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의 소설은 직구로 승부하는 투수를 닮았다. 감정의 속도는 느슨해지는 법이 없고, 팽팽한 긴장감은 한여름의 정오처럼 뜨겁고 맹렬하다. 역주행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구의 증명> 리커버부터 절판된 뒤 중고책 가격이 치솟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의 개정판인 <원도>, 제주 이주 이후 제주를 무대로 한 첫 소설인 단편 <오로라>를 비롯해 최근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작품들이 두루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 치열함에 있으리라. 장편을 주로 겨울에 집중해 쓴다는 그의 여름은 단편소설, 에세이, 강연을 비롯한 행사와 야구로 가득 차 있다. 응원팀인 한화 이글스가 연패를 벗어난 날, 소설가 최진영을 만나 소설와 소설 쓰기에 대해 들었다.
- 2022년부터 제주도에 살기 시작했다. 사는 장소가 바뀌면 글에도 영향이 있나.
=영향이 없지 않은데 그렇다고 큰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내 방에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내 방이라는 공간이 중요해서 그 공간만 확보되면 글을 쓸 수는 있는데, 산책하러 나갔을 때 보이는 풍경들이 워낙 다르니까 소설에 반영된다. <오로라>에서 겨울바람을 가로지르며 나는 새 같은 모습은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고.
- 최진영 작가의 소설을 읽는 재미는, 주인공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복잡한 자기 인식에 있는 것 같다. 자기 연민이 가혹할 정도로 없고… 죽지 않고 살아갈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사건보다 캐릭터의 내면이 더 흥미롭고.
=소설을 쓸 때 재미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쫓아가고 싶은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오로라>도 주인공의 사랑과 배신을 사건으로 보여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이 여자가 생각하는 사랑과 믿음과 배신에 대한 사유의 흐름에 집중하고 싶었다. 거짓말에서 느낀 자유, 믿음이란 단어에 깃든 이기심.
- 2013년에 발표한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를 <원도>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했다.
=문장을 많이 뺐다. 원고지 수십장 정도를 덜어냈다.
- <원도>를 보면서 <구의 증명>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더라. <원도>를 긴 시간이 지나 독자의 눈으로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을 텐데.
=<원도>를 읽으면서 <구의 증명>을 떠올렸다면… 그 정서가 당시 나의 정서였기 때문이다. 활활 불타오르듯 엄청난 열기를 가진 원도와 (<구의 증명>의) 구, 담의 에너지가 있는데, <원도>를 다시 보니 옛날 일기장을 들춰본 기분이었다. 내가 원고를 쭉 읽으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들이 “비장하다, 이렇게까지 썼어야 했어?”였다. “그래, 너가 힘들었다는 건 알겠어.”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 시기 나를 짓누르고 장악하던 무거운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한편으로는 “그때 나는 이런 글쓰기를 했구나”를 알게 되기도 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글쓰기. 지금 같으면 같은 글을 써도 두배로 에너지가 들 텐데 그 시기에는 절반의 힘으로 해냈을 것 같더라. 그 집요한 글쓰기를 떠올리면서 지금 나의 글쓰기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집요하고, 야성적이고, 비장하고, 자기 혼자 세상 다 산 것 같은 느낌이었다. 10년 전엔 그랬지, 하고.
- 2023년 <구의 증명>이 역주행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사건은 사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셀럽이 추천한 것도 아니었는데 역주행을 했고, 10대, 20대 독자들이 많이 읽었다.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나.
=실제로 청소년 독자들이 많다.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지금 그렇게 쓰라고 하면 못 쓸 것 같은 그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젊은 독자들에게 맞는 거다. 두 번째는, <구의 증명>은 어쨌든 사랑 이야기인데, 요즘이 연애하기 어렵다고들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든 사회 범죄적인 이유든 연애를 하기보다 연애 예능으로 대체하지 않나. 그런데 사랑하기 어렵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사랑을 하고 싶다는 얘기 아닐까.
- <구의 증명>은 지금까지 20만부 정도 팔렸다. 역주행해서 이렇게 판매된 게 작가 입장에서도 미스터리였을 것 같다. 요즘 식으로 쿨한 태도가 아니라, 이 소설의 절박함이 매력적으로 다가간 거 아닐까 생각했다.
=<구의 증명>을 쓸 때는 사랑이랑 한번 싸워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랑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끌어내리고, 비참하게 하고,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사랑을 해봅시다”라고 하면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구와 담의 이야기를 쫓아가며 글을 썼다. 담이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라는 말을 했을 때 “그래, 나도 항복” 했었다. 그런 소설을 썼기 때문에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사랑을 나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 독자들의 반응을 보기도 했나.=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뉜다. “난 이런 사랑하고 싶다.” vs “난 이건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런 걸 보고 “까와 빠를 다 미치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성공하는 콘텐츠가 된다고도.
=<구의 증명>을 읽고 “이게 무슨 베스트셀러야”, “이게 무슨 소설이야”라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글에 댓글을 다는 독자들이 있다. “<구의 증명>이 취향이 아니면 <내가 되는 꿈>을 읽으세요”하고. 또 어떤 분은 <구의 증명>만으로 최진영을 평가할 수 없는데, <구의 증명>이 최진영의 대표작이 되어서 너무 안타깝다더라.
- <해가 지는 곳으로>는 아포칼립스 설정이다. 아포칼립스물을 써보고 싶어서 시작한 이야기인가.
