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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균형의 조정,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4-04-02

<드라이브 마이 카>로 프로덕션의 규모와 만듦새, 기획력에 있어 점차 완연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음악가의 요청에 부응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것, 동시에 계획에 없던 소품을 만들어나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번 영화를 작업하면서 음악의 성질을 우선시했음을 밝히는 데 주저가 없다. 만약 음악이 가진, 우리 안에 내재된 기능을 즉각적으로 끌어올리는 힘에 동의한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감독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자질과 직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고한 연기 연출법에 근거해 대화의 작가로 자주 명명되었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장소와 풍경의 시적인 역량을 몽타주화할 수 있는 연출자임도 알맞은 시점에 귀띔해준다.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 동북부 지역을 살핀 그의 다큐멘터리(<파도의 소리> <파도의 목소리–게센누마편> <파도의 목소리-신치마치편>)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영화는 배우들과의 긴밀한 호흡으로 잘 알려진 그가 영화 제작진과 창조적으로 교류하는 방식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쇼케이스다.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 스탭 출신의 배우 오미카 히토시, 미성년 배우 니시카와 료와의 조화만큼 중요하게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동일한 촬영본으로 전혀 다른 무성영화를 만들어낸 편집감독 야마자키 아즈사(<심도>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와의 이중 작업이다. 한쪽에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한쪽에선 라이프 퍼포먼스와 함께 상영될 <GIFT>가 만들어졌을 과정을 상상하다보면 영화의 안팎에서 자신의 균형을 재조정해나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가능성에 대해 실로 더 많은 호기심을 걸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줌 인터뷰로 나눈 대화를 전한다.

- 공연용 비디오아트를 의뢰받은 후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최초의 제안을 보다 확장하게 된 과정상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공연장에서 송출되는 비디오라면 보통은 추상성이 강한 영상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과 오랫동안 의견 교환을 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연장선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 늘 그래왔듯 일단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와 함께 촬영하는 방식으로 소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후에 그 소재를 라이브 퍼포먼스용 영상에 맞게 다듬어보려고 했다. 때문에 이미 영화처럼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작업 초기까지만 해도 영화화한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다. 당연히 상업영화로서 개봉을 한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연용 영상과 영화의 큰 차이를 짚자면 음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업 과정에서 배우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훌륭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음색이 실리면 이 캐릭터들이 더욱 깊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렇다면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로 완성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해 어쩌다 상을 받고 뜻밖에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됐다.

- 음악감독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나가노현 인근의 산골 마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글램핑장 건설 설명회를 보게 됐다고 들었다. 생태주의 영화들이 점차 대두되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감독님에게도 이러한 내적 관심사가 형성된 것인지 궁금하다.

한 가지 정정을 하자면 글램핑장 건설 설명회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고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의 스튜디오 주변에서 무엇을 찍을 수 있을까 리서치하다가 그러한 설명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참가했던 주민들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영화의 경우는 이렇게 실제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좀더 상세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지점이 명확하다.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남들이 갖는 만큼 정도의 관심이 있었다, 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특히 생태문제라고 하면 아직도 우리의 일상과 좀 동떨어진 이야기로 느낄 수가 있을 텐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만들면서 더욱더 이 모든 문제가 이미 우리 삶 자체임을 느꼈다. 영화에 나오는 배수 처리 문제가 이미 지역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을 뿐 아니라, 10년 전에는 이상기후로 불렸던 것들이 지금은 해마다 한두번씩 큰 자연재해로 번지고 산속의 동물들이 인간이 사는 곳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사이클’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삶에서 가장 실감하는 것들 가운데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생태주의 영화를 의도했다기보다는 환경의 변화가 아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나의 자각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 숲의 심부름꾼으로 살아가는 타쿠미라는 남자에게는 매우 특정한 생활양식이 있다. 한편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는 일에 둔감하다든지 돈 계산을 잘못하고, 특히 경어를 쓰지 않는 점이 눈에 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상을 배우와는 어떤 방식으로 공유하며 구체화했나.

타쿠미는 지금 말씀해준 인물상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무언가 결여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미카 배우에게 아마도 타쿠미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라는 설명은 일절 하지 않았다. 평소 배우들에게 해왔듯이 A4 용지 7~8페이지 분량의 서브텍스트를 준비해서 전달했다. 그 안에는 타쿠미라는 인물이 내가 설정한 어떤 질문들에 답해 나가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특정한 설정이 묘사되어 있거나 정답이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배우가 스스로 캐릭터를 이해하고 답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진행했다. 물론 함께 대본을 읽는 리허설, 장작패는 도끼질을 익히는 시간 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을 익히는 연습 과정도 있었다.

