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후 21년 만에 영화 <위키드>(2024)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고전영화의 명작 반열에 오른 <오즈의 마법사>(1939)에 등장하는 바로 그 마녀들로, 도로시의 집이 깔아뭉개버린 서쪽 마녀 엘파바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착한 마녀 글린다의 관점에서 ‘엘파바가 왜 나빠졌을까’에 대한 원인이 소개된다. 모든 아이러니는 그녀가 실은 그다지 사악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서사를 중심으로 영화는 뮤지컬의 모든 넘버를 차례로 배치해 들려준다. 초록으로 치장된 엘파바, 그에 반해 영화에서 글린다는 금발의 분홍 요정으로 소개된다. 서사 초반에는 누구도 이 두 인물이 가까워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지만 둘은 이내 친구가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숨겨진 놀라운 자질을 끌어내는 동반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 간략하고 진부한 주제에 동의하며 관객들은 영화 <위키드>에 빠져든다. 이 영화의 원작인 1995년작 소설도 동일한 모티브를 소개하고 있다.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원작 소설이 목표하는 바는 선악의 본질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사악함’으로 간주될 무언가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뮤지컬은 원작의 키워드를 좀더 단순화한다. 원작에서 엘파바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패에 대적해서 스스로 ‘악당’이 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브로드웨이에서 그녀는 줄곧 ‘오해받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소개된다. 사실 영화 <위키드>의 내러티브가 비교적 심플한 것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와도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 뮤지컬영화에서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인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요소로 사용되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 영화들은 거친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서사가 흥미롭더라도 뮤지컬 장르의 최대 강점이 내러티브가 되기는 어렵다.
서두가 길었다. 영화관에서 <위키드>를 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러티브 전개가 무척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뮤지컬영화 수준에서 그렇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교차하면서 지속적으로 반전을 꾀한다. 이 방식이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묘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서쪽의 나쁜 마녀 엘파바가 죽는다. 남쪽의 선한 마녀 글린다가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의 축, 하지만 흥미로운 반전이 이내 드러난다. 그녀의 사악함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구원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마법사의 능력은 완전히 허구였다. 그럼에도 그의 진실이 이야기의 동력이 된다. 아무런 영적인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 기계를 조작하거나 부풀려진 무언가를 만들어냈을 뿐인 그 남자를 통해서 내러티브가 완성된다.
만일 <위키드>의 서사 구성을 <오즈의 마법사>가 지니는 농담과도 같은 대조의 방식으로 비교한다면, 이 작품이 ‘마녀’라는 키워드를 통해 노리는 예상하지 못한 관계의 창의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볼테르가 ‘새로운 비교’라고 언급한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테면 볼테르의 비교 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소개될 수 있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꽤 좋고, 얼굴도 아름답다. 그에게는 십자가의 은혜도 따른다. 당신은 그가 팔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남자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의 사실은 서로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비슷하게 인식되는 배경의 나열로 인해 우리는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평이하게 남발된 어떤 단어들이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 완전히 무방비한 고아 소녀가 만들어낸 기적, 실은 사악하지 않았던 나쁜 마녀, 그리고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운 착한 마녀의 등장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일종의 창의력 놀이처럼 <위키드>는 원작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꾸준히 변형시키고 있다. 양철나무꾼과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에 비견되는 인물들이 영화에 소환돼 이질적인 요소들과 부딪힌다. 그 결과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우리는 <위키드> 속의 아이러니한 나열 방식에서 일반적인 난센스가 가지는 현실 직시의 방식을 발견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선과 악, 그리고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영화는 끊임없이 변동하며 주제를 드러낸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제시되었고, 관객들은 그녀의 적이나 희생자에게 오히려 더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실제로 주인공의 상대방에 우리가 공감하자마자, 영화는 그 반대를 내비친다. 이 변화가 영화에서 한번의 정리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엘파바에 공감하자마자 글린다의 장점이 떠오르고, 그녀에게 반한 다음에는 왕자의 변심이 이어지는 식이다. 다행히도 160분의 러닝타임 내내 꾸준히 같은 방식이 지속되지만 단조롭지는 않다. 구도적으로 이러한 변화가 세밀하게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예상 이상으로 구성이 간결해지고, 기대 이상으로 세부가 코믹해진다. 대표적으로 아리아나 그란데가 연기하는 글린다가 머리카락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그렇다. 사소하고 불쾌해서 의아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터치를 이 작품은 끝까지 유지한다. 실제로 글린다 역할의 모든 스테레오타입은 오직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초록에 동하기 위해서 그녀는 분홍색으로 채색된다.
엘파바 역의 신시아 이리보가 부르는 <Defying Gravity>도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녀는 최종의 안정된 위치에 오른다. 애매모호한 어둠의 기슭에서 서쪽의 암흑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드라마의 시작이자 극적 행동의 마지막 단계로 자리를 옮긴다. 우리는 2부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1부의 결말이 불완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녀가 스스로 마녀가 되는 디에제틱한 힘의 결말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위키드>는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가 할 수 있는 극적 균형의 최대 감각을 유지하는 영화다. 주제의 힘과 적대자가 서로 어느 정도로 보상을 주고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적대자는 오직 주인공뿐이다. 나머지는 그 의미 생성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어느 나쁜 자의 이야기, 그녀가 지닌 아이러니함 자체로 균형에 대한 진부함이 사라진다. 악은 스스로 악이 된다. 균형이 과도해서 정체되는 듯 해결될 수 없는 이야기가 마지막의 뮤지컬 넘버에서 폭발한다. 그 순간의 반짝임, 안티히어로인 주인공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모순이 해소된다. 난센스에 가까운 이 농담은 그런 의미에서 흡족하다. 무거운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의식적이고 명확한 주제의 가능성, 할리우드의 뮤지컬영화가 보일 수 있는 최상의 가벼움이 이 속에는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