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함께 임기를 시작해 올해 공동집행위원장 2년차를 맞이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를 만났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 뇌과학자와 환경재단의 20년 역사를 몸소 살펴온 임원이 힘을 합쳐 영화제 안팎의 살림살이를 든든히 책임지는 중이다. 환경영화가 지닌 힘을 말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굳건했다. “세상에 환경문제가 아닌 문제는 없음을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증가” (이미경)하고, 영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해진 장르와 스펙트럼” (정재승)이 돋보이는 올해.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이제 관객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 정재승 교수는 2022년 에코프렌즈에 이어 지난 해부터 공동집행위원장이 됐다.
정재승 이명세 집행위원장님 시절에 처음 에코프렌즈로 초대받았을 땐 그저 즐거운 마음이었고, 집행위원장직 제안을 받고는 과학자들이 환경 이슈에서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역할을 도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임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조직위에는 오히려 영화인이 적고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이 참여 중이다. 영화라는 미디어의 형식을 빌려 다양한 맥락에서 환경 이슈를 전달하는 장이 서울국제환경영화제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에 열정만 많았지 집행위원장의 직무에 대해 잘 모르고 시작한 듯싶다. (웃음) 한해 경험하고 나니 각각의 행사가 가지는 의미를 더욱 깊이 알게 되고 책임감도 그만큼 무거워졌다.
이미경 재단 차원에서 정재승 교수님이 공동집행위원장에 적역이라 판단한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교수님은 카이스트 재학 시절에 직접 영화제를 만든 이력이 있다. 그리고 ‘10월의 하늘’이라는 전국 도서관 프로젝트도 놀랍다. 과학자들이 도서관에 가서 무료로 강연하는 프로그램을 14년째 하고 계시잖나! 앞으로 이런 것을 우리 영화제가 배우고 따라가려고 한다. 과학자인 동시에 셀러브리티인 정재승 교수님을 통해 환경영화제가 오직 영화인을 위한 행사는 아니라는 점도 보여주고 싶다. 영화제에 따라오는 일종의 편견이나 장벽을 없애고 싶다.
정재승 얘기를 들으니 떠오르는데, 내가 <씨네21>에서 했던 첫 인터뷰가 카이스트의 SF영화제 건이었다. 그땐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미래, 환경, 디스토피아 등을 주제로 처음 동아리 영화제를 열었는데 <씨네21>에서 취재를 온 거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SF는 곧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그리는 마니아적 하위문화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SF는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극단적 형태의 우화인데 다만 미래시제를 빌려 이야기할 뿐이다. 환경에 관해 가장 꾸준히 이야기해온 장르가 SF이니, 따지고보면 나도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환경영화에 스스로를 노출해온 셈이다.
- 이미경 환경재단 대표는 그동안 재단과 영화제의 역사를 함께해왔다. 공동집행위원장 임기 2년차에 달리 보이는 것이 있나.
이미경 재단의 사업부에서 초창기에 마주한 어려움은 환경영화제라는 컨셉 자체가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왔던 점이다. 환경이 먼저냐, 영화가 먼저냐. 도대체 ‘환경영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두 가지가 언제나 질문거리였다. 지금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환경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편수와 다양성 면에서 확실한 증가세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올해 운영상의 어려움이 따른 것은 사실이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고취하는 교육적 기능이 뚜렷한 영화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환경이라는 어젠다 자체를 문제적으로 본 것인지, 환경부에서 지원받던 일부 예산이 모두 날아갔다. 과거에도 적자가 심해서 이사회에서는 영화제 지속을 고민했다. 그러나 대중과 이토록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매체는 드물다는 점에서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 최근 2~3년 내에 이룬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미경 2020년부터 디지털 상영을 병행하면서 관람객이 10배 이상 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정부가 영화제를 금할 때도 우리는 온라인 상영관 준비를 다 마쳤으니 그대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우리에겐 디지털화가 중요한 분기점이다. 지난해 관객수는 온오프라인 합쳐 총 84만명에 육박했다.
- 전체 프로그램을 아울러 볼 때 동시대의 환경영화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이미경 장르적 다양성의 측면과 더불어 창작자의 시선 자체가 유연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환경영화라고 하면 자본에 대한 공격과 투쟁을 기조로 한 반기업적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개인의 영역을 내밀하게 파고드는 작품들이 늘어났다. 이를테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만 해도 기존의 거주민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적인 영역까지 카메라가 향한다. 이런 변화에는 환경 위기가 결국 인류 전체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깃들어 있다. 과거엔 단순히 쓰레기가 얼마나 환경를 파괴하는지, 지구의 온도가 몇도 올라가는지를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훨씬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이 향한다. 산호가 다 죽으면 근처의 어업이 망가져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그것이 곧 내전과 국가간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세상에 환경문제가 아닌 문제가 점점 더 드물어지는 것이다.
- 환경문제를 영화로 전할 때 어떤 힘이 있다고 보나.정재승 예술은 인간을 직관적으로 건드린다. 메시지가 심장을 바로 관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북유럽에서 ‘예술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전시가 열린 적 있다. 나는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말이나 글로 전파하는 것보다 영화 한편이 훨씬 강력하고 빠른 속도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계몽적인 색채가 강했던 환경영화들이 이제 재미 면에서도 손색없다라는 점도 반갑게 느껴진다.
- 기후 우울, 무력감 등도 사회적인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뇌과학자로서 환경영화가 10대, 20대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리라고 내다보나.
정재승 과학계의 오랜 가설 중에 ‘바이오필리아 가설’이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도 자연에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신체기능이 향상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희한하게 나이 들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 즉 자연이나 도시의 공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행동은 인간 유전자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무엇이란 얘기다. 그런 한편 아이들하고 여행을 해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건 주로 어른들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느낀다.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현실적으로 10대, 20대가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문 것 같다. 그러니 아직까지 인지적으로 자연에 관심이 없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나이가 들수록 그들 자신이 자연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리란 사실을 영화로 일찍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감성적이고 뭉클한 분위기 속에서 경각심을 불어넣는 것이 영화인데, 이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공동집행위원장의 PICK
정재승 교수의 <화이트 플라스틱 스카이> / 에코패밀리
“이 영화로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다. 2123년 부다페스트가 배경인 영화다. 사람이 50년쯤 살고 나면 지구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기 위해 나무가 되는 이야기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지구 표면 전체에 골고루 서식하면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서식지를 개조한 유일한 종이다. 현대 과학의 핵심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추적하는 일이다. 기록 언어를 가진 유일한 종이기에 문화 공진화 가설이 대표적이다. <화이트 플라스틱 스카이>는 그런 인간이 미래에 기후 위기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는지 신선한 설정으로 보여준다.”
이미경 대표의 <기후재판 3.0> / ESG: 자본주의 대전환“작품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프로그램 노트를 참고해달라. 나는 현실의 사례와 빗대어 이 영화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역사적으로 기업을 상대로 한 환경 소송이 승소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승리의 이야기다. 최근엔 스위스의 할머니들이 유럽인권재판소에 정부가 탄소 감축에 너무 소홀하다는 이유로 소송을 냈고 결국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에선 청소년들이 석탄 회사에 소송을 내 최근 1심에서 이긴 판례도 나왔다. 엄청난 변화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엔 국내 첫 기후 소송에 고등학생 청구인이 참가했고, 엄마 뱃속에서 태명으로 기후 소송의 청구인에 이름을 올렸다가 태어난 지 17개월차에 헌법재판소에 동행한 갓난아이의 사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