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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수사반장 1958>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는 것, 최불암 x 이제훈 인터뷰
김소미 2024-04-25

- 두분의 첫 만남은 <수사반장 1958> 대본 리딩 현장인 거죠.

이제훈 네, 그렇긴 하지만 제게 선생님은 TV에서 수없이 봐온 분이라 그때가 처음인 것 같지가 않네요.

최불암 제훈이를 작품 속에서 처음 본 건 드라마 <시그널>이었지요. 그때 아주 인상적이었거든. 형사물이라 관심이 가서 챙겨봤는데 제훈이가 눈에 확 띄더군요.

- <수사반장>의 경력이 형사물에 대한 애정을 만든 걸까요.

최불암 아무래도 그렇지요. 특히 <시그널> 때는 더 궁금했어요. 요즘의 젊은 형사들은 어떤 직업의식을 갖고서 맡은 바를 해내고 있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모범택시>는 재미로 봤고요. 그래도 역시 제훈이가 자신을 전부를 털어낸 건 이번 작품일 겁니다. (웃음)

이제훈 하하, 감사합니다 선생님.

- 이야기 나온 것처럼 이제훈 배우는 앞서 <시그널>과 <모범택시>로 수사극 신드롬 속에 있었고, 범죄를 타도하는 캐릭터로서의 이미지가 겹치지는 않을까 고민했을 법도 한데요. <수사반장 1958>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제훈 만 18년간 8 80회차를 이어간 <수사반장>에 대한 경외감이 컸어요.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리고 박 반장 하면 형사의 표본으로서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노련한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가 완성형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고 싶다는 시청자로서의 바람도 있었어요. 연륜이 생기기 이전의 박영한. 그러니까 오직 패기로 충만한 젊은 박영한을 보면서 최불암 선생님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고요. MBC에서 프리퀄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고민 없이 덤벼들었습니다.

최불암 나는 20세기의 반장이고 <수사반장 1958>은 21세기의 해석이니까 추억은 묻어둡시다. 제훈이가 자기 몸이라는 도구로 새 인간형을 창출해야 하는데 선배인 나의 존재가 걸리적거리지 않았기만 바라요.

- 아직도 회자되는 <수사반장>의 굳건한 전통에 부합하면서도 이제훈만의 해석을 더하는 일. 참 쉽지 않았겠습니다.

이제훈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최불암이라는 대배우의 모습을 따라하고 있더라고요. 한다고 잘되지도 않았고요. 확고한 존재감을 지녔던 캐릭터를 시간이 흘러 다시 표현하는 작업이 저에겐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비슷해질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그것은 결국 되지 않는 일이구나’를 깨달았어요.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나만의 길을 찾는 것에 추진력이 생겼고요. 이후로 오히려 <수사반장> 속 선생님의 모습을 더 열심히 연구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박 반장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바꿨거든요. 피해자는 물론이고 범죄자의 숨은 사연까지도 헤아리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닮고 싶었습니다.

- 사실 최불암 배우의 젊은 시절 역할로 배우 이제훈을 낙점했다는 것 자체로 타입캐스팅은 아닌 거지요.

최불암 그래요, 난 젊은 시절에도 이 친구처럼 잘생기지 않았었다고. (웃음) 학교 다닐 때는 연출 공부를 했어요. 연극에서 노역을 맡은 친구가 잘하질 못해서 내가 옆에서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대신 보여줬더니, 지켜보던 선생이 ‘그냥 네가 하는 게 낫겠다’ 해서 갑자기 무대에 서게 된 거요. 그렇게 배우가 된 거거든. 그러니까 일찍부터 노역쪽으로 전력을 다했지요. <수사반장> 시작에서부터 머리에 흰 칠도 얹고 메이크업으로 주름도 아주 굵게 넣었어요.

