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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미학적 형식과 영화적 주제가 공명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긋나는 지점, 그러니까 일반적인 영화라면 동기화된 내러티브에 매끄럽게 통합되어 있을 것들이 서로 어긋나는 순간을 의도적으로 돌출시킨다. 카메라는 자의식적으로 움직이다 멈추고, 음악이 갑작스럽게 중단된 자리를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대신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중지된 듯한 순간이 관객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절하고 충돌하는 것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할 때 빚어내는 미학적 매력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미학적 시도가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공연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라는 태생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또는 균형을 유지하는가)하는가, 라는 영화의 주제를 돌출시키는 방식과 공명한다는 점이다.

이음매, 매끄럽지 않은 표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단절되어 있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돌출시킨다. 영화의 첫 장면의 트래킹숏은 거의 90도로 하늘을 올려다 찍는다. 숲의 풍경이 전경, 중경, 후경으로 쌓인 이 장면이 마무리되면,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가 나타나 그루터기에 올라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숏으로 이어진다. 얼핏 소녀의 등장은 트래킹숏의 시선의 주체를 지시하는 것 같지만, 하나가 등장할 때의 숏의 배열이나 인간의 걸음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녀가 시선의 주체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이렇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일반적 통념과 다른 방식으로 시선의 놀이를 펼치고, 그럴 때마나 일반적인 영화적 관습에 의존하며 영화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곧잘 길을 잃는다. 타쿠미(오미카 히토시)가 어린이집에 도착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마을 어린이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움직임이 사라진 세계, 또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세계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 순간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갑자기 이탈한 듯한 착시를 경험한다. 하나가 이미 집으로 떠났음을 알고 타쿠미가 차를 몰고 떠나는 장면은 더 노골적이다. 타쿠미의 차가 움직일 때 잠시 덜컹거리던 카메라는 전진하는 차의 후방 풍경을 오랫동안 담아낸다. 차에는 타쿠미 혼자이기에 이 후방을 향하는 시선의 주체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다시 한번, 그것은 누구의 시선일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시선을 교란하는 이러한 숏에 대해 필요한 질문은 그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는 왜 영화는 인간으로부터 이탈한 시선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사람에게서 시선의 주체 자리를 뻬앗는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사람은 시선의 주체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가깝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세계(영화)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세계가 서로 붙어 있으면서도 단절되고 어긋나 덜컹거리는 순간을 그대로 돌출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얼핏 단조롭게 구성된 영화처럼 보이는 표면의 층위와 달리, 실제로는 영화의 세계와 음악의 세계, 그리고 음악과 자연음의 세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세계, 자연과 인간의 세계 등등의 이항대립적 요소들이 한편의 영화를 구성하고 있음을 관객이 인지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항대립적 요소들 사이를 이어붙인 이음매일 수밖에 없다. 이 돌출된 이음매가 영화의 장소, 인물, 사건, 그리고 심지어는 관객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시킨다.

아직,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영화 엔딩 무렵 실종됐던 타쿠미의 딸 하나가 총에 맞은 사슴에게 다가가려 한다. 타카하시(고사카 류지)는 하나에게 다가가려 하고, 타쿠미는 그런 타카하시를 힘으로 제압해 목을 조른다.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분출되는 이 폭력 장면은 앞서 우리가 들었던 총소리와 유사한 위상을 갖는다. 갑작스럽게 극적 분위기를 단절시키는 폭력의 분출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성을 갖지만, 중요한 것은 그 폭력이 행해지는 방향이 서로 반대를 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숲에서 들려오는 헐떡거리는 숨소리.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집이 아닌 숲으로 향하는지, 그리고 그 숨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적 의도를 훼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엔딩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갑작스럽게 폭력이 출현하는 방식, 또는 그것을 통해 영화적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그 이전까지 영화가 추구했던 미학적 시도들, 그러니까 음악의 단절, 갑작스러운 컷의 전환, 그 주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숏 사용 등의 미학적 장치들과 공명한다는 것, 즉 영화적 주제와 영화적 형식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영화를 덜컹거리게 함으로써 인간의 세계와 인접해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성을 관객에게 상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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