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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자기혐오의 끝
김소미 2025-02-20

오늘날 할리우드의 성 상품화를 비판하고 광고 속 지나치게 포토숍된 스타들의 얼굴에 동조하지 않는 일은 쉽다. 페미니즘을 응원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더 교묘한 이미지 권력을 구축하는 시장 논리가 오히려 이를 돕고 있기도 하다. 획일화된 기준을 의심하는 것이 당대의 주류적 존재 방식으로 자리 잡았고, 동시대 여성들 대다수는 이제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외모의 미학으로부터 제법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서브스턴스>의 컨셉은 여성주의적 의제로서는 한발 느린 인상이다. 할리우드의 이상에서 탈락한 즉시 폭주기관차처럼 자기파괴의 말로를 달리는 여성 캐릭터, 엉덩이가 다 드러나는 에어로빅복을 입고 춤추는 몸을 지나치게 전시하는 카메라 등이 여기에 일조한다. 우선 <서브스턴스>가 동시대가 아닌 1980년대 무렵을 배경 삼은 이유를 들여다볼 만하다. 합리적 추측으로는, 보디 호러 장르의 전성기이자 영화의 주역인 데미 무어의 삶이 다이어트, 성형수술, 결혼 생활의 문제 등으로 광적으로 소비된 역사를 향한 메타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서브스턴스>가 확보한 약간의 시차에 주목한다면,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표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한층 복잡해진 ‘더 나은 나 되기’의 현대적 성찰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주인공에게 SNS 계정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서브스턴스>는 여성을 질식시키는 사회경제적 구조에의 각성 과정이 아닌 그것에 복속된 개별 여성의 자기혐오 양상을 탐닉한다.

중년의 할리우드 스타가 젊음을 위해 섭취한 약물의 부작용을 장르적 연출로 극대화한 영화로는 <서브스턴스> 이전에 <죽어야 사는 여자>(1992)라는 걸작이 있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1990년대 영화가 검지만 한 유리병에 든 핑크빛 물약으로 처리한 장르적 허용은, 2020년대에 이르러 더 간소해지긴커녕 최소한의 의학적 상식을 입고서 거추장스러워졌다.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척추를 가르고 태어난 완벽한 존재 수(마거릿 퀄리)가 일주일의 시간을 문제없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엘리자베스의 척수에서 뽑아낸 활성제를 매일 맞아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회복 시간을 고려해 두 존재가 격주로 교대하며 하나의 삶을 이어간다. 엘리자베스뿐 아니라 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지침이다.

“몸 관리 잘해요. 당신과 당신 몸은 아주 오래 함께일 거니까.” 고딕호러에 어울리는 저택에서 드라큘라 부인처럼 분장한 이자벨 로셀리니(<죽어야 사는 여자>)의 대사는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고 영생할 몸이 떠안는 난제를 암시한다.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로 얻은 초자연적 능력을 결국 소진하게 되는 구조로서 많은 불멸 서사가 품는 <파우스트>의 원형이다. 이때 나는 욕망하는 주체로서 의심이 없다. 그러므로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주인공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한 인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우화적 존재이고, 메릴 스트리프와 골디 혼이 희극의 대상으로서 철저히 타자화되어 공허한 영혼과 도덕적 타락을 가감 없이 내보인다. 반면 <서브스턴스>는 한몸에 근거한 두 자아, 사실상 인생이라는 긴 타임라인에서 젊은 나와 나이든 나에 해당하는 두 사람이 공존하는 위태로움을 바라본다. 한마디로 나 자체가 문제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라는 경고를 다시 <죽어야 사는 여자>식으로 바꾸면, 엘리자베스와 수가 이번에 잘 관리해야 할 대상은 더이상 몸이 아니라 ‘내 안의 나’다. 우리는 이제 혐오의 주체다.

수는 자신의 모체인 엘리자베스를 지긋지긋해한다. 폭식을 하고 나태한 또 다른 나는 무엇보다 지금의 아름다움이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날로 생명력을 빼앗기고 있는 중인 엘리자베스는 수의 어리석음과 무책임함에 분개한다. 미적 집착이라는 구조적 주제 너머로 <서브스턴스>의 진짜 괴로움은 여기에 있다. 완벽주의와 자기혐오는 한집에 사는 두명의 괴팍한 주인과 같아서 때로 한 사람이 벌여놓은 난장판을 다른 한 사람이 이를 악물고 치워야만 한다. 게다가 이 전쟁은 반복된다. 미래의 나를 적절히 대비하지 못하고 살아온 과거의 나는 때로 얼마나 실망스러우며, 현재의 내가 지닌 그나마 유효한 기능마저 잃어버릴 노년의 나는 때로 얼마나 두려운가. 두 여자의 교체 주기를 성큼거리며 헤쳐나가는 과단성 가득한 영화 <서브스턴스>가 유독 집요히 머무르는 구간이 이를 아주 현실적인 사례로 바꾸어 보여준다. “너는 지금도 그대로”라며 십수년 전의 동경을 그치지 않는 고교 동창과 데이트를 앞둔 저녁에 엘리자베스는 거울 앞에 서서 과거에 비해 나이든 자신의 불완전함에 몰두한다. 안쓰럽게 화장을 덧칠한 거울 속 얼굴에 이미 엘리자베스를 미워하는 수와 그런 수를 원망하는 엘리자베스가 한데 비친다. 슬픈 사실은 나와 같은 많은 평범한 여성들도 이 구도에서 별반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저속노화 열풍을 일으킨 노년내과 의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음 한구석에서 늙기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강한 심리적 반동이 이 문화를 추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결백해지기란 어렵다. 다 알면서도 가속노화를 부추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앞으로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쯤에서 저메키스 영화의 제목이 다시 들린다. 어떻게 죽음이 곧 그녀가 된다는 것일까, 죽인다면 무엇을 죽이란 말일까. <서브스턴스>의 종국에 세포분열을 거듭해 몬스트로 엘리자수로 변한 주인공은 비극적 자기 인식의 세리머니에 충실한데, 한편으론 차라리 홀가분해 보인다. 크고 불균질한 형체와 미끈거리는 분비물을 그대로 내보이는 순간에는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자신을 산화시켜 피와 살점을 뿌리는 방식으로 쇼비즈니스 산업에 오물을 투척하는 엔딩 시퀀스가 윤리적으로 정제된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와 별개로 나는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형상에서 자기혐오로 분열되어 있던 얼굴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는 점에 묘하게 안심했다. 더이상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러나 우리 앞에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한 존재의 첫 출현. 뒤뚱거리며 겨우 움직이고 있으나 적어도 이 존재는 하나다. 영화가 근거한 세계에서, 그리고 스크린 밖에서 우리는 그녀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다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이토록 펄떡이는 날것의 생명체를 잠재울 정도로 강력한, 젊고 깨끗하고 잘 관리된 나는 도대체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냐고. 어차피 우리가 하나라면 <서브스턴스>는 다른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고약한 농담조로 말을 건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 그 농담을 기어이 진담으로 바꾸어보는 사람들. 피칠갑의 난장판 가운데 그동안 자기를 찔러온 혐오의 파편들을 솎아내고, 그게 실은 내 몸에 박혀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조금은 후련해하는 사람들. <서브스턴스>가 국내 아트하우스 영화 시장의 고지인 관객수 40만명을 11년 만에 돌파하고 곧 50만명을 바라본다는 소식 앞에서 내가 상상하는 관객은 그런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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