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명의 감독과 한명의 배우.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감독과 배우 남윤수가 <씨네21> 대담 현장을 찾았다. 한 사람씩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무던한 인사가 오갔고 거실에 자연스레 둘러앉은 여느 가족처럼 한자리로 모여들었다. 지난번 촬영과 직전에 하고 온 일,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 관한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고 벽에 붙은 옛 촬영 사진 속 배우들을 맞혀보며 소소히 웃던 이들은 함께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평범한 하루를 바라는 자신들과 별다를 게 없는 인간임을 강조했다. 티빙에 10월21일 공개되는 <대도시의 사랑법>은 들이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애정에 슬피 울고 그 눈물을 재료 삼아 소설을 쓰는 서울 게이 청년 고영(남윤수)의 삶을 그린다. 이 안에 스페셜 라이프를 즐기는 대도시 퀴어 예술가는 없다. 연애, 우정, 섹스, 가족, 죽음, 미래가 떠다니는 바닷속에서 자맥질을 반복하는 이 남자를 앞뒤, 양옆, 내면에서 바라보며 그에게 씌워진 낙인, 오해, 환상을 하나씩 거둬낸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정체성은 한국영화아카데미 동문회가 아카데미 4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프로젝트라는 데 있다. 재미는 물론, 네 챕터로 알맞게 구성된 박상영 작가가 쓴 동명의 연작소설집을 8부작 시리즈로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아카데미 출신 손태겸(29기), 허진호(9기), 홍지영(14기), 김세인(34기) 감독이 차례로 2회씩 맡아 연출했다. (촬영 역시 아카데미 출신의 손진용(29기), 조영직(25기), 이석준(27기), 이진근(26기) 촬영감독이 맡았다. 원작자인 박상영 작가가 각본을, 손태겸, 김세인 감독이 각색을 담당했다.-편집자) 그리고 배우 남윤수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제작 과정과 장면 비하인드까지 두 시간 넘게 대화를 이어간 팀 <대도시의 사랑법>의 목소리는 결국 하나로 포개졌다. 이 이야기가 직진하기를, 장벽에 부딪히더라도 뚫고 뻗어나가기를.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김세인, 허진호, 남윤수, 홍지영, 손태겸(왼쪽부터).
이 사랑은 어떻게든 시작된다
- 8부작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주인공 고영을 중심으로, 대학 동기 친구 미애(이수경)와의 우정, 포토그래퍼 남규(권혁)와의 서툰 만남을 담은 <미애>(1~2화), 모자 관계와 두 번째 남자 영수(나현우)와의 관계가 맞물려 다뤄지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3~4화), 결정적 남자 규호(진호은)와의 생활을 그린 <대도시의 사랑법>(5~6화), 미스터리한 남자 하비비(김원중)의 등장과 함께 규호와의 지난날을 떠올리는 <늦은 우기의 바캉스>(7~8화)까지 이야기한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촬영하기까지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각자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자유롭게 감상을 나누는 시간부터 가졌으면 한다.
- 손태겸 에너지 넘치고 다이내믹한 시나리오라는 게 첫인상이었다. 가치 전복적이라는 점이 내게 중요했는데 우리가 자주 접하는 주류적인 남성 서사와는 분명 달랐고 같은 행동이라도 극 중 인물들이 하면 힘이 느껴졌다.
- 남윤수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그 안에 정말 많은 사랑이 있었다. 영이가 되어 그 모든 사랑을 경험하고 싶었고 내가 느꼈던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연기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배우로서 자연인으로서 많이 배우고 성장할 거라 확신했다.
- 김세인 7, 8화를 연출하며 내가 생각했던 고영의 키워드가 있다. 척추가 무너진 사람. 이를테면 영이는 코어 힘을 기르지 못한 상태로 작가가 돼서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계속 휩쓸리고 만다. 순간에 솔직하려 하지만 아직 자기 자신을 모르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
- 허진호 나는 고영이 어떤 친구라고 미리 정해놓고 가질 않았다. 해석을 열어둔 채 현장에서 배우, 스태프들과 만들어나가는 편이라 이번에도 대본에 적힌 영이의 대략적인 정보에서 출발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 대본에서 받은 좋은 느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찾아나갔다.
- 홍지영 등장인물 중 가장 공감 가는 캐릭터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고영’이라고 답했다. 내게 영이는 딱히 이해가 필요 없는 캐릭터였다. 그만큼 그가 느끼는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와닿았다. 그리고 영이는 내게 이런 사람이었다. 잘 웃는 사람, 생각보다 포기가 쉬운 사람, 끝내 쓸쓸한 사람.
- 다 함께 처음으로 만난 자리의 풍경이 궁금하다. 특히 네 감독님을 혼자 감당해야 했을 남윤수 배우는 그때를 잊지 못할 것 같다.