- 31살의 최불암 배우가 50대의 수사반장을 맡아 함께 나이 들어갔다면, 1984년생인 이제훈 배우는 <수사반장 1958>에서 박영한의 팔팔한 청춘 시절을 맡은 것도 재밌습니다. 경기도 소도둑 검거율 1위로 황천지사에서 활약하던 박영한이 종남경찰서 수사1반에 전근 오면서 시작되는 드라마죠. 청년 박영한은 어떤 모습으로 담겼을까요.

이제훈 프리퀄의 매력은 우리가 아는, 이미 완성된 사람이 성숙해지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성장이라고 봤어요. 표면적으로는 이 친구가 왜 경찰이 되었고 어떤 사건을 거쳐 종남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세명의 동료를 만나 어떻게 단단히 뭉치게 되었는지도 보여주죠. 박영한도 언젠가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을 텐데 그런 개인적인 서사도 드러나고요. 시골에서 올라온 박영한이 그 시절 반장님을 통해 양복을 처음 입어보는 모습도 나옵니다. 넥타이에 핀도 꽂고, 그러다 트렌치코트까지 가게 되죠.

최불암 내가 처음 수사반장을 연기할 때 박영한은 반장이니까 무조건 넥타이를 매고 젠틀맨답게, 형사의 권위를 지키는 복장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좀 편하게 잠바 같은 걸 입어본 적도 없지요. 사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경찰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거든요. 그런데 <수사반장>의 효과인지 이후로는 형사들이 누구 집을 찾으면 ‘수사관님,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하고 반겨준다는 겁니다 글쎄. 옛날에는 대문 밖에 세워두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이미지를 쇄신해보려고 열심히 양복을 입은 것이 통했고, 여러 이유로 연애나 결혼하기가 참 어렵다던 형사들이 결혼하는 속도도 빨라졌다고 하더라고.

- 박 반장만큼이나 김 형사(김상순), 조 형사(조경환), 서 형사(김호정), 그리고 남 형사(남성훈)의 개성과 팀워크도 큰 호감을 샀던 드라마지요. 배우들의 실제 본명과 특징이 모두 캐릭터에 선명하게 반영된 경우였습니다. <수사반장 1958>에선 어떻습니까.

이제훈 <수사반장>의 네 형사야말로 앙상블의 효과를 보여준 거죠. 티키타카 의견을 주고받고 반장이 지시를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요. 이번 드라마에선 젊은 경환(최우성)과 호정(윤현수)이 형사라는 직업에 입문하는 과정이 나와요. 영한과 상순(이동휘)이 초보인 이들을 잘 이끌어가는 모습이 대본에도 써 있죠. 동시에 저는 오리지널 <수사반장>처럼 각 캐릭터가 분명한 자기 의견을 내는 모습이 잘 비쳤으면 해서 작가님께 부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박영한의 상징성이 있으니 아무래도 제게 대사를 많이 할애해주셨는데, 형사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선 모든 캐릭터가 좀더 풍성하게 주고받기식으로 이야기했으면 한다고요. 더 똘똘 뭉쳐서 활달한 그림이 나온 것 같아서 좋습니다.

- <수사반장 1958> 1화에 최불암 배우가 직접 등장합니다. 이제훈 배우는 1958년의 박영한에 더해 현대의 박영한(최불암)의 손자 역할도 맡은 거지요?

이제훈 네, <수사반장> 이후 은퇴한 박영한 반장의 모습으로 선생님이 등장하세요.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데 그의 손자도 경찰이 된 거죠. <수사반장 1958>의 첫화와 마지막화에 최불암 선생님이 나와요. 특히 마지막쯤에는 박영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정말 뭉클해져요.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와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배우의 얼굴 하나로 모두 설명이 되는데, 캐릭터의 역사뿐 아니라 최불암 선생님의 존재가 그 자체로 감격스럽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 자랑하게 될 것 같아요.