- 연예 기획사에서 파견된 두 직원과 마을 주민들이 글램핑장 개발 문제로 대치하는 설명회 장면이 놀랍다. 캐릭터마다 적나라한 긴장감, 진정성, 유머 등을 장착하고 있고 그런 제각각의 기운들이 하나의 문제의식 속에서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촬영 과정은 어떻게 꾸렸나.

일단 설명회 장면은 이틀 동안 찍었다. 테이크마다 짧으면 17분, 길면 20분 정도 나왔는데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갔고 그렇게 해서 하루에 총 5번을 찍을 수 있었다. 작은 연극을 하루 5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총 2대를 썼다. 설명회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카메라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바라보고 있어야 할 지 미리 촬영감독과 정해두었다. 카메라의 앵글은 관객이 이 상황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신경 써서 결과으로는 약간 클래식한 구도가 나온 것 같다. 이틀간 나온 총 10개 테이크 중 오케이는 기본적으로 없다고 보면 된다. 연기의 퀄리티를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촬영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항상 모든 테이크를 ‘통과’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최종 편집본에는 테이크1에서 사용한 것도 있고 테이크10에서 사용한 것도 있다. 어느 테이크든 딱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서 무척 좋았다. 배우들은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웃음)

- 타쿠미 부녀가 집과 마을 중심가를 오가는 동안 큰 숲을 반복적으로 지나게 된다. 음악적 리듬감, 그리고 로케이션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인상이 함께 드는데, 숲을 가로지르는 트래킹숏의 쓰임을 유독 강조한 이유가 있나.

이번 영화는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과 조화를 이루고 싶다는 특수한 전제 조건에 충실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작업할 때도 부분적으로 음악에 맞는 시각적인 이야기-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질문했던 적이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나무 사이를 지나는 숲에서의 이동성이 두드러지는 숏들도 그와 비슷한 연상 과정에서 나왔다. 특정한 음악을 우선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시바시 에이코 감독이 보내준 곡들이 아주 섬세한 음들이 켜켜이 쌓여 조화를 이루는 화음의 음악이라는 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영상으로 번역하고자 했다. 나무가 빼곡한 숲속의 이동숏이 마냥 추상적인 이미지라면 관객 입장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와 시각적인 부분을 만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음악에서 생겨난 비주얼에 이야기가 봉사해서는 안되고 상호간에 조화로운 형태로 만들자는 바람이었다.

- 스타일상 대조적인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며 공존한다. 숲을 가로지르는 앙각의 유려한 트래킹숏과 차 뒤편에 매달려 덜그럭거리며 이동하는 카메라처럼.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시바시 에이코의 이번 음악은 멜로디와 정서가 꽤 강하게 쓰였는데, 영화에서는 음악이 고조되는 지점에서 편집으로 툭 끊어냈다. 마침 이 영화는 ‘균형’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통일된 형식을 갖고 찍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많은 거장들이 추구해온 방식이다. 그런데 내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하려는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무엇이 가장 적합한 장면인지를 생각한다. 관객과의 관계 역시 어느 정도 고려한다. 그렇게 찍다보면 형식의 통일성이라는 주문은 사라진다. 바로 그 지점, 통일성을 잃어버린 요소들을 어떤 리듬으로 조합해나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어내볼 것인가 하는 조정 과정이 내가 중시하는 영화 만들기의 단계이다. 그 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생리적인 부분에서 정해지는 것 같다. 형식적인 교합과 조화에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느끼기에 이것이 참 편안하다, 조화롭다고 하는 생리적인 느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 대조적인 것이 공존하는 가운데 생기는 균형에 정말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고, 그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나간다.

- <아사코>에는 연인이 비를 맞으며 찾게 되는 사라진 고양이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아내의 증발이 비가시적인 변화를 표면화하는 촉매제가 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딸 하나의 실종이 극을 결정적인 장면으로 이끈다. 실종과 발견의 모티프를 채택하는 이유가 있을까.

의식적으로 다룬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런 실종의 모티프를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편이, 장면에 움직임이 있는 쪽이 언제나 더욱 흥미로우리란 입장은 맞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너무 감각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내뱉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조금 민망한데. (웃음) 사라진 것을 찾기 위해 새롭게 발생한 움직임은 곧 원래의 균형이 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깨진 균형은 어떻게 해서 회복될 것인지 질문해볼 수도 있다. 이 말이 자칫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 무작위로 상실을 이용한다는 말로 들릴까 염려된다. 그보다는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상황에서 무언가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인생이란 가끔 그런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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