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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영원한 그림자는 없기를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낯섦’이다. 낯선 이, 초행길, 그리고 그 속에서 낯선 모습의 나. 무엇이든 쉽게 예측할 수 없고, 계속해서 퍼즐을 맞춰가는 길이 지겹지가 않다. 또 어떨 때는 모르기 때문에 더욱 용기가 생긴다. 이는 자아가 흐릿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고 될 수 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꼭 ‘나’일 필요가 없어진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더 추구하는 이유는, 뭐든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라든지, 모르는 사람과 몇 시간이건 수다를 떠는 일들이 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남은 생에서도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을 할 때면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빨리 흘러간다. 그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내 멋대로 만든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높은 하이힐을 신고 뛰다가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평상시 잘 신지도 않는 구두를 신고 나왔다. 하늘이 유독 맑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마른하늘에 비바람이 들이닥쳤다(실제로 그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나 역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위기. 우산을 사기엔 시간이 없다. 냅다 달렸지만, 이미 맞지 않는 신발에 퉁퉁 부어버린 발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는 느려져만 갔고, 지하철은 가까워져 온다. 자신과의 사투. 마음은 육상선수지만 따라주지 않는 다리는 하찮게 느껴질 뿐이다. 결국 간발의 차로 지하철 문은 닫혔고, 그녀는 아르바이트에 늦게 되었다. 오늘도 한 소리 들을 생각에, 괜한 날씨 탓을 하며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외국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깊은 욕. 음성을 듣고 난 후에야 알았다. 나의 관찰 대상자, 그 짧은 신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닌 ‘그’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그를 하이힐을 신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깊게 관찰하지 않고 성별을 확정지어버린 내가 아쉬웠다. 나의 과몰입과 상상은 재미있었지만, 그에 치우쳐 더 유심히 바라보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다. 실제로 2022년 9월 파리에서 적었던 나의 상상일지다. 그렇게 낯선 이들에게 나의 상상을 투영하며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샌가 해는 뉘엿뉘엿 지고, 처음 가보는 바에 들어가서 잔뜩 경계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도 혼자라는 사실에 잔뜩 풀어져보기도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 눈에 담은 낯선 이들의 이야기는 무진해진다.

매번 혼자이진 않다. 2019년 7월 벨기에에서의 일이다. 노상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내 기억상, 그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줄곧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노부부가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게 영어로 물었다. 우연히도 나는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들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벨기에 거주인이었다.) 나는 <해리 포터>를 읽고 있다고 답했고, 노부부는 웃으며 그들의 고향이 영국이라고 말했다. 그 대답을 시작으로 우리는 3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 대화에서, 철저히 자신을 새로 만들어나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었다. 이름, 나이, 직업, 이 나라에 온 이유, 그외 모든 것. 나는 그저 <해리 포터>를 너무 사랑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해리 포터> 시리즈를 낭독하는 여행가이고 이번엔 벨기에로 오는 차례라고 했다. 사실 나는 대학생이었고, 계절학기를 들으러 프랑스에 갔다가 학점을 모두 이수한 후 벨기에로 여행을 간 터였다. 아무런 판단도 편견도 없었던 그 3시간이 넘는 대화는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그들의 벨기에 이주 여정, 러브 스토리, 자신들이 개발한 영국식 벨기에 음식 등등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이야기들과 함께 취했던 밤. 귀가하는 길에 문득 그들도 나처럼 신분을 위장했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또 시작된 ‘만약 위장한 것이 사실이라면?’의 상상. 현실에 존재했던 상상으로 만든 나와 허구 속 또 다른 허구로 가득 채워진 하루였다.

그렇기에 여행은 흡사 꿈꾸는 것과 같다. 모르는 일이 가득 펼쳐진다.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말이다. 평범할 수 있는 낯섦을 마주했을 때, 무지함에서 탄생할 수 있는 용기들이 여행에서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낯가리는 새로운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되는 굴레. 그 굴레가 돌고 돌아 결국엔 이 세상도 동그랗다는 내 상상 속 철학도 초행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두에게 영원한 그림자는 없길 바라는 소망과 함께 말이다.

기억 속 낯설었던 것들을 되짚어보면서, 올해 마지막 달을 마주한다. 새로운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푸근했던 경험, 매번 하던 일이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경험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당신은 당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한 후,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떠요”라고 대답했다. 어떠한 일은 대단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숨을 쉬는 것, 그리고 아침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인 것이다. 매일 그것을 실행하는 여러분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잘 부탁드린다.

잊지 말자. 모든 이들은 영롱하다. 2024년 11월17일의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