최불암 나로서는 박 반장이 어떻게 늙었나 그게 제일 중요했지요. 사회를 위해서 가족들 다 희생시켜서, 내가 보기엔 전부 잃어버리고 홀로 사는 사람이에요. 왜 옛날에 신문도 팔고 버스표도 파는 구멍가게들 있잖아요? 은퇴하고 조용히 거기 들어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수사반장 1958>에선 약간 규모를 더 키워서 슈퍼마켓 정도로 이름을 붙여주더라고. 그래봤자 아주 낡고 작은 가게고 손자가 거길 찾아오는 내용이죠. 내가 한 애드리브가 ‘밥 먹었냐’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 밥 못 먹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우리 시절 걱정이 나한테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야.

-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드라마 <기분 좋은 날>(2014) 이후 10년 만입니다. 어떠셨어요?

최불암 김성훈 감독님이 아주 성실한 사람이에요. 내가 걸어들어와서 가게 안에 걸린 작은 거울을 보는 짧은 신인데 조명부터 카메라를 아주 세세하게 보면서 7번인가를 찍더라고. 믿음이 갔지요. 배우로 촬영장에 있어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내가 스스로 느낀 것보다도 아주 기력을 쓴 모양이에요. 대전에서 첫 촬영을 마치고 여의도 집까지 가는데 2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미동도 없이 자다가 깬 거야. <한국인의 밥상> 촬영하러 왕복 7~8시간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도 그런 적은 잘 없는데 말이에요.

수사반장의 시대

- 처음에 이제훈 배우에게 했던 질문을 최불암 선생님께도 드리고 싶어요. 1967년에 KBS 드라마 <수양대군>으로 매체 데뷔한 지 4년 만에 <수사반장>의 전설을 열었습니다. 30대 초반의 배우에게 당시로서의 고민은 무엇이었습니까.

최불암 그 나이에 50대의 베테랑 형사를 연기한다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감히 내가 수사반장을 할 수 있나 하는 책임감이 무겁긴 했지요. 그러나 내게는 확실한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수사반장 박영한에게서 한국적인 인간상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어요. 연극계 선배인 연극연출가 허규 선생과 우리 두 사람의 당대 과제로서 늘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미국에 카우보이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가 있는데 한국의 정신은 어떤 인물들을 통해 표현할 수 있냐는 거죠. 물론 1971년부터 박영한의 상(像)이 완전히 섰던 것은 아니고 세월을 거쳐가면서 나로서도 점차 깨달아간 거지만. 연극 공부를 할 때 일본에 건너간 적이 있는데, 일제의 탄압만 생각하다가 그들이 고도의 미래를 향해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엄청나게 충격적이더군요. 그게 힘들어서 그때 내가 잠시 죽으려고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첫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제훈 <수사반장 1958>에도 비상식이 통용되는 야만적인 시대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선생님. 그 시절에 못 살고 못 먹는 사람들도 많은데 영한은 시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범인을 단순히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더라고요. 그들이 죗값을 치르고 나와서 다시 형사를 찾아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모습은 요즘 드라마에선 정말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최불암 그것이 비극이고 또 인간애지. <수사반장>의 눈물나는 구석도 전부 그런 장면이었어.

- 지금 돌아보기에 <수사반장>의 저력이 무엇이었다고 보세요.

최불암 중요한 게 ‘수사실화극’이라는 거거든. 재판 끝나고 처벌도 다 내려진 다음에 우리한테 대본이 온 거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작품을 할 때 즈음엔 조금 떨어져서 현상을 봐야만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러니 자연히 사회문제로 연결됩니다. 돈 때문에 생긴 범죄라면 왜 그렇게 돈이 필요했느냐 또 물어야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돈 때문에 자기 멸시를 하게 된 것은 아닌지 건드릴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혼자 생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다 같이 둘러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했다고. 기본 전제는 출연자들이 가족 같았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MBC 연기자라고 하면 탤런트실의 100명이 다 식구예요. 화합이 되니까 작품의 테마를 같이 독해하고 서로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요점을 찾아내지요. <수사반장>이 사랑받았던 것은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그걸 자기 얘기로 여겼기 때문이에요.

