 작업이다. 캐스팅 과정도 만만치 않았겠다. 이혜영 배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틸다 스윈턴이 떠올랐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님에게 소설을 보내면서 시나리오를 전달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감독님도 가능하다고 했는데 회사(수필름)에 얘기했다가 야단맞았다. “한국영화부터 제대로 해라”라고. (웃음) 틸다가 했다면 근미래를 배경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는 킬러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도 있었겠지. 이혜영 선배를 만난 건 촬영 7~8개월 전쯤이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다른 사람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불가역적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조각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배우, 이 이야기가 가진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조각의 클로즈업이 액션과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기둥을 세운다. 이혜영은 은막의 아우라를 지닌 동시대의 몇 안되는 배우인데 감독으로서 어떤 점에 주목했나.

그가 가만히 서서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도 하나의 룩이 완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남부군>(감독 정지영, 1990) 속 빨치산의 그 차가운 느낌도 떠올랐다. 이혜영 배우가 지닌 고전적 아우라를 극장에서 보는 경험만으로 또 다른 발견의 재미를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특히 인물이 외롭고 심오한 순간에 이혜영 배우의 표정이 상당히 몰입감을 높인다. 그에겐 떨림이 있다. 연기에서 일부러 ‘떨림’을 연출하려면 인위적으로 보이기 쉬운데, 이혜영 배우는 특별히 연출하지 않고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인물의 흔들림을 발현하곤 했다.

- 영화 촬영장에서 흔히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 여겨지는 3대 캐릭터가 모두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노인, 아이, 그리고 개다.

안 그래도 스태프들에게 “이거 내가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을까?”라고 한 적이 있다. (웃음) <파과>에서 강아지는 조각과 완전히 연결된 존재다. 조각은 45년 동안 삶의 어떠한 달콤함도 욕망하지 않고 살아왔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단절하고 오직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개가 삶에 침투하면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다. 처음에 그는 반려동물을 전혀 친절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결국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는다. 이것이 킬러에게 아주 치명적인 요소일 수도 있고 동시에 구원이 될 수도 있다.

- 음지의 자경단인 ‘신성방역’에서 조각을 둘러싸고 류(김무열), 투우(김성철)가 정념의 삼각축을 형성한다. 추억과 연민이라는 인간적 자질이 노년의 킬러를 위태롭게 하지만, 결국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는 서사로도 읽혔다.

<니벨룽의 노래>(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편집자)에서도 그렇지 않나. 지크프리트가 불사의 육체를 얻는 과정에서 우연히 등에 보리수 나뭇잎이 붙어 있는 바람에 그 부분만 약점으로 남는데, 결국 그 작은 약점으로 인해 파멸에 처한다. 조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철저하게 단련된 존재처럼 보이기에 이 캐릭터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를 더 생각하게 했다. 독일 문학처럼 하나의 운명 또는 필연으로서 몰락하고, 이를 통해 회복하는 구조가 이 이야기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 베를리날레 초청작으로서 적합한 비유다. (웃음)

대학 첫 전공이 독어독문학이었고 고등학생 때도 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할 정도로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독일 문학이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이번에 베를린으로 날아올 때도 독일 작가의 책 딱 한권만 챙겼다. 베를린 출신 작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다.

- 킬러 이야기가 동반하는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감독의 관심은 상실과 삶의 무게로 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상실이 한국 사회의 일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때로는 감춰진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로부터 생긴 멜랑콜리함이 곧 이 세계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작은 달콤함을 찾아서 살아가려고 애쓴다. <파과>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 한 인물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노년의 조각이 자신의 기억 속을 걷는다거나, 과거의 대사를 현재의 인물들이 읊는 식으로 몽환적인 내러티브를 펼치는 구간들이 돋보인다. 어떤 의도가 있었나.

조각은 과거를 단순히 떠올리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회상 장면을 따로 연출하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과거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드보일드 액션으로서 장르적인 재미도 대단히 신경 쓴 작품이다. 하지만 핵심은 상실과 회복, 즉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시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래서 조각이라는 인물을 보며 ‘저 사람을 응원하고 싶다’ 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란다.

- <허스토리>에 이어 장노년층 여성 인물이 중심축인 서사를 한국 영화시장에 잇따라 내놓은 드문 감독이 됐다.

그러게,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려는 건 아닌데. (웃음) SF소설의 대가 아서 C. 클라크가 한 말을 좋아한다. 그가 좋은 이야기가 통과하는 세 단계의 반응에 관해 말한 적 있다. 첫 번째는 “이거 절대 안돼” , 두 번째는 “역시 별거 아니잖아”인데 마지막 세 번째가 “거 봐, 내가 좋을 거라고 했잖아!”이다. <파과>는 처음에 말도 안되는 기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중간에는 도대체 이걸 왜 하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갈 차례다. 결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한국 개봉 후 적어도 관객들에게 ‘봐, 이런 영화도 가능하잖아’라는 응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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