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하면 으레 정치적이란 딱지가 붙지만 올해만큼 정치 이슈가 들끓었던 적도 드물다. 우선 영화제 시작 전부터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 의원들의 초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최근 독일의 극우당 지지율이 20%로 오르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주말마다 거리로 나서 극우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영화제측은 결국 AfD 의원들을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2월24일 시상식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한다는 발언,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이라는 발언도 나왔다. 수상자 가운데엔 서슴없이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시상식 후 베를린영화제 공식 인스타그램 채널엔 반유대적인 포스팅이 올라왔다. 급기야 베를린영화제측은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해킹당한 것이라는 해명 글까지 내놓았다.
장르를 넘어 독특한 세계를 펼치다
<범죄도시4> 배우들과 제작팀이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포토 타임을 갖고 있다.
1980년대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녀원의 인권침해를 다룬 개막작 <스몰 싱스 라이크 디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제 초반은 순항했다. 그러나 중반쯤부터 예년의 수준에 못 미치는 영화들이 많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간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칸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한탄했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몇개의 하이라이트 작품은 경쟁부문이 아닌 다른 부문에 숨겨져 있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 없진 않았다. 경쟁부문엔 환경, 여성주의, 노인문제, 이주, 동물, 인권, 식민지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장르, 즉 다큐멘터리, 코미디, 역사, 멜로드라마, SF, 심리 공포 영화까지 포진해 있었다. 수상작은 여느 때와 같이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낮은 평점을 받거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영화들이 수상한 것이다. 심사위원단은 기존 틀을 벗어나는 실험적 영화들에 손을 들어줬다.
경쟁부문 영화들에겐 약간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빙의와 화신 기법으로 환기를 불러일으킨 영화들이 눈에 띄었고 황금곰상을 받은 <다호메이>도 그런 유의 영화였다. 다호메이(1797~1858)는 현 베냉에 존재했던 왕조의 이름이다. 영화는 26점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행과 학생들의 토론 등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쇳소리가 섞인 무시무시한 목소리 사운드를 입혀 식민지 약탈 예술품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뒷부분은 반환된 유물을 맞이하는 베냉 대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영화 산업지 <스크린>은 “식민주의로 인한 피해 복구는 약탈된 유물 몇점을 돌려받는 것처럼 간단치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썼다. 감독상을 수상한 <페페>도 독특한 다큐멘터리영화다. 죽은 하마 페페의 굵고 갈라지는 이상한 목소리가 극을 끌고 간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 살던 하마가 어떻게 콜롬비아까지 와서 군집을 이루고 살다가 사살당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밝고 코믹적인 요소를 갖췄다. 독일 일간 <타츠>는 “<페페>는 하마의 일대기와 삶과 죽음의 철학적 질문 사이를 오가며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고 평했다.
프랑스산 SF영화 <디 엠파이어>에서도 빙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한 외계인과 악한 외계인이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빙의해 대결하는 해프닝은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해서 저절로 코믹적 요소가 갖춰진다. 기발하고 기존의 영화문법을 훌쩍 뛰어넘어 황당무계하기까지 하다. 외계 우주선은 바로크 시대 유럽의 대성당 모습을 갖추고 바흐를 변형한 음악과 안무도 영화의 독특한 미학에 한몫한다. 평단의 호불호가 극히 갈렸으며 낮은 평점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시선으로
또한 이번 영화제엔 죽음을 다룬 영화가 많았다. 특히 죽음뿐 아니라 노인문제까지 다룬 독일영화 <다잉>, 이란영화 <마이 페이버릿 케이크>는 영화제 내내 높은 별점을 받으며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다잉>은 뿔뿔이 흩어져 화합 불가능한 독일 가족 이야기를 세 사람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세 시간 러닝타임에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처럼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다잉>은 삶, 죽음, 중독,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일 소도시에서 치매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아버지, 중병을 앓는 어머니, 베를린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하고