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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초인의 기세, <돌풍> 설경구
김소미 2024-07-11

<돌풍> 앞에서 배우 설경구는 두개의 질문과 씨름했다. 대기업과 손잡은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에 환멸을 느낀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는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대의 아래 대통령을 시해한다. 코마 상태에 빠진 대통령 대신 권한대행에게 주어진 기간 동안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 거침없는 남자를 두고 설경구는 우선 물어야 했다. “이런 사람이 정말 현실에 존재할까?” <추적자 THE CHASER> <펀치> 등을 쓴 박경수 작가의 뼈 있는 염원이 반영된 첫 번째 질문 뒤에 자연스럽게 뒤따른 배우의 고민은 이랬다. 신념과 명분에만 의지해 정치권에 자기 생을 투신하는 캐릭터를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매체 데뷔 30여년 만에 선보이는 첫 드라마 주연작이자 넷플릭스 시리즈인 <돌풍>을 두고, 세간은 그에게 달라진 산업 환경과 커리어의 전략에 관한 물음을 던지지만 설경구의 대답은 언제나 간명하다. “박동호를 그답게 만들기 위해선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계산 없이 밀어붙이는 힘만이 필요했다”고.

- 완성된 <돌풍>을 봤나. 평소 영화 모니터링도 힘겹게 한다고 알고 있다. 12부작 보기가 쉽지 않았겠다.로 인해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관련해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 아직 전혀 보지 못했다. 출연작을 보게 되면 내 모습, 내 목소리만 들려서 그게 참 괴롭다. 2시간 안팎의 영화엔 그나마 익숙해져 있는데 이건 12부작이니까 작품이 플랫폼에 공개되면 천천히 보려고 한다.

- 1994년 방영된 MBC 드라마 로 매체에 데뷔했다. 약 30년 만에 첫 주연작 <돌풍>이 나왔는데, 신인 시절에 드라마 현장을 경험하고 긴 시간이 흘러 돌아오니 무엇이 다르던가.

= 박경수 작가의 힘 있는 책, 그 속의 인물들, 그리고 “빨리 결정하라”고 강력 추천하는 김희애 배우의 영향이 컸다. 드라마 현장의 메커니즘은 워낙 빠른 속도로 막 치고 나가야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 터라 나도 모르게 생긴 공포나 선입견 같은 게 있었다. 물론 옛날 얘기지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으로 덜컥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까 (김)홍파 형이 전화 와서 “너 진짜 하는 거냐”고 묻더라. 알고 보니 촬영, 조명감독님을 비롯해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도 영화할 때 같이 작업했던 식구들이 많이 합류한 상태였다. 막상 촬영장에 가서는 그동안 왜 드라마를 진작 안 했나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노동시간이 정확히 지켜지는 환경을 보면서 ‘7박9일간 쉬지 않고 찍는다’는 무용담이 옛말이란 걸 체감했고 스케줄도 무척 효율적으로 구성해서 한달에 15일 정도 촬영하는 식이었다. 딱 하나 영화와 큰 차이는 밥 먹는 거. 밥차가 없고 식사 시간이 되면 차 끌고 따로 식당에 밥 먹으러 가야 하는 게 처음엔 아쉬웠다. 리듬을 깨지 말고 유지하고 싶은 배우로서의 바람도 있고 그 시간에 한신이라도 더 찍자 싶어서. 지금도 중간에 끊고 밥 먹는 시간은 절대 1시간을 넘기지 말자는 주의다. <돌풍>에서 경험한 뒤 <하이프 나이퍼>(설경구의 차기 드라마 주연작) 때는 내가 건의해서 밥차를 도입했다. (웃음)

- 기자간담회에서 박경수 작가는 <돌풍>을 “몰락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박동호를 “초인”으로 설명했다. 몰락하는 초인의 서사를 한 사람의 독자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나.

= <돌풍>은 악인조차 안쓰러운 비극이다. 내게 박동호는 위험천만한 신념을 향해 자기를 밀어붙인 뒤,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끝내 산화하는 인간이다. 정수진(김희애)은 자기 남편이 박동호였어야 하는데 운명이 그렇지 못했으니 스스로가 나섰고 결국 부패한다. 상대역이자 관객으로서 순수했던 정수진이 타락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박동호와 정수진 모두 권력욕이 큰데, 박동호의 권력욕이 세상을 뒤엎기 위해 필요한 힘이자 도구라면 정수진의 권력욕은 탐하고 싶은 무언가라는 차이가 있겠다. 그러니까 박동호는 현실적인 캐릭터라기보다 어떤 면에선 우리의 판타지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를 질문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연기해야 정말 살아 있는 인간처럼 보일까?’

- 박동호는 오직 이상과 포부로 움직이는 인간형이고 때로 관념이 형상화된 인물 같기도 하다. 배우가 자기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일상적인 핍진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기하기 용이한 경우는 아닌데 어떤 식으로 접근했나.