- 시대적 아이콘인 인물을 완성하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었는지요.

최불암 어머니가 주점을 했는데(최불암 배우의 어머니가 운영한 은성주점은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전혜린, 천상병 등 1960년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던 명동의 아지트였다.-편집자), 손님들이 <수사반장>을 보고 요즘 말로는 모니터링이란 걸 해준 셈이죠. 지금은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잘 보면 박 반장이 초반에는 계속 바뀌어간다고. 처음에는 와이셔츠 위에 권총도 차고 뒤에 수갑도 달고, 선글라스도 멋있게 끼고 나옵니다. 첫째는 내 호기심 때문이고 둘째는 약간 오버 액션으로 힘이 들어간 겁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오려니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도구를 쓴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누구를 쏘려고 총을 차고 다니며, 그 수갑은 은팔찌냐?’ 하시더라고. 배우가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눈을 가리고 나오지 말라고도 하셨고. 나중에 자문받으려고 최종락 총경을 만났더니 진짜로 가벼운 몸으로 다니시더라고. 과장을 덜어내는 법을 그때 배웠습니다.

- 햇수로 19년을 <수사반장>에 출연하는 동안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 작업도 열심히 하셨고요, <전원일기>도 198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케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최불암 그러니 힘들어서 1980년 정도부터는 영화계를 떠났지요.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같이하면서 내 모든 것을 두 드라마에 쏟은 거죠. 그전까지는 기자님 말마따나 영화도 많이 찍었습니다. <수사반장>은 초창기 방영본은 보존되지 않아서 이젠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게 참 안타깝지요. 그런데 영화는 오래 남아요. 매력적인 분야죠.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엔 영화배우들 사정이 훨씬 어려웠는데 나로서는 나 한 사람이 빠짐으로 인해 누구 하나라도 더 배역을 얻을 테니 그게 기뻤어요. <전원일기> 시작할 때의 내 기쁨은 그거였지요.

- <수사반장 1958>을 앞두고 <다큐플렉스: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에서도 두분이 함께 이야기하셨죠. 옛날에 최불암 선생님이 하루의 촬영을 마치면 동료들과 ‘이제 불 끄러 가자’ 하고 막걸리 한잔 걸치러 나갔다는 이야기가 기억나는데요.

최불암 진짜로 잔술 하나에 달궈졌던 가슴에서 치치치칙,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나요. 숯불에다가 물 붓는 것 같지요. 결국 자신을 조금 쉬게 만드는 방편이었던 거죠. 많이 마시게 되면 조금 속상했던 거고 경쾌하게 마시면 가뿐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때는 내가 맡은 역할, 공무원의 심정에 크게 이입해서 속 타는 일도 잦았던 게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정신적 갈증을 달래주는 거니까 이러나 저러나 끝나고 술맛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작품이야. (웃음)

- 세월이 흘러서 가족 같은 <수사반장>의 동료들이 대부분 고인이 되셨습니다.

최불암 우리 수사관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은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테니 이쯤 이야기하고, 나는 우리 여성 순경들 이야기를 좀 덧붙일까 해요. (바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며) 여기 내가 늘 차고 다니는 노트에 우리 여순경들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닌다고. 이름을 안 잊어버리려고. <수사반장>으로 데뷔한 고 김영애를 시작으로 염복순, 고 안옥희, 고 이금복, 고 김화란, 오미희, 이휘향, 윤경숙, 노경주. 이 9명의 이름들을 꼭 적어주시오. 여기도 반은 떠났지. 나한테 무슨 원죄가 있는 게 아닌가, 참 이상합니다. 왜 나만 남겨두고…. <수사반장 1958>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는데, 무덤에서 우리 옛 동료들한테 이야기하는 꿈을 내가 실제로도 꿉니다. 이 모든 게 다 꿈 같기도 하고요.

