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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 소란이 삶에서 벌어져도”,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 배우 옥주현
정재현 2024-10-24

만인의 연인. 큰 결점 없이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는 인사에게 붙는 상찬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필 ‘만인’의 연인이라, 무성한 뒷소문이 쉽게 번지고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인이 멋대로 지은 새장 안에 갇히길 요구받는다.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 엘리자베트 또한 만인의 연인이었다. 손꼽히는 미모와 관습을 따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황실과의 갈등과 지나친 사치로 인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평생 오르내린 셀러브리티였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황후 엘리자베트의 일대기를 재편한 작품이다. 엘리자베트를 암살한 루이지 루케니가 극의 안팎을 오가는 해설자가 돼 엘리자베트에게 조소를 보내고, 엘리자베트는 남성배우로 의인화된 죽음에 반발하고 이끌리며 자유를 열망한다. 햇수로 19년째 뮤지컬 배우로 활동 중인 옥주현은 2012년 <엘리자벳>의 한국 초연부터 모든 시즌에 엘리자베트 황후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2024년, 옥주현은 <엘리자벳>의 한국 10주년 기념 공연을 녹화한 실황 영화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의 주연배우로 다시 한번 황후 엘리자베트가 돼 관객 앞에 나선다.

- 공연의 미학은 매일 고유한 퍼포먼스를 관객과 무대 위 배우가 일회적으로 공유하는 현장성에 있다. 뮤지컬 실황을 녹화한 후 이를 영화관에서 상연한다는 제의가 어떻게 다가왔나.

감사한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공연은 무대 위 연기자와 관객이 순간을 간직하는 장르다. 박물관 전시장에 박제돼 진열된 명작과 달리, 살아 있는 마스터피스를 공연마다 사력을 다해 선보이는 일이 내 매일의 임무다. 이번 영화도 분명 최선은 다했지만, 솔직히 나의 마스터피스가 담겼다고 자부하긴 어렵다. 서울 공연 이후의 지방 투어 공연을 녹화한 터라 오케스트라가 아닌 MR 반주로 구성된 영상이란 점도 아쉽다. 그래도 이번 기획을 통해 10주년 <엘리자벳> 이외의 공연도 앞으로 영상 기록으로 남길 기회가 생길 것 같아 좋다.

- 처음 <엘리자벳>을 연기했을 때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관한 기록을 함께 찾아봤다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받았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엘리자벳>의 미하엘 쿤체 극작가가 다이애나와 엘리자베트의 유사성을 다룬 기사가 유럽에서 자주 보도됐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다이애나에 관한 기록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시대와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걸 다 누릴 순 없지 않나. 갈망하는 가치를 전부 손에 쥘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생의 굴레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자문하는 일은 200여년 전 엘리자베트에게도, 30여년 전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또 오랫동안 공인으로 노출된 내 입장도 캐릭터에 자연히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 <엘리자벳>의 스토리는 엘리자베트가 직접 발화하는 자신의 처지와 해설자인 루케니와 앙상블들이 비아냥대며 조롱하는 엘리자베트의 도상이 양립하는 구조로 짜여 있다. 다른 캐릭터의 대사로 정립한 엘리자베트의 면모도 있나.

루케니의 말이 다 맞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면 속상하다. (웃음)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 가장 마음 아픈 넘버가 루케니의 넘버인 <키치>다. “진실도 거짓도 꿈도 현실도 모두 싸구려”라는 <키치>의 가사를 들을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든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게 정말 진실일까. 마음을 다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굳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과 필요가 다 무슨 의미일까 싶다. 소문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의미가 생길 뿐이란 생각도 하고.

- 엘리자베트에 관한 기록이나 극 중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대사엔 언제나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다.

사료에 의하면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한 나이는 결혼 이후다. 그는 소녀일 때도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색깔의 옷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원작인 독일 뮤지컬을 봐도 처음 엘리자베트가 바트이슐에서 요제프 황제를 만날 때 한국 공연과 달리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는다. 엘리자베트는 입궁 전 하인들과 어울려 놀 정도로 계급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여성이 황후가 돼 때 빼고 광내자 새로운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이때 엘리자베트 본인도 어딜 가든 이목을 끄는 자신의 미모가 외교에 적극 활용될 수 있는 권력임을 깨닫는다. 이전까지 황실에서 무력하던 엘리자베트가 처음 영향력을 갖는 순간이다. 자신의 수완을 인지한 엘리자베트는 이후 권력을 쥐기 위해 스스로를 가꾸기 시작한다.

- 엘리자베트와 죽음은 평생 서로에게 강한 매혹을 느낀다. 남성으로 의인화된 죽음은 한동안 엘리자베트의 눈에만 보이는 추상적 존재로, 로맨스, 동경, 절대적 이상 등 다양한 해석을 입힐 수 있다. 지난 10년간 엘리자베트를 연기하며 죽음을 대하는 해석이 달라지기도 했나.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 시즌 같았다. 엘리자베트의 사망 이후 그가 쓴 일기와 시가 세상에 공개됐다. 엘리자베트의 글엔 죽음에 대한 관심과 도취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어떤 결정도 마음대로 할 수 없던 황후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죽음에 관한 상상이었다. 그 글이 뮤지컬 <엘리자벳>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엘리자베트의 입장에서 죽음은 이성애의 대상인 남성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원초적으로 갈망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 <엘리자벳>을 기점으로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와 <레베카> <마리 앙투아네트> <베토벤> 등의 작품에서 협업했다. 르베이의 음악은 배우 옥주현에게 어떤 자극을 주나.

