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발랄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이하 <괜괜괜>)의 긍정적인 세계관에서 배우 정수빈이 연기한 나리는 가장 큰 어둠을 지닌 인물이다. 항상 무용 예술단의 센터이자 1등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그만큼 커다란 불안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시작했던 춤에 대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질 정도로 나리는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인영(이레)을 비롯한 친구들과의 감정적 갈등과 해소 속에서 나리는 다시금 무대에 설 채비에 들어선다. 한편 이러한 나리의 모습은 최근 방영 중인 시리즈 <선의의 경쟁> 속 정수빈 배우가 연기한 슬기 캐릭터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떠한 분야에서 늘 1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만큼 ‘독기’ 있게 사는 학생들의 면모엔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꿋꿋이 직진하고 있는 배우 정수빈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친다. 한결같이 ‘노력’, ‘열심히’라는 단어를 입에서 떼지 않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미더운 배우의 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 밝고 명랑한 <괜괜괜>의 분위기에서 나리를 연기하며 특히 책임지려 한 부분이 있을지.
나리가 예술단의 센터 무용수로 나오는 만큼 실제 무용수의 삶을 살고 있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1등 무용수란 캐릭터에 어울릴 수 있게끔 치열하게 연습했다. 처음엔 혼자서 육고무를 포함한 여러 무용을 소화하며 연습할 걱정에 잠 못 이뤘는데, 알고 보니 함께 촬영을 준비했던 예술단 분들이 실제 이화여자대학교나 한양대학교의 무용 전공생들이었다. 그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얻은 끝에 지금의 나리가 있을 수 있었다. 영화 속의 나리가 처음엔 혼자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인영이 덕분에 조금 더 춤을 사랑하고 즐기게 된 캐릭터였다면, 배우 정수빈도 영화가 다 함께 준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 일전에 특기가 무용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데. 춤에 대한 기본기는 어느 정도 있었는지.
그런데 한국무용은 아예 다른 장르더라. 숨 쉬는 법, 걷는 법 하나하나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검, 북, 부채 등 여러 한국적인 도구를 공부하는 과정도 꽤 길었다. 한창 연습할 땐 20~30명의 무용 단원 분들과 6시간 동안 육고무를 연습하고, 잠깐 쉬었다가 또 6시간씩 연습하곤 했다. 너무 힘들었는데 무용수 분들은 이게 일상이더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만 하고 정말 춤만 추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새벽 5~6시에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도 근처 공연장에 연습하러 오는 걸 보고 많이 반성하게 됐다. ‘저 아이들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본받아야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더라. (웃음)
- 실제로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급 반장을 도맡았을 만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들었다. 이후엔 배우의 길을 걷게 되면서 연기 실기를 연습하기도 했으니 나리에게 더 잘 몰입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을 듯하다.
나리가 엄마와 솔직하게 자기의 꿈에 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나도 그런 맥락에서 부모님과 이야기하며 연기를 택하지 않았나 싶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 경험에 비추면 나리가 엄마 앞에선 굉장히 모질게 이야기했지만, 그다음엔 분명히 본인이 춤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대화들을 통해서 내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니까. 나리 덕분에 연기 활동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동력을 받는 느낌이었다.
- 2021년에 촬영했으니 지금과 시차가 꽤 있다. 평소에 연기한 결과를 글이나 일기로 정리해 복기한다고 들었는데, 지금 다시 본 나리의 연기는 어땠나.
안 그래도 어젯밤에 예전에 나리를 연기할 때 기록했던 글들을 찾아보느라 조금 늦게 잤다. (웃음) 기본적으론 항상 꼿꼿하고 가만히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인물로 그리려 했던 것 같다. 또 겉으로 어두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밝을 수 있고 기쁠 수 있다는 사실, 누구나 다채로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나리를 통해 배웠다. 원래부터 나리라는 친구가 평소에 좀 경직되어 있지만, 사실은 배우 수빈이도 살짝 경직돼 있는 게 보이더라. (웃음) 또 공교롭게 최근 방영 중인 <선의의 경쟁>과 연기를 처음 시작했던 <괜괜괜> 때를 비교하며 볼 수밖에 없었다. 저때로 돌아간다면 감정의 표현 방식을 조금 다르게 할 수 있었겠다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저때니까 할 수 있던 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진정성!’ 하나로만 임했던 초심을 되새긴 기회였다.
- 언급한 <선의의 경쟁>에서 연기한 슬기 캐릭터는 나리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듯 다른 인물 같다. 슬기도 매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사는 학생이다.
우선 두 친구 다 너무 열심히, 지나치게 열심히(웃음) 사는 인물들이다. 다만 그 악착스러운 면모가 표현되는 결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슬기는 겉으로 그 욕망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방법을 찾는 친구라면, 나리는 주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더 뱉어내는 쪽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리는 <선의의 경쟁> 속 제이(이혜리)와 더 닮았달까? 남들이 다 좋아하고 늘 1등이고 칭찬받는 만큼 엄청난 강박 속에서 사는 인물이니까.
- <선의의 경쟁>에서 슬기가 점차 제이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혼자 자기만의 길을 찾던 슬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한 바가 있다면.
누구나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상처를 워낙 많이 받아온 친구이다 보니 마음의 문을 닫았을 뿐 그 문을 열어주겠다며 두드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당연히 조금씩 문을 열지 않을까 싶다. 원래의 슬기가 백지였다면 제이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의 마음을 칠해줘서 슬기가 결국 정말 예쁜 색지가 되기를 바라곤 했다. 그래서 4화쯤에 나오는 슬기와 제이의 행동도 바로 납득이 갔다. 사춘기 소녀들이라면 나에게 어떤 호감이나 다채로운 감정을 주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질 테니까. 완전히 믿긴 어렵지만 믿고 싶은 제이에 대한 감정, 제이가 준 따스함을 잃기 싫은 슬기의 마음을 편하게 이해했던 것 같다.
- 나리, 슬기를 포함해서 그간 맡아온 배역들이 대개 야무지다거나 욕망이 뚜렷한 인물로 그려진 것 같다. 배우 정수빈을 보는 연출자들이 그렇게 느끼는 걸까.
나는 그냥 당연하게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지점을 감독님들이 ‘독기’처럼 느끼시는 것 같다. (웃음) 나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연기 편하게 한다’ , ‘뭔가 대사를 쉽게 뱉는 것 같다’라는 평을 듣기보단 말 한마디 한마디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연기하고 싶다. 공감하며 작품을 보는 분들에게 실례가 되고 싶지 않다. 사실 평소에 굉장히 긍정적인 편이다. <괜괜괜>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도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서 주변 분들에게 “무조건 우리가 상 받을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진짜 받게 되더라. 받고 나서는 “보셨죠?”라면서 되게 티 내기도 했다. (웃음) 그러니 어쩌면 독기일 수도 있지만 긍정이라는 밝은 면과 잘 합쳐서 뭐든 열심히 하는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