=“퀴어 커플 이야기을 써야겠다”에서 시작했다. 도리와 지나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퀴어 커플로 쓰자니 차별과 혐오의 발언들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았고, 한국 땅이 좁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드넓은 러시아 대륙으로 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아포칼립스라는 설정이 들어왔다. 동일한 재난으로 모두가 불행해진 조건이라면 이들의 사랑에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죽음이 인물의 행동을 촉발하는 초기의 사건, 정보값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건의 절정 부분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갈등을 해소하는 죽음이 아니라 촉발하는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작가가 죽음을 가까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삶이 디폴트다. 근데 그건 너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아닐까. 내가 죽을 수도 있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자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죽지 않았지” 하고 묻게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은 내가 굉장히 강렬하게 삶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을 생각하는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또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소설을 쓸 때는 독자들에게 ‘이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를 먼저 보여주고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먹는 이야기다”(<구의 증명>)를 초반에 보여주고, 퀴어 커플을 먼저 보여주고(<해가 지는 곳으로>), 역순으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끔 하는 쪽을 선호한다.
- <내가 되는 꿈>에서는 성인인 태희하고 10대인 태희가 편지를 주고받는다. 성인인 태희는 10대인 태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도, 상대의 인생을 더 편한 쪽으로 바꾸려고 하질 않는다. 신기하고 독특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결국은 성인인 태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소설이니까 쓸 수 있는 장치들을 쓰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과거의 나와 현재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다(<내가 되는 꿈>), 느닷없는 바이러스로 갑자기 러시아로 간다(<해가 지는 곳으로>), 나무인지 신인지 모르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단 한 사람>). 이런 것은 소설이니까 가능한 장치다. 이런 설정이 흥미를 유발하는 원동력은 되는데 소설에서 절대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살아가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내가 되는 꿈>에서도 서로의 마음에는 힘을 줄지언정 서로의 현실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내게 가장 중요했다. 지금 자신에게 실망하는 감정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내가 불행하길 원하지 않는 마음을 담아서 썼다.
- 소설이니까 쓸 수 있는 설정의 소설들 사이에서 <이제야 언니에게>는 온전히 사실적인 이야기다.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10대 제야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난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전작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소설을 쓴 경험이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그렇다. 그 소설을 쓸 때 실제로 제야가 내 옆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야가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주저앉아 있던 제야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까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 내가 옆에 있고 싶었다. 제야에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되는 꿈>에서와 같은 설정을 어떻게 해도 넣을 수 없었다. 제야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테니까.
- 자신이 쓴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 것 같다.=뭘 알고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쓰면서 알아간다. 그래서 한편의 소설을 끝내고 나면 또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소설을 썼으니까 이젠 이렇게 살아봐야지 하고 조금씩 몸을 틀어보는 것 같다.
- 소설을 쓸 때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쓴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소설을 시작할 때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이야기 구조는 엉성하게 설계하고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짜면 짤수록 내가 괴로워진다는 걸 알아서. 구상한 대로 이야기가 절대 흘러가지 않는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를 공부하는데 그 자료가 소설에 쓰이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소설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위해 자료도 보는 거다. 인물 설정에는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끌어나갈 수 있도록.
- 캐릭터를 어디까지 세공한 뒤 소설을 시작하나.=인물이 가진 정서에 집중하는 편이다. <구의 증명>을 예로 들면 담이 가진 정서, 담이 가진 마음의 코어를 우선시한다. 담은 절절한,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는 동시에 고집이 상당해서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밀고 나가는 성격이다. 그런 인물이 가진 정서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그건 내가 갖고 있는 정서이기도 하고. 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다 비슷비슷한 면이 있다. 비슷한 성정의 인물들이 다른 사건에 놓이는 거다. 주인공의 성격은 나와 유사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성격은 다양하게 만들어놓는 편이다.
- 당신에게 스토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내 소설에서는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미 전달이 중요하고 정서가 중요하고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지가 중요하다. 스토리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벨트 같은 것이 아닐까. 길을 잃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퇴고할 때도 그 부분에 집중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불필요한 것들을 다 제거하기. 무의미한 것들 다 제거하기.
-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소설을 쓴다고 들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어떻게 판단하나.
=“이렇게 끝난다고?” 하는 독자들이 꽤 있다. 내게는 할 얘기는 다 했다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 이후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몫이고 소설 밖에서 진행될 일이지 내가 여기서 뭘 더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 꽉 닫힌 결말 좋다는, 열린 결말 싫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뭔가를 더 쓰는 게 무의미하다라고 느껴지는 지점에서 멈춘다.
- <작가의 루틴>에 보면 계약도 청탁도 없이 독자도 없이 글을 쓰던 시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나에게 글쓰기가 필요했다. 감정을 해소하거나 시간을 보내거나 표현하기 위해서 “글이 너무 필요해”의 시기가 있었다. 글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글이 내게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2015년에 <구의 증명>을 낸 직후에는 초판도 나가지 않았다. 그때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쓰기를 멈췄다면 <구의 증명>의 역주행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지금의 글이 또 언젠가 나를 비춰주겠지 생각하고 있다.
- 쓰고 싶은 소설과 쓸 수 있는 소설의 간극이 큰 편이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쓰고 싶은 소설은 어떤 것인가.
=진짜 멋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앤 카슨이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같은 작가들처럼. 언젠가는 아니 에르노처럼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결국 못 쓸 수도 있다. 쓸 수 있는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은 비슷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