르베이와의 만남은 운명 같다. <레베카>를 포함해 내 배우 인생의 가장 큰 선을 만들어준 작곡가 중 한분이니까. <엘리자벳>의 초연을 올리기 전 르베이의 집을 방문한 적 있다. 국가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음악가라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궁전에 살고 있는데, 당시 르베이가 경매를 통해 구입한 엘리자베트의 부채도 들어봤다. 정말 무거웠다. 그 부채를 들자마자 엘리자베트의 기류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르베이가 <나는 나만의 것>을 작곡한 스폿도 봤다. 드넓은 정원이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를 때면 언제나 그 정원을 눈에 담는다.

- <나는 나만의 것>은 <엘리자벳>의 대표 넘버다. 이 곡을 극 중 넘버로 부를 때와 갈라 콘서트 등 행사에서 부를 때 감정이 다를 것 같은데.

사실 행사에서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르는 게 조심스럽다. 서사 없이 불러도 괜찮은 넘버도 있는데, <나는 나만의 것>은 단발성으로 부르자니 물과 기름처럼 감정이 부대낀다.

-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무대 위에서 수많은 무거운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연기한다. 복잡한 무대와 의상이 연기에 도움을 주나.

쳇바퀴 굴러가듯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삶이 무대 위 세트로 표현돼 있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무대에서 바닥을 보지 않는다’가 내 연기 원칙 중 하나다. 내가 회전무대의 올바른 위치에 착지하려는 이유로 바닥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자연히 내 시선을 따라 바닥을 볼 수밖에 없다. 정신병원에서 회전무대와 계단 구조물을 오가는 <아무것도>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는 허무에 사로잡힌 엘리자베트가 무얼 이루려 일생을 살아왔는지를 질문하는 넘버다. 눈으로 오로지 이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지 않는다. 여기엔 비밀이 하나 있다. 계단 난간에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그러면 계단을 내려다보지 않고도 눈으로는 계속 연기를 할 수 있고, 테이프가 만져질 때면 여기가 마지막 계단이고 이후엔 구름다리 위를 걸을 거란 계획이 선다. 이런 식으로 회전무대를 돌다 계단을 만나기까지의 모든 걸음 수와 각도를 사전에 계획해둔 채 무대에 오른다. <아무것도>를 부를 땐 연기자인 나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스스로의 삶을 향해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 내가 <엘리자벳>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다.

- <엘리자벳>이 옥주현의 연기나 노래에 끼친 영향이 있다면.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줬다. 앞서 언급한 <키치>의 가사가 그렇다.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 소란이 삶에서 벌어져도, 이에 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보다 세상엔 다양한 담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먼저 인정하게 됐다.

- 걸 그룹 핑클의 메인보컬을 포함해 오랫동안 가수로 활동했다. 한동안 배우와 가수 활동을 병행했는데 요새는 신곡 발매보단 음악 경연 프로그램 출연에 주력하는 듯한 인상이다. 가수 컴백 계획도 있나.

한동안은 가수 활동에 큰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다시 가수로서 신곡을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노래를 받고 싶은 몇몇 작곡가들에게 이미 내 마음을 프러포즈해두었다. 그동안 직접 작사한 곡들도 꽤 된다. 신곡을 내고 이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주기가 내가 한창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과 많이 달라져서 걱정도 되는데,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으려 한다. 깊은 생각은 한참 전에 충분히 마쳤으니까. (웃음) 가수로서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됐으면 한다.

- 배우로든 보컬리스트로든 자연인으로든 지금 옥주현이 가장 몰두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조망할 수 있는 시야 내에서 최고의 최선을 다하고 싶다. 다행히 예전에 비해선 무얼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 답을 아는 상태다. 그 답에 도달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고, 그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려면 자신을 관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미생> (2014)의 명대사,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처럼 자기 관리를 위해선 무조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귀찮은 건 좋은 거야’라는 일념 아래 살지만, 솔직히 귀찮은 일이 어떻게 좋을 수 있나. 하지만 귀찮게 여기는 일을 반복할수록 내일의 나는 어제보다 향상될 수 있다는 진리는 변치 않는다. 나와 타협하지 않겠다.

옥주현이 말하는 <엘리자벳: 더 뮤지컬 라이브>의 명장면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촬영팀이 <엘리자벳>을 수차례 관람한 뒤 촬영 포인트를 잡았다. 그럼에도 촬영팀이 무대 위 배우들이 공연 전후로 받았던 디렉션을 전부 알진 못하지 않나. 첫 시사를 마친 후 강조됐으면 하는 연출 포인트와 배우의 디테일을 영화 제작사에 전달했다. 다행히 상영본엔 각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잘 담겼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을 다룬 넘버 <질문들은 던져졌다–리프라이즈> 장면에 주목하길 권한다. 요제프와 루케니가 엘리자베트를 두고 결투하고, 죽음이 루케니에게 엘리자베트를 암살할 도구를 건넨다. 이때 죽음의 ‘지금이야’와 함께 넘버의 조성이 바뀌고, 그 가사를 기점으로 끝없는 혼돈 속에 기진한 엘리자베트가 마침내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은 요제프의 악몽이다. 제국의 쇠망과 암살 위기에 처한 아내,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행복을 찾은 아내를 모두 보는 장면이다. 포인트를 모두 살린 재편집본을 보니 작품의 디테일이 새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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