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MMCA)은 SBS문화재단과 공동 주최로 ‘올해의 작가상 2024’를 개최하고 4명의 후원 작가를 선정했다. 이중 제인 진 카이젠은 <이어도(바다 너머 섬)>라는 제목으로, 상호 연관된 7개의 영상을 선보인다. 작가는 7개의 작품을 통해 시각적 스토리텔링, 수행성, 사운드, 구술을 교차시키며 시간 기반 미디어 탐구를 확장한다. 제주 태생으로 덴마크로 입양된 카이젠은 강렬한 시각성을 동반하는 시적이고 수행적인 영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인의 경험과 정치적 역사의 교차점에서 기억, 이주, 국경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일곱점의 영상으로 이루어진 연작 <이어도(바다 너머 섬)>는 지역공동체와의 오랜 협업을 바탕으로 제주의 자연, 역사, 문화, 오늘날의 쟁점에 대한 작가의 다층적 연구를 집약하여 보여준다. 그는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작가로 참여하였고, 202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 <이별의 공동체>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올해의 작가상 2024’를 통해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살핀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세계와 함께 제인 진 카이젠과 나눈 대화를 전한다.
“나는 상들의 총체를 물질이라 부르며, 그 상들이 내 몸이라는 어떤 특정한 상의 가능한 행동과 관계 맺을 때 그것을 물질의 지각이라 부른다.”-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주도의 역사와 자연, 신화를 횡단하며 수행성 짙은 작업들을 선보여온 제인 진 카이젠은 이번 전시에서 7편의 단편영화를 선보인다. 각각의 영화는 7개의 스크린 위에 투사된다. 연작 <이어도(바다 너머 섬)>(이하 <이어도>)는 일곱개의 작은 섬(스크린)으로 구성된 상상 속의 섬이다. 제주 방언인 이어도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의 공간이자, 제주인의 공동체적 상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그렇다면 7편의 단편영화로 상상의 섬을 재현한, 이미지들의 집적체인 <이어도>가 반복 상영되고 있는 전시장이자 변형된 극장인 이곳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푸코는 ‘거대한 장방형의 무대 그 깊숙이 이차원의 공간 위에 삼차원의 공간을 새로이 영사하는’ 극장을 헤테로토피아의 한 형태로 제시한다. 제인 진 카이젠은 역사 너머의 태곳적 기억을 호명하면서 시간의 지층과 접속하는 헤테로토피아로서의 반공간, 바다 너머 섬 <이어도>를 재구성한다.
나선형으로 구성된 <이어도>의 서사를 구태여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려는 것은 곤란한 시도이다. 대신, 각각의 스크린을 관통하는 신체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들이 만드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이어도를 여행하는 관광객의 자세이다.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물질을 하는 해녀들, 장례 행렬을 재현하며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는 사람들, 제주 4·3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망자를 위해 수중 제사를 지내는 여성들, 수면 아래로 뛰어든 프리다이버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하얀 천, 소창을 비끄러매고 있다. 소창은 갓 태어난 아기의 기저귀부터 관을 묶는 끈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사용되던 전통 직물이다. 여러 작품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창은 스크린으로 분리되어 만나지 못하는 영상 속 인물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구분이 무용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표상하는 무한함의 시공간을 드러낸다.
오름의 형상으로 솟아올라 재구성되는 제주도의 역사
<잔해>에는 미군이 제작한 선전영화의 푸티지가 4·3사건의 희생자를 기리는 수중 제사 장면과 병치되어 있다. 1945년 촬영된 푸티지에서 미군은 일본군이 남긴 다량의 무기와 포탄을 바다에 폐기한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4·3사건이 발발하고, 차가운 무기가 쏟아졌던 제주도의 바다에는 죄 없는 사람들의 신체도 가라앉았다. 영상은 4·3사건의 참상을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이어지는 수중 제사 장면에서 포탄 대신 망자를 애도하기 위한 과일과 쌀알들이 바다 위로 떨어질 때,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으므로 그 음식들을 먹지 못하는 희생자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해녀들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뛰어들었던 바다, 전쟁을 상징하는 무기들이 매장된 바다, 죄 없는 사람들을 빠뜨렸던 죽음의 바다, 그리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숨을 참고 무당들이 몸을 던진 바다. 위에서 아래로 무한히 낙하하며 수면 아래에 퇴적된 것은 단지 전쟁의 잔해와 역사가 외면한 자들의 비통함뿐인 것일까.