- 남윤수 물론이다. 골방 같은 공간을 예상하고 갔는데 실제 미팅룸은 너무 컸다. 널찍한 테이블에 모두 둘러앉아 계신 데서 오는 압도감에 좀 쭈뼛대며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 손태겸 그날 윤수 배우가 눈물을 흘렸다.
- 남윤수 원작, 전회 대본까지 다 읽고 갔지만 오디션까지는 아니었고 대화하는 분위기라 솔직하게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원래 거짓말을 싫어하고 그럴듯하게 꾸며낼 줄 모른다.
- 손태겸 윤수 배우가 밝고 잘 웃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차분하고 어둑한 면이 있었다. 연출자로서 그런 차이가 연기적으로 발현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 허진호 나 역시 밝은 가운데 어떤 무게를 느꼈고 그가 연기 시작한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뭐랄까, 배우 같았다. 태도나 생각에서 이 친구는 좋은 연기자가 되겠다, 같이 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 김세인 눈물 흘리다가 금세 빵긋 웃는 얼굴이 내게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자기감정의 높낮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에서 영이를 보았고 그때부턴 이미 내겐 윤수 배우가 영이었다.
- 홍지영 나는 그렇게까지 바로는 아니었다. (웃음) 그렇지만 윤수 배우에 대한 호감이 예전부터 있었다. <인간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배우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사람이 매력적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상태가 좋았고 이제 뭐든 만들어내야 하는 고영 캐릭터에 제격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작업을 끝낸 지금, 배우 남윤수의 가장 큰 장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마어마한 몰입력. 감독이 그 어떤 옷을 입히든 그 룩 안에 맞는 감정을 끌어낸다.
- 손태겸 공감한다. 짧은 시간이 주어져도 신에 걸맞은 연기를 해내고 상대 액션에 맞춰 시시각각 변화를 주니까 보는 동안 재밌고 다음엔 어떤 걸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 남윤수 배우는 연기하기 힘들 때마다 오늘 들었던 감독님들의 멘트를 떠올리면 힘이 솟지 않을까 싶다. 한 작품을 여러 연출자와 만드는 낯선 작업 방식은 어땠나. 이제 좀 친해졌나 싶을 때쯤 바뀌어 힘들었을 것 같다.
- 남윤수 팀제이기 때문에 파트마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스태프 전체가 바뀌었다. 그래서 작품 4개를 한 것 같다. 바뀔 때마다 집안 기류 같은 것도 함께 달라지니까 매번 첫날이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이 작품을 하는 동안 내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빠른 적응이었고 그건 감독님들도 비슷하셨을 것 같다. 한 인물의 20살 무렵부터 30대 초반까지를 혼자 책임지는 만큼 전체적인 나이의 곡선 같은 걸 생각해두었다. 어리고 통통 튀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갈수록 그 느낌을 빼고 어른스러움을 채우려고 했다.
우리가 함께 만든 장면들, 반드시 세상에 나와야 하는 이야기
- 개별적으로도 이야기해보자. 손태겸 감독의 <미애>에서 영이 남규에게 호감을 느낀 시작점은 클럽에서 둘이 시선을 오래 교환했을 때일까. 이미 남규는 영과 포토그래퍼와 모델로 처음 만난 촬영장에서부터 영에게 끌린 걸로 보인다. 영의 ‘백원어치 웃음’에 말이다.
- 손태겸 영 본인은 알지 못한 어떤 끌림이 이미 촬영장에서부터 있었고 다음 클럽 신에서 감정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그 신을 운명적인 만남처럼 보이게끔 시도했다. 이어지는 카페 신에서 확신, 남산공원 신에서 완성에 다다르는 감정의 단계를 염두에 두었다. ‘백원어치 웃음’이 들어간 그 신은 이후 둘 사이가 궁금해지게끔 텐션 있게 가자고 손진용 촬영감독과 계획했다. 무조건 자연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창문에 해가 걸리는 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 윤수 배우에게 ‘이니스프리 광고처럼 웃어야 한다’라고 지나가는 말로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해줬다. (웃음)
- 영에게 미애는 어떤 친구일까.
- 남윤수 친구보단 가족에 가깝지 않을까.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다. 오래 함께 살다가 미애가 결혼으로 집을 떠나게 됐을 때 영은 같이 자라온 형제가 다 커서 독립하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처음부터 영은 자기 여자친구들이랑 안 놀고 혼자 게이 클럽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미애를 보고 미애가 자기 과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을 거다. ‘최미애. 너도 나처럼 무리에서 배제된 사람이구나’ 하고.
