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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어떻게 널 두고 나 가나, (젝스키스, 1998)
복길(칼럼니스트) 2025-02-27

나는 줄곧 K팝의 즐거움을 예찬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줄곧 K팝의 유해함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 K팝에 대한 내 입장은 “사랑받아야 마땅하나, 해로우니 멀리하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하…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실컷 매혹당한 뒤에 칼로 허벅지를 찌르자는 말인가? 아침엔 사랑하고 저녁엔 미워하자는 건가? 대체… 뭔가? 나는 줄곧 뭘 말하고 있는 건가?

심지어 이 혼란은 어디까지나 ‘향유자’라는 하나의 입장에서만 발생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K팝의 즐거움과 괴로움이란 것도 즐기는 자로서의 즐거움, 누리는 자로서의 괴로움에 국한된다는 얘기다. 이 수평 좌표에 ‘참여자’나 ‘생산자’라는 축을 세워보라. 내가 가진 향유자의 양극적인 태도는 동일한 면에 수렴해 차이값을 잃는다. K팝이란 여느 ‘문화(와)산업’이 그렇듯, 자본, 창작, 노동, 소비 등으로 이루어진 입체적이고 정교한 혼란이며, 그것에 연루된다는 건 고정되지 않은 좌표 위에서 나의 수많은 ‘입장들’과 싸워야 하는 일이다.

근데… 내가 왜 싸워야 하나? 싸움판을 보면 한발 물러나 구경꾼이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하물며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한다고? <도둑들>에서 예니콜(전지현)이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싸울 게 얼마나 많은데 자기랑도 싸우냐고. 어, 나는 안 싸울래. 어린애들이 굶으며 무대에 오르든, 어린애들이 찬 길바닥에서 얼어붙든 다 걔가 선택한 일이다. ‘인권 침해’ 주고받기는 이 문화의 전통 같은 거잖아? 창작자, 노동자, 소비자라는 정체성이 자본에 휘둘려 엉망진창 뒤섞인대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 K팝은 세계 최고의 음악이고, 나는 종주국의 고매한 대중이자 선량하기만 한 리스너다.

글을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이 지겨운 논쟁에서 해방될 유일한 기회다. 오늘은 해내고 말리라…! 하지만 분량을 채워야 한다. ‘길을 걷다 우연히 본 풍경이 평생의 질문이 된 경험’ 정도는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

때는 젝스키스가 해체를 발표한 2000년대의 어느 날, 번화가는 ‘젝키야 사랑해’가 적힌 노란 전단지로 뒤덮여 있었다(기획사가 젝스키스에 저지른 만행이 적힌 대자보도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광장에 노란 우비를 입고 모인 팬들은 울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마이크를 쥐고 기획사가 젝스키스에 저지른 일들을 성토했다. 음반을 100만장 팔았는데 회사에서 판매량을 축소하고 있다든지, 젝스키스가 번 돈으로 핑클에만 호화 뮤직비디오를 찍어줬다든지, 사실이라면 정말 개자식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 만행들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장면과 소리에 압도되어 넋을 빼앗긴 채 길을 걸었다. 그런데 길이 좁아질 때쯤 내 앞에 서서 걷던 젊은 여자 무리 중 한명이 통행을 막고 있는 젝스키스 팬들을 향해 외쳤다. “하이고~ 이년들아! 제발 좀 정신 차려라! 화난다고 남의 차를 부수고 다니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이… 지금….”

실로 대단한 광경이 아닌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룹을 해체시킨 악덕 자본가, 어째서인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피해자가 된 아이돌, 그들을 위해 천년의 한을 끌어다 절규하는 팬, 그 분노를 한심하게 여기다 돌연 세상을 걱정하는 대중…. K팝에 얽힌 광기의 ‘입장들’이 하나의 장면에 담기다니. 그런 감동적인 우연이 또 있을 수가….

2016년 <무한도전>으로 젝스키스가 다시 컴백했을 때, 오랜만에 <Road Fighter>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응원한다는 건 엄청난 스펙터클이었겠구나. 다시 봐도 믿을 수 없는 가사다. 너를 두고 갈 수 없어서, 너를 지키기 위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하다 결국 사고로 사망하는 와중에도 너의 미소를 떠올린다니…. ‘오토바이와 터프가이’라는 클리셰를 이렇게 정통으로 밀고 나가는 노래가 또 있던가? 해체 소식에 분노한 팬들이 애먼 차를 때려 부수고, 거리를 온통 노랗게 만든 데에는 분명 이 노래의 영향도 있겠지? 지난 과거의 해묵은 장면 하나만 떠올려도 그에 엮인 감상들이 줄줄이 딸려온다. 또, 그 감상을 하나하나 추궁해야 비로소 이 노래를 ‘들었다’고 여긴다. ‘아! K팝이요? 참 흥미로운 음악이지요.’ K팝을 들으면서 이렇게 교양 있는 웃음을 짓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거다.

K팝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 혼란이 두려워 부단히 애를 썼다. 폄훼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혐오란 그 대상을 매 순간 집요하게 떠올려야 가능한 일종의 각인 행위다.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내 맘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내겐 단 하나의 명제만이 남는다. 나는 K팝을 사랑한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나는 기꺼이 폭주족이 되어야 한다. 이제 ‘사랑하지만, 멀리하겠다’는 말장난도 그만둔다. 사랑을 위해 묵묵히 몸을 던지는 파이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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