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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비밀의 그늘 뒤에서, <대도시의 사랑법> 배우 노상현
이유채 2024-10-10

<대도시의 사랑법>의 불문학도 흥수(노상현)는 비밀이 있는 남자다. 게이라는 걸 숨기고 살다가 별종 취급받는 동기 재희(김고은)에게 들킨 뒤 전전긍긍의 시간을 겪지만 걱정과 달리 그가 한편이 돼주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여전히 엄마 명숙(장혜진)은 남자를 좋아하는 아들의 병이 낫길 바라며 교회를 찾고, 소설가라는 꿈은 요원하지만 흥수는 재희가 허리에 둘러준 동아줄에 힘입어 살기 싫은 세상을 하루 더 살아보자 매일 결심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엔 노상현의 색다른 얼굴이 담겼다. 어슴푸레한 전등 아래에서도 생에 대한 의지로 늘 맑은 빛을 냈던 <파친코>의 이삭과 달리 흥수는 클럽의 휘황한 조명을 듬뿍 받아도 그늘져 있다. 인물의 근원을 찾아들어가 거기서부터 캐릭터 구축을 시작한다는 노상현은 긴 시간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웠던 인간의 어둑한 심연으로 먼저 발을 옮겼다.

- 미디어에서 흔히 표현되는 스트레오타입의 게이로 흥수를 표현하지 않아 신중하게 캐릭터에 접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초반부터 그런 전형성을 피하는 걸 방향으로 잡았다. 게이 하면 떠오르는 특징적인 제스처나 말투를 쓴다면 흥수가 인위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고 담백하고 현실적인 영화의 톤 앤드 매너와도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작품 준비를 하며 만난 성소수자들의 취향이 제각기 달라 공통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 그래서 흥수라는 개인이 더 잘 드러나더라.

시나리오를 읽으며 내가 관심 있었던 건 오랫동안 자신을 감춰왔던 흥수의 고립감과 답답함, 비밀을 들키지 않고자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아오면서 형성된 시니컬한 성격과 방어적인 태도였다. 그토록 경직된 흥수가 재희 앞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다 꺼낸다. 그렇게 복잡미묘한 인물을 생생히 묘사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실제 촬영에 들어갔을 때 무채색의 단정한 차림에서 가죽 재킷과 주얼리로 스타일링에 차이를 주고 재희와 있을 때만 나오는 흥수의 풀어진 표정과 움직임을 고민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 중산층 집안의 헤테로섹슈얼이자 부모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재희와 달리 흥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소설가 지망생이자 법적 결혼의 기회가 없다. 서로 다른 만큼 흥수가 재희에게 느끼는 감정은 복잡한데 둘의 우정을 어떻게 해석했나.

애증. (웃음) 흥수가 재희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도 많고 같이 사는 동안 안 맞는 점을 숱하게 발견해서 서로 티격태격한다. 동시에 특별하고 발전적인 관계다. 이 점이 중요한데 흥수에게 재희는 자신을 그 자체로서 인정해준 유일한 존재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란 말을 재희에게 들었을 때 흥수는 부정당한 지난 세월이 한번에 인정받은 느낌이 들면서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뺏겼을 거다. 흥수는 처음부터 재희가 자신처럼 결핍 있는 인간이란 걸 눈치채고 동질감을 느낀다.

- 흥수와 명숙 모자 관계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10대 시절 흥수가 남학생과 입 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명숙이 그날 일을 못 본 척하면서 둘 사이에 벽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흥수에게 불안한 상태가 기본이 된 건 엄마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보여준 부정적인 반응들은 흥수에게 ‘내가 뭘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했을 거다. 그럼에도 흥수는 엄마가 엄마이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다. 엄마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던 흥수는 재희를 만난 뒤 용기를 낸다.

- 복분자주 신의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끝이 코믹인 걸 알면서도 심각한 감정선을 잘 유지하더라.

개인적으로 정말 중요하다고 여긴 신이었다. 끝이 어떻든 그 신의 주된 감정은 ‘엄마가 죽었다’였다. 그 감정이 확실하게 전달돼야 복분자주의 킥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놀라고 슬프고 유해졌다가 엄마의 마음을 발견하면서 따뜻해지는 일련의 흐름이 이들 모자 관계에 있어 결정적 지점으로 느껴져 신경 써서 준비했다.

- 극 후반, 지나간 사랑인 수호(정휘)를 떠올리며 ‘보고 싶다’는 감정을 털어놓는 신도 흥수의 결정적인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사랑 앞에서 진정으로 솔직해지는 순간이다.

어려웠다. 재희와 함께 대소동을 치른 뒤라 좀 풀어진 상태인데 진지한 감정을 갑자기 내놔야 했으니까. 나는 진짜 어렵겠다 싶은 신들은 현장에 맡기는 편이다. 슛 들어가는 그 순간에 나 오는 그 감정을 믿고 간다.

- <파친코> 시즌2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돌아온 이삭이 죽는 장면은 충격이 컸다. 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남은 시간이 몇분 남지 않은 사람을 연기할 때 어떤 심정인가.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그 장면만 떠올리면 눈물이 나려고 한다. 시즌2는 5일에 걸쳐 찍었는데 줄곧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마음이었다. 이별의 감정은 이삭이 죽는 신을 찍던 내 마지막 촬영날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날은 오전이었고 3~4시간에 걸쳐 테이크를 많이 갔는데도 매번 같은 강도와 크기로 감정이 올라와 신기했다.

- 흥수의 삶의 궤적이 자신의 그것과 얼마나 같고 다르다고 느끼나.

비슷한 쪽이다. 20대 초중반에 나 역시 세상과 자신에 대해 한창 알아가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대 진학을 생각하다 막판에 비즈니즈에 호기심이 생겨 경영학을 전공했다. 관심은 모델 일로 옮겨갔고 그 시기에 류승범 배우의 어떤 장면을 보았다. 배우가 인물 그 자체였고 그때 처음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 연기에 눈뜬 순간에 대해 들으니 데뷔작 <오늘도 형제는 평화롭다>의 이윤, 최근작 <사운드트랙 #2>의 지수호 등 필모그래피에 지질하고 코믹한 캐릭터가 은근히 많은 이유가 풀렸다.

사실 그런 게 재밌다. 정말 리얼해서 웃기고 그래서 짠함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 말이다. 관객으로서든 배우로서든 현실성을 우선으로 두고 개연성을 완성도의 척도로 여긴다.

- 차기작 <다 이루어질지니>는 굉장한 판타지다.

그래서 와이어도 자주 타고 CG도 상당하다. (웃음) 도전할 타이밍이라 여겨 선택했다. 한창 촬영 중인데 상상력을 발휘해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의외로 재밌더라. 아무래도 자신을 평생 발견해나가는 게 인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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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