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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무리 어두운 밤이 찾아오더라도 그 밤은 고통이 아닌 기회가 될 거야”, <파라노이드 키드> 정유미 감독
이자연 사진 최성열 2024-11-07

7분 동안 이어지는 자아분열적인 이미지와 감정에 대한 진솔한 내레이션. <파라노이드 키드>는 실체 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정유미 감독은 20대 중반 그림일기로 담아낸 블로그 포스팅을 <파라노이드 키드>라는 이름의 책으로 발행했고, 그 책을 2024년 다시 단편애니메이션으로 소환했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과 인연이 깊은 그는 지난해 BIAF2023 단편애니메이션제작지원을 받아 올해에도 성실하게 관객과 함께했다.

<수학시험> <존재의 집> <파도> 등 서늘한 듯 아늑한 연필의 세계를 구현한 정유미 감독은 <먼지아이>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하고 <서클>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무려 네 번째 초청을 받았다. <연애놀이>를 완성했을 때에는 제24회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한국 최초 대상을 수상했다. 해외 영화제 진출과 수상 내역이 정유미 감독의 밀도 높은 세계를 모두 증명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대사 없이 국경을 가로지를 수 있었는지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는 감정과 경험을 조용히 꺼내드는 정유미의 힘을 다시 돌아보았다.

- <파라노이드 키드>는 한 소녀가 7분 동안 자기 내면에 자리한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을 처음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25살 즈음 블로그에 그림일기를 그린 적 있다. 그때 작은 출판사에서 블로그 포스팅을 모아 책을 내보자고 제안해주셨다. 한창 30cm짜리 작은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그 조각들을 모아 책을 냈다. 그리고 그 책에 담긴 내용을 다시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사실 각 일러스트는 일기다 보니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다. 각각 개별의 감정과 상황을 담고 있다. 언젠가 그 일기들을 묶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면서 미뤄왔는데 이번 작품으로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키드>는 동화를 많이 하지 않았다. 이미 원화가 있어서 그 위에 여러 장의 그림을 덧대기가 어려워 모션과 컷아웃 작업을 많이 했다.

- 보통 오랜 기간을 거쳐 나온 일러스트는 일러스트집으로 묶는데, 이번엔 애니메이션으로 묶었다. 기분이 어땠나.

지금까지 이 작업이 미뤄진 이유는 하나로 묶을 만한 주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작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불안’이라는 키워드가 다시금 보였고, 그제야 작업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가장 걱정했던 건 혹여나 오글거릴까봐.(웃음) 자아에 도취되어 혼자 감정 과잉처럼 보일까 걱정됐다. 이게 결국 일기인지라 대부분 나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감정들 대부분이 불편한 것들이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일기를 쓰고 나면 환기가 되지 않나. 그렇게 쏟아냈던 것들이라 더더욱 고민됐다. 10대 때부터 하나의 리듬처럼 늘 지녀온 불안과 생각들이다. 그래도 감정들이 지닌 보편성을 믿었다. 사람들이 공통되게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들은 아주 명확하다. 구체성은 다르더라도 결이 비슷하지 않나. 그래서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봐줄 거라 믿었다.

-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느슨해진 마음은 다시 조이고 삶의 통제권을 다시 찾아야 해”라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곧잘 자기 탓을 하고 자신을 통제하려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은 감정이다.

우리 모두 내면화돼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사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잔인한 말이다. 모든 문제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서 벌어졌다는 거니까. 이 불편한 감정을 인지하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사람들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단점을 어떻게든 없애려 하고 능력을 갖추기 위해 발버둥치고.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거친 시절이 있었다. 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제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파라노이드 키드>

- 내레이션을 배두나 배우가 맡았다. 배우에게도 이런 더빙 작업은 처음이었다고.

우리 프로듀서님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번 제안해보았다. 그런데 빠른 시간 안에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서 정말 신기했다. 녹음은 하루 만에 이뤄졌다. 소년과 소녀가 모두 담긴 배두나 배우의 목소리를 워낙 좋아해서 내가 상상했던 장면과 잘 맞아떨어졌다. 녹음 초반에는 배두나 배우가 많이 생경해했다. 보통 극은 명확한 상황이 있고 거기에 반응하는 대사들이 있는데 <파라노이드 키드>는 관념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그게 이전의 경험과 많이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몰입력이 원체 좋아서 금세 이입하더라. 디렉션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지만 한창 불안을 경험해나가는 어린 화자의 나이를 함께 상상해보자고 제안했다. 좀더 어린 시절로 어린 시절로 찬찬히 내렸다.

- 이번 <파라노이드 키드>는 지난해 ‘BIAF2023 단편제작지원’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최근 문화예술 분야의 제작지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단편애니메이션의 경우 제작지원이 아주 절대적이기 때문에 이런 지원 프로그램 없이 개인 작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라노이드 키드>도 BIAF의 지원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올해에는 <안경>이라는 작품의 단편제작지원을 받았다. 요즘 아주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김해김(kimhekim)이라는 브랜드와 함께 협업한 작품인데 디자이너가 프랑스에서 작업을 하다 나의 <연애놀이>를 보고 좋았다고 하시더라. SNS로 연락이 닿으면서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 정유미 감독의 주재료는 연필이다. 애니메이션 형태로서 연필이 지닌 매력은 무엇인가.

처음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애니메이션을 배우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펼쳐봐라’ 하며 시작한다. 그때 몇 백장의 그림을 그리는데 혼자 컬러링까지 감당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1인 창작자로서 연필이라면 가볍게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배경과 소품의 디테일을 더해가면서 연필만이 지닌 섬세하고 정교한 재미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연필이 지닌 정서가 참 좋다. 연필로 흑백사진처럼 묘사했을 때 느껴지는 낡고 오래되고 외로운 느낌. 연필만이 자아낼 수 있는 감수성을 살릴 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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