- 손태겸 바로 다음날 둘이 강의실에서 다시 만나는 신이 내가 굉장히 재밌어하는 신이다. 시험 보는 학생들로 가득한 큰 공간에서, 미애를 곁눈질하는 영이만이 유일하게 알아챈다. 미애가 섬 같은 애고, 자신과 같은 결핍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만큼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대사 없이도 잘 드러났으면 했다.
- 허진호 감독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엔딩의 여운이 모두 길었다. 3화 엔딩에서 영과 영수가 이은하의 <안녕, 여보세요>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데 혹시 즉흥이었나. 남윤수 배우가 아주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튕길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 허진호 어땠지, 윤수야? 대본에 있었나? 현장에서 추자고 했나?
- 남윤수 감독님, 원래는 그게 형(나현우)이 노래를 틀고 있으면 제가 형을 뒤에서 안고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감독님이랑 형, 나 셋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하다가… 춤추는 걸로 바뀌었네. 손가락은, 둘이 안고 돌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어쩌다 보니.
- 허진호 그래서 영수 엉덩이에 손도 대고. (웃음)- 4화 엔딩은 영과 말기암 환자인 엄마(오현경)의 공원 대화 신이었다. 영이 동성 친구와 입 맞추는 걸 본 엄마가 영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사건 이후 생겼던 모자 사이의 앙금이 이 장면에서 풀리는 듯했다.
- 허진호 내 파트의 끝부분이라 감정적으로 마무리를 해주고 싶었다. 모자가 서로를 조금은 받아들이고 상처 가득한 과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해피 엔딩이었으면 했다.
- 남윤수 영도 엄마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서로를 이해하기로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가 내게는 “영수가 없어도 엄마가 사라져도 괜찮을 거다. 영이 너는 계속 살아갈 수 있어”라는 말처럼 들렸다.
- 영수에게 배신당한 영이 다량의 약을 삼키는 신은 카메라를 멀리서 고정한 상태에서 롱테이크로 찍었다. 어떤 의도였나.
- 허진호 첫째로는 시간 부족으로 빠르게 찍어야만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둘째로 그 신은 가깝게 들어가서 보여주는 신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드라마 장르 호흡상 컷 없이 쭉 가는 게 지루하게 느껴질까봐 고민했지만 죽음을 결심할 만큼 벼랑 끝에 몰린 영이의 감정을 잘 좇아간다면 충분히 견딜 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 홍지영 감독의 5, 6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전체 제목과 같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방점이 찍힌 파트다. 카일리(영이 자신이 감염된 HIV에 붙인 별명)와, 잊을 수 없는 남자 규호가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영이 규호에게 카일리에 대해 털어놓는 낙산공원 밤 신을 찍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나. 추위로 빨개진 두 배우의 귀를 보면서 고생스러운 현장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 홍지영 배우들 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날 새벽이 정말 추웠고 그 앞뒤 신이 빡빡해서 힘들었다.
- 남윤수 하필 그날 여름용 운동화를 신어서 발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촘촘하지 않은 메시 사이로 찬바람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던지!
- 홍지영 그럼에도 천우신조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눈이 근사하게 와줘서다. 그리고 여기서 윤수 배우가 정말 잘해줬다. 아주 긴 대사에, 무게감을 너무 싣지 않으면서도 쓸쓸하고 애처로운 고영스러움을 살려야 하는 어려운 신이었는데 몇 테이크 만에 내가 딱 원하는 정도의 톤을 만들어줬다. 찍기 전에 걱정돼서 윤수 배우에게 따로 연락했던 기억이 난다. 전화해서 내가 그랬다. “윤수야, 100번 읽고 와~.” 그런데 진짜 100번 읽었니?
- 남윤수 그 이상이죠, 잠드는 순간까지 외웠습니다. (웃음) 규호에게 카일리에 대해 고백할 때 편하게 내 얘길 들려주는 느낌으로 연기했고 울지 않았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 홍지영 그 해석이 맞는 게 우는 건 규호 몫이니까. 규호는 대신 울어줄 수 있는, 영에게 큰 의미가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규호가 우는 신은 넣어도 영이 우는 신은 다 뺐다.
- 태국으로 여행 간 영과 규호가 클럽에서 서로 안고 있는 부감숏이 포스터로 쓰였다. 두 사람이 둘만의 우주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전해졌다.
- 홍지영 마지막 촬영이라 배우들이 감정이 진실하게 폭발해서 어떻게 다독해야하나 걱정을 좀 했었다. 특히 호은 배우가 찍기 시작할 때부터 오열했다.
- 남윤수 감독님, (손사래를 치며) 저는 안 울었는데요!
- 홍지영 그래, 윤수 얜 또 잘 빠져나온다. 아무튼 태국 파트는 행복의 정점으로 그려지길 바랐다.