= 책에 적힌 이 인물의 위험한 신념과 욕망. 그것에만 의지해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계산을 하거나 접근하면 할수록 잡생각이 들 뿐이다. 시청자 눈에도 그게 보일뿐더러 무엇보다 박동호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라고 봤다. <돌풍>은 우직하게 주어진 숙제를 내가 푸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꾀 안 부리고 했던 것 같다.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은 박동호처럼 나 역시 꾸역꾸역 어떻게든 진심으로 앞으로 움직였다.

- 어조와 제스처도 힘 있고 담백하게 처리했다.

= 온갖 적이 주변에 산적해 있는 인물이다. 무조건 저돌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아니, 쓸어버린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대사의 방향성도 그렇게 잡았다. 한마디로 기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캐릭터인데 12부작을 그렇게 끌고 간다는 게 때로 물리적, 체력적으로 쉽지 않더라. 중간에 한번은 방향을 좀 바꿔볼까 싶기는 했는데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 박동호는 문자 그대로 신념을 위해 투신한다. 그의 마지막 선택에 동의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 후련하던데! (웃음) 그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동호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을지 몰라도 설경구는 나도 모르게 와이어를 붙잡게 되더라. 특히 뒤로 떨어지는 설정이라 순간적으로 더욱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 감독만큼 작가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려고도 했나.

= 나로서는 <돌풍>을 하면서 그 부분이 배움이었다. 작품 초반까지는 현장에서 작가님과 커뮤니케이션할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슬슬 적응을 하면서 현장 모니터를 보고 스스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어서 일찌감치 후시도 필요하겠구나 직감했다. 1회부터 12회까지 전부 다 재점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감독님, 작가님과 매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 때문에 작가님이 일찌감치 촬영본을 다 보고 피드백을 줬고 그로부터 엄청난 힘을 얻었다. 우리 담당 CP(스튜디오드래곤)는 현장과 후시 차이가 1% 더 좋아진 정도라고 했는데, 회마다 1%씩 좋아진다면 결국 12%나 좋아지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녹음을 모두 끝내고 같이 고생해준 작가님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거듭 말씀드렸다. 작품이 다 공개되고 나서 아쉬움에 얼굴 후끈거리는 것보다 어떻게든 조금 더 바로잡고 수습하는 게 내 방식이다.

- <킹메이커> <야차> <유령> <더 문> <길복순> 그리고 <돌풍>까지, 리더와 책임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들을 연기하고 있다.

= 전부 역할들일 뿐인데 특별한 소회는 없다. 다만 세월이 쌓였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매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내게 분명한 것은 모든 캐릭터가 언제나 처음 만날 때 똑같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 새 역할을 받아들이는 배우의 ‘불편함’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 그러니까 나와 캐릭터를 맞춰가는 과정은 언제까지나 불편해야만 한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조금씩 그 불편함을 줄여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다 끝났다고 완전히 맞춰지는 것도 아니다. 새 옷에 적응하는 과정은 필연적이다.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된다.

- 인물의 진정성에 다가가기 위해 매번 정면으로 부딪치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 물론 어려울 때는 거짓말도 하게 된다. 나 역시 ‘하는 척’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연기에 노하우가 쌓인다는 걸 믿지 않는다. 스스로 진실하지 않게 반응해놓고 어떻게 관객이 믿어주길 기대할 수 있을까. <오아시스> 촬영 때인데, 너무 안돼서 그냥 하느라고 했다. 그래도 나름 괜찮게 나온 것 같았다. 이창동 감독님도 오케이하셨다. 그런데 감독님이 잠시 후 조용히 다가오셔서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이대로 붙여도 별 문제 없겠다 하시더니 마지막에 담담히 이렇게 덧붙이셨다. “전혀 문제는 없는데, 너랑 나랑은 거짓말하지 말자.” 그날 이후로 모면하는 연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 설경구와 김희애. 두 베테랑 배우가 최근에서야 세번 연달아 만났다. 촬영 순서대로 차례로 <더 문> <보통의 가족> <돌풍>이다.

= <더 문>에선 실제로 얼굴을 못 본 채로 벽 보고 전화했고, <보통의 가족>은 식탁에 마주 앉아 치고받는 대사가 많은 영화지만 김희애 배우와 나는 서로 제수씨, 아주버님 하는 관계라 설정상 서로 거리감이 있다. <돌풍>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싸우기 시작한 거다. (웃음) 애드리브 하나 비집고 들어갈 자리 없는 굉장히 밀도 높은 책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에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인 관계라 현장에서도 각자 차분히 집중했다.

- 설정들이 복합적이긴 하지만 몇몇 특질로 인해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관련해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 꼭 염두에 두고 쓰지 않더라도 모든 작가는 시대의 잠재의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특히 정치드라마를 볼 때 누군가가 연상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 아닐까. 나는 오히려 그런 자유로운 연상과 논의 속에서 <돌풍>이 문제작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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