인간, 그리고 배우의 조건

- 김기영 감독의 <파계> 속 고승, <달려라 만석아>의 시골 아버지, <영자의 전성시대>의 목욕탕 김씨, 무엇보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속 황바우로 보건대 최불암 배우가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도 인간애를 전하는 캐릭터가 많았습니다. 장르물이 많은 요즘에는 찾기 힘들지만, 공교롭게도 이제훈 배우에게도 그런 면모가 보여요. <박열> <아이 캔 스피크>, 그리고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가 있죠.

이제훈 제가 연기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로이거든요.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떤 특질을 갖게 되는지, 그 속에서도 동일한 인간의 조건 같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에 끌립니다. 그냥 성향이고 본능인데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 속에 내가 담겨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무려 최불암 선생님과 연결될 수 있어 기쁘네요.

최불암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20세기의 것이 된 것 같아, 이젠 아무도 안 쓰는 것 같고. 낡은 소리 같지만 매체가 발달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인간성에 대해 더 잘 다뤄줬으면 해요. 그런 의미에서 <수사반장>만큼이나 <최후의 증인>은 내게 뜻깊은 작품입니다. <수사반장 1958>의 시대를 <최후의 증인>도 다루고 있지요. 황바우는 무식한 농사꾼이지만 홀로 남겨진 한 가정의 여식을 끝까지 지키려다 죽고, 시대의 비리를 모두 목격한 형사(하명중)는 자살해버립니다. 따뜻함만이 아니라 그런 괴로움도 인간의 것이지요. 배우라는 직업이 자랑스러우려면 어느 분야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 가장 필요한 존재들이 되어야 해요.

- 두분의 경력이 도합 8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배우 되기의 고민이 개인의 삶에 끼친 영향이 있습니까.

최불암 아,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지. 한창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함께 찍을 때요. 일주일에 3일은 <전원일기>, 또 3일은 <수사반장>을 찍습니다. 그때는 의상이나 준비물은 다 방송국에 맡겨두고 몸만 출퇴근한다고. 아침에 경비 선생이 먼저 나한테 이렇게 인사를 해요. “수고 많으십니다. 오늘은 박 반장이시군요.” 내가 놀라서 어떻게 아냐고 그러면 오늘은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누가 봐도 수사반장 걸음이라는 거야. 밤늦도록 <수사반장> 대본 보고 잠깐 자다 나오는 거니까 출근길에 걷는 모양새가 이미 박 반장인 거지. 또 어떤 때는 “아유, 김 회장님 들어오시네” 이래요. 말하자면 박 반장하고 김 회장한테 내 몸의 반반씩 준 거지요. 두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해줘야 했던 겁니다.

이제훈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네요!

최불암 분장실에 거울이 많잖니? 분장 다 마치고 마지막에 스튜디오로 걸어가기 전에 거울을 한번 봐. 그다음에 혼자 주문을 거는 거야. 최불암, 오늘 열심히 잘 해라. 그러면 <수사반장>을 할 때는 박 반장의 목소리로, <전원일기>를 할 때는 김 회장 목소리로 대답이 들리는 것 같아. 그 목소리를 그대로 가지고서 스튜디오로 향하는 통로를 혼자 걸어가는 거야.

이제훈 너무 좋은 이야기인데요, 선생님. 말씀 듣다가 생각이 난 건데, 저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경험도 없고 미숙한 상태에서 모든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선생님처럼 베테랑이 되면 그래도 편안해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거든요. 몸에 밴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올거라고요. 시간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는구나, 싶어요. 해온 것만큼 유지하는 것, 과거보다 더 나은 저의 모습을 발견해내는 것 모두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럴수록 더 몰입하고 준비를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의 진정성을 더 깊이 팔 수밖에 없다고 느껴요.