전시장의 중앙에 등을 맞댄 것처럼 앞뒤로 배치된 두개의 영상, <어귀>와 <심>은 잔해가 가라앉은 이어도의 바닥이자 끝, 그리고 제주도의 탄생 설화를 상기시킨다. 바다 생명들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장면들로 몽타주된 <어귀>는 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생명들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화면 가득히 투사하며 이어도를 태곳적 이미지가 우글거리는, 무한한 시간이 새롭게 창조되는 원형의 장소로 묘사한다. 이런 날것의 장면들은 <리바이어던>과 <인체해부도>의 화면과 비슷한 외양을 띠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보지 못하는 곳까지 비집고 들어가 찍고 있다는 카메라의 권능에 심취한 것 같은 두 영화의 태도와 달리, 카이젠의 영상에서 발현되는 것은 태초의 존재들을 너그러이 지켜보며 포용하겠다는 겸손한 관찰자의 태도이다. 조용히, 그리고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이어도를 가동하게 하는 심장이자 엔진을 연상하게 하는 이 이미지들은 제주도의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애잔함의 기억과 슬픈 역사의 잔해들에 선행하는 태초의 시간들,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바다의 원시성을 드러낸다. 700m 깊이의 용암 동굴 내부를 촬영한 <심> 역시 비슷하게 작용한다. 거칠고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동굴 내부의 질감은 영겁의 시간을 짐작하게 하며, 출렁이는 파도 속에 흩어져 있던 여러 개의 시간과 이야기들을 하나로 통합시킨다. 이는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영화와 영상작업의 원형인 정글을 떠올리게 한다. 태국의 설화가 재현되고, 부끄러운 역사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곳이자 산자와 망자, 동물들이 자유롭게 접속하는 곳이었던 정글. 제인 진 카이젠은 원초적인 바다와 동굴의 이미지를 통해, 신화를 아우르면서 제주도를 화산 폭발로 형성된 지리적인 섬이 아닌, 무한한 시간의 지층이 쌓인 관념적인 섬으로 다시 바라보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어도는 어떤 시간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름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그리는 <수호자들>은 수면 아래로 침잠하던 시간이 아닌, 형태 그대로 땅 위로 솟아오른 시간을 묘사한다. 비극이나 삶의 애잔함과는 무관해 보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은 이어도에서 이어질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이들은 나무 인형 ‘꼭두’를 손에 쥐고 있다. 망자가 저승에 무사히 도달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상여를 장식하는 데 쓰이던 꼭두가 아이들과 함께 스크린에 등장할 때 환기되는 것은 이어도에 새롭게 싹을 틔운 시간과 그와 함께 순환하며 반복되는 애도의 시간일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영화 우화>의 마지막 장에서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사>를 설명하며, 영화는 아우슈비츠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므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영화사>가 네오리얼리즘의 영화에 등장한 어린아이들의 얼굴과 시선을 인용하면서 성취하려 한 것은 속죄와 이미지의 부활이라고 대변한다. 제인 진 카이젠의 <이어도>는 얼룩진 역사 위로 아이들의 얼굴을 배치하면서, 시간의 순환과 함께 치유에 다다른다.
순수한 현재와 잠재된 기억 사이를 거니는 관광객
이제, <이어도> 안에 들어온 관람객은, 7개의 스크린으로 나눠진 7개의 조각난 이야기 사이를 거닐며 관측하는 관광객이 된다. 이들은 고인을 기리는 무당 고순안의 만가와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 모여 앉아 부르던 노래, 그러니까 두개의 분리된 선율을 동시에 들으면서 이를 하나의 돌림노래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이다. 동시에, 역사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당도하지 못했던 오늘의 시간과, 해녀들의 손이 닿지 않은 깊은 바다의 약동하는 이미지의 만남을 주선하며 새로운 시간의 회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관광객의 시선이 하나의 스크린에 머물 때, 나머지 스크린에 투사되는 이미지는 잠재적인 이미지이자 기억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시선이 다른 스크린(잠재태)으로 옮겨갈 때, 시간의 지층에 내재되어 있던 이미지는 또렷한 현재로 다시 떠오른다. 현재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무수한 교환, <이어도>는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제주도의 탄생 설화, 설문대할망의 토막난 기억이자 신체가 순진무구한 관광객에 의해 봉합되는 곳이다. 또한, 스크린의 외화면이자 이야기 사이의 공백을 끊임없이 거닐며 메우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교환, 미장아빔이 끊임없이 새롭게 퇴적되는 새로운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