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저 발언은 어떤 식으로든 당분간 회자되겠구나. 탄핵심판 내내 이어진 윤석열 변호인단의 장황하고 비논리적인 주장들은 마침내 최후 변론 한마디로 축약 수렴됐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단호하고 겸손하며 확신에 찬, 시대착오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장소 착오적이라 해야 할까? 마치 뉴스에서 자주 봤던 북한이나 중국 소식과 묘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무려 84일 동안 반복된 내란 수괴의 계엄 계몽론은 저 화룡점정의 문장을 통해 끝내 목적을 달성했다. (솔직히 ‘계몽되었다’는 참담한 고백조차 온전히 진심이라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주변 몇명이라도 계몽에 성공하셨다니 함께 자리하신 그분께 심심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고 외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실은 ‘말’에는 죄가 없다. 다만 그것이 발화되는 방식과 장소, 상황과 맥락이 문제다. 돌이켜보면 익숙한 희극이 때론 비극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식상한 비극이 종종 희극처럼 다가오는 건 언제나 그 내용이 아니라 당도하는 상황과 타이밍 때문이었다. 사전적으로는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을 뜻하는 계몽이란 단어가 극우를 꿈꾸는 이들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2025년 대한민국에 불시착했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 상대를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는(혹은 귀찮아하는)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계몽시킬 ‘대상’을 찾아 헤맨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깨우침이란 행위가 아니라 상대 위에 서겠다는 욕망이다. 그리하여 교화와 훈계의 ‘대상’을 ‘발굴’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은 부끄러움 없이 계몽을 고백하고 간증한다.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진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조금 일찍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계엄이라는 큰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트럼프 집권 이후 세계질서는 한창 지각변동 중이다. ‘계몽되었다’는 말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웃어넘기려다 문득, 고개 들어 주변을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얼마 전 독일 기독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했고, 극우인 독일대안당이 강세를 보이는 등 전세계의 우경화가 거대한 파도처럼 들이닥치고 있다. ‘계몽’이 타임머신 타고 잘못 떨어진 말이 아니라 닥쳐올 미래를 안내할 예언의 말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슬며시 발목을 적신다. 세계 곳곳 권위주의 정권이 득세하고 자국 중심주의의 다극화로 치달아가는 지금, 2025년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의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영화 전문지에서 무슨 정치, 사회 이야기만 주야장천 늘어놓는다고 타박해도 어쩔 수 없다. 사회는 영화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화는 사회적 변화의 징후를 투사하기 마련이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부터 올해 명예황금곰상을 받은 배우 틸다 스윈턴의 BDS 지지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베를린국제영화제 소식까지, 영화는 마치 반작용처럼 ‘계몽’의 흐름에 반발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상상력을 지렛대 삼아 예술과 인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영화들을 보며 새삼 실감한다. 스크린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며 극장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뚜렷하게 이해하기 위한 치열한 인식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세계정세에 대한 크고 작은 걱정들이 그저 기인지우(杞人之憂)이길 소망하며, 이번주도 계몽당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극장으로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