- <전원일기>가 햇수로 23년, <수사반장>이 19년간 방영되었고 <한국인의 밥상>도 벌써 14년차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를 오래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인데요, 배우 최불암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최불암 장수 프로그램의 비결이 뭐냐고 가끔 물어들 오는데 그건 참 내가 대답하기 힘든 영역이에요. 팔자 속에 그럴 운명이 들어 있는 모양이야. 하여간 시작을 하면 오래 끌고 가게 됩니다. 그만두자 싶어도 스스로 그게 안됩니다. CF도 하고 있는 두 가지가 15년이 넘었어요. 다 드러난 밑천이 수치스러워서 매일 하루빨리 그만두자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 꾸준히 하려면 화려하게 가지 말고 덤덤하고 수더분하게 하자고 <한국인의 밥상> 제작진에 일찌감치 부탁하셨다고요.

최불암 <수사반장>도 마찬가지로 한회가 재밌으면 그다음 몇회는 힘 빼고 슴슴하게 가야 해요. 전력을 다하면 금방 지치고 내려오는 일밖에는 없다고. 이래저래 오랜 호흡으로 작품을 해보니 생긴 내 나름의 꾀인 거지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운명의 손짓 속에서 터득한 겁니다.

- 마지막으로 <수사반장>의 박영한이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에게 한마디를 남긴다면요.

최불암 안중근 의사가 묵서로 남긴 말을 대신 전하겠습니다.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내가 젊은 시절에 배우 일도 잘 풀리지 않고 실연마저 당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훌륭한 기자 선생 한분이 전해준 말이지요.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멀리 보고 큰일을 이루시기를.

- 최불암 선생님, 극장에서 영화도 종종 보시나요?

최불암 그럼요. 신작은 거의 빼놓지 않고 보죠. 우리 와이프가 영화를 좋아해서 아침 일찍 극장을 찾습니다. 둘이 조조할인 받지요.

이제훈 제가 7월에 개봉하는 <탈주> 시사회에 모셔도 될까요? 북한 병사가 남한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예요.

최불암 거 재밌겠는데! 그런데 나는 언제든 집 앞 극장으로 뛰어가는 게 제일 편하거든.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몰래 보러 갈게.

이제훈 하하하, 네 좋아요 선생님. 그럼 꼭 봐주세요!

멀리 보고 오래 가기

<수사반장 1958>로 성사된 두 세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다큐플렉스: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에서 최불암은 네명의 후배 이제훈, 이동휘, 최우성, 윤현수에게 ‘배우·연기자·광대’ 세 글자를 한자로 써 보인다. 사람이 아닌 우수한 것을 가리키는 배우, 넓고 크게 번져나가는 힘을 품은 광대, 그리고 기예를 실연하는 사람을 뜻하는 연기자의 의미를 그는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1959년 연극 <햄릿>으로 데뷔해 1980년대에 <수사반장> <전원일기>로 브라운관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짧게는 14년 길게는 23년인 장수 프로그램만 4개(<전원일기> <수사반장> <한국인의 밥상> <좋은나라 운동본부>)인 데뷔 66년차의 배우에게 물색없는 줄 알면서도 제언을 부탁한 것은 그래서였다. 최불암은 “AI의 시대에 배우에게는 더욱더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처럼 평생 일하기를 바라는 젊은 배우들, 그리고 한국 콘텐츠가 추구할 경지를 우륵의 말로 대신했다. <삼국사기>에서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이 제자들의 음악을 듣고 남긴 말 ‘낙이불류 애비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다.

“중용을 지키면서 변함없이 가자는 게 내가 아는 전부예요. 우륵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낙이불류 애이불비. 즐거우나 너무 넘쳐흐르지 않고 슬퍼도 그 슬픔이 비통에 이르지 않는다. K콘텐츠가 한창이라고 하는데 강하고 날것의 표현만이 넘치는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여러 세대가 조화로운 풍경, 절제의 미학을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면의 가치를 충분히 탐구해야 멀리 보고 오래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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