남윤수만이 할 수 있는 일, 남윤수여서 가능한 장면
- 김세인 감독은 태국 파트를 어떻게 담고 싶었나.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영은 하비비를 따라 태국에 갔지만 규호와의 태국 여행을 내내 떠올리고 이 파트에서 규호와의 관계가 재해석된다.
- 김세인 태국이 비가 막 내리다가도 갑자기 해가 쨍하게 뜬다. 그런 변화무쌍한 날씨에 맞춰 영과 규호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모두에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는 영과 규호가 다리에 대자로 누워버리는 장면이 공통으로 들어갔다. 두 신의 톤이 사뭇 다른데 홍지영, 김세인 감독 각자의 연출 방향이 궁금하다.
- 홍지영 그 신에서 규호가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고 외친다. 딱 그 마음으로 호쾌하게 연출했다. 그리고 그 대사는 원래 어느 일상 신에서 포함됐었는데 어쩐지 나는 대사의 위치가 거기가 아닌 것만 같았다. 좀더 결정적인 타이밍에 나왔으면 싶어서 고민하다가 태국에서 소화했다. 두 번째 천우신조의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신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여지는 쌍무지개는 놀랍게도 실제다.
- 김세인 영과 규호의 태국 여행은 역포물선 구조, 그중 다리 신은 가장 아래에서 탁 짚고 올라가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시들었던 관계를 다시금 살려보겠다는 이들의 의지가 느껴졌으면 했고 그런 의미에서 규호가 영의 찌푸린 눈썹을 손으로 천천히 펴주는 순간이 중요했다. 아마도 규호는 연인의 삶에 생긴 구김살 전체를 다 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거고 그 작은 터치에 담긴 진심을 영도 알아챘을 거다.
- 그럼 남윤수 배우는 하루에 다리 신 두개를 소화한 건가.
- 남윤수 맞다. 오전에 홍지영 감독님 신, 오후에 김세인 감독님 신을 찍었다.
- 김세인 빛 반사 때문에 윤수 배우의 온몸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돼서 정말 미안하고 안타깝고 그랬다.
- 남윤수 복숭아뼈며 어디며 다 부어서 그날 밤 신 찍을 때 서 있질 못했다. 내 성격에 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이 악물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마지막 촬영이기도 했으니까.
-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하비비와 영의 호텔 계단에서의 숨바꼭질 시퀀스는 작품이 공개된 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섹시한 신으로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작에는 없는데 어떻게 만들었나.
- 김세인 우선 현장에서는 ‘여기가 몇층이지? 우리 몇층 발, 몇층 손 찍었나?’ 하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닌 기억밖에 없다. (웃음) 하비비가 영에게 하는, 방콕에 같이 가자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 나올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그 시퀀스가 나오게 됐다. 둘 다 뛰어다니느라 지쳐버렸고 경계 태세는 풀렸고 그러면서도 섹슈얼한 긴장감은 살아 있는 그 타이밍에 결정적 한마디가 나오면 좋겠다 싶었다.
-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메인스트림 플랫폼(티빙)에서 퀴어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중 드라마가 공개되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의 참여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지 묻고 싶다.
- 홍지영 <키친> <결혼전야> <새해전야> 같은 이성 커플이 여럿 등장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오면서 퀴어를 한번도 다루지 않았다는 마음의 짐이 있었다. 그런 만큼 <대도시의 사랑법>은 오히려 내게 와주어서 고마운 작품이었고 하는 동안 제대로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 손태겸 퀴어 단편과 다큐멘터리를 찍어봤기 때문에 내용적인 접근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다. 큰 규모의 상업드라마 연출이 처음이라 외부적인 부담이 컸다. 오래전 김조광수 감독님이 “정체성으로 타자화되는 구간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앞으로 그런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이 만들어지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있다.
- 김세인 원작과 박상영 작가의 열렬한 팬이라 연출 제안이 들어왔을 때 속으로 그랬다. ‘엄청 열심히 할 테니까 제발 시켜만 주세요.’ 그런데 하는 동안 두려움이 밀려왔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잘못 다루는 부분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런 고민을 작가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냥 해!” (웃음) 그 얘길 듣는 순간 ‘이렇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하는 게 이 이야기의 본래 성질과 맞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노’였다. 그때부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재밌게 하자는 마인드로 임했다.
- 허진호 책을 읽고 상당히 좋았다. 그게 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퀴어 장르를 많이 접해보지 못해서 이후에 어떻게 접근할까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뒤따랐는데 공간 헌팅을 다니면서 정리가 꽤 됐다. 이성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 이렇게 구별하지 말자. 이 시선으로 담자. 그런데 고민이 무색하게 현장에 가니 해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영이 연애하는 장면을 실제로 찍는데 예전 내 영화 속 이성간의 연애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다를 게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