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0월 첫 연재를 시작한 <베르세르크>는 일본 출판사 백천사의 월간지 <월간 애니멀 하우스>에서 시작해 <영 애니멀>로 무대를 옮겼다.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 가츠에게 세상은 참혹하고 무자비하다. 자기 보호 수단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것밖에 배우지 못한 소년은 경계와 적대에 익숙하게 자란다.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 그는 우연히 목표지향적이고 자기 확신이 큰 그리피스의 부대에 들어가게 된다. 국가를 손에 넣고 싶다는 유혈낭자한 꿈에 이들은 전쟁과 오해, 지옥과 난상, 복수와 쟁취, 분노와 신의를 마주한다. 오뮤지엄에서 진행하는 <대베르세르크전 ~미우라 켄타로 화업 32년의 궤적~>(이하 <대베르세르크전>)은 원작자 미우라 겐타로의 자취를 좇는다. 폭동과 광기에 가까운 일대기에는 말초적인 재미를 넘어 30여년의 시간을 거치고도 대중의 공감을 일으키는 철학적 깊이가 담겨 있다. 한국 최초 <베르세르크> 전시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백천사 스가와라 히로후미 대표이사, 가메시마 준지 콘텐츠 비즈니스부 부차장, 도미오카 유키오 해외영업부 디렉터를 만나 이 작품이 불멸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미오카 유키오, 스가와라 히로후미, 가메시마 준지(왼쪽부터).
- 미우라 겐타로 작가의 지난 32년을 훑어보는 전시가 한국에서 열린다. 국내 <대베르세르크전> 기획 당시 백천사에서 내세운 제안이나 꼭 진행되길 바랐던 점이 있다면.
가메시마 준지 이번 전시에서는 가츠의 라이벌인 불사신 조드를 거대 조형물로 꾸리고 실물 크기의 드래곤 슬레이어, 다양한 대형 피규어 등이 마련돼 있다. 이 거대한 전시물을 한국에 그대로 가져오길 바라서 안전하게 이동시키려 공들였다. 또 도록 제작도 꼭 진행하고 싶었다. 도록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고 오직 전시회에서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버전의 리미티드를 만들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원씨아이의 도움을 받아 멋진 도록을 완성했다. 그간 쉽게 접할 수 없는 작품 소개와 이야기를 함께 담았다. 많은 <베르세르크> 마니아들이 좋아할 것 같다.
스가와라 히로후미 이전에 미우라 겐타로 작가의 일러스트집이 발매된 적 있지만 이것도 한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긴 공백 끝에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도록이 새로 발매되기 때문에 <베르세르크>의 세계를 이해하고 곱씹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도미오카 유키오 <대베르세르크전> 첫 번째 전시가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열렸다. 이케부쿠로는 일본의 만화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한국의 만화 성지인 홍대 지역에서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지역과 위치 선정에도 의미가 있다.
- <오란고교 호스트부> <후르츠 바스켓> <학원 앨리스> 등을 거쳐온 백천사에 <베르세르크>는 어떤 의미를 지닌 작품인가.
스가와라 히로후미 백천사의 얼굴. (웃음) 작품과 독자를 연결해온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베르세르크>는 백천사의 일부가 되었다.
도미오카 유키오 주로 소녀 만화를 담당했던 백천사가 <베르세르크>를 통해 새로운 장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사에서도 <베르세르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전지전능한 슈퍼스타가 등장하지만 기존 소년 만화와 다르게 세밀한 실사체로 그려졌다. 정확하고 정교한 묘사, 묵직하고 무게 있는 이야기까지 <베르세르크>는 만화 역사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 오늘 인터뷰에 동석한 유야 와시타니 펀덤 이벤트 개발 디렉터는 <베르세르크> 전시 기획의 실무를 담당했다. 작품 세계관을 공간화하는 과정에서 이것만은 꼭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다면.
유야 와시타니 전시 구성을 고민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베르세르크>에 강렬한 몰입을 유지하게 하는 건 세계관을 표현한 그림의 힘 덕분이다. 전쟁과 혈투, 지옥과 난상 등 추상적인 것들을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시각화한 장면들을 실제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전시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이 작품에는 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일식은 챕터가 전환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다. 그래서 이것을 실제 장면처럼 구현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보면 너무 무서워서 울 정도로 공포스럽고 압도적으로 현실화하고 싶었다. 정말 많은 힘을 쏟은 구간이다.
- <베르세르크>는 무수한 명대사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도망친 곳엔 낙원이 없다"는 대사가 반복해서 회자되기도 하는데. 가장 마음에 남은 <베르세르크> 명대사, 명장면을 꼽아본다면.
스가와라 히로후미 원작 초반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설명하는 문장이 있다. “그건 검이라 하기엔 너무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운, 그리고 조잡했다. 그건 말 그대로 철퇴였다.” 주인공의 힘과 설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다.
도미오카 유키오 너무 많아서 한개를 꼽기가 정말 어렵다. (웃음) “드래곤은 인간이 어쩔 수 없기에 드래곤이다.” 주인공 가츠가 맞닥뜨려온 한계를 뒤집어엎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메시마 준지 ‘단죄편’에 가츠가 이런 말을 한다. 신에게 의지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하고 싶은 일을 일궈내라고. 주변 다른 사람들이 신에게 소원을 비는 와중에 가츠는 자신의 의지와 결의에 집중한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에서 그만의 힘이 느껴진다.
- <베르세르크>가 연재되는 동안 목격한, 잊을 수 없는 대중적 풍경이나 문화현상이 있다면.
도미오카 유키오 <베르세르크> 이후 검 무기가 등장하는 게임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연상하는 거대한 검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르세르크>만의 영향이 작용했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당시 전쟁 도구로서 드래곤 슬레이어가 지닌 상징을 가늠할 수 있다.
스가와라 히로후미 <베르세르크>가 영상화될 때 화려하게 볼 수 있는 시각적 포인트가 워낙 많아서인 것 같다. 실제로 <베르세르크>가 애니메이션화됐을 때에도 새롭게 주목받았다. 이전에 책을 발매했을 때보다 더 빠르고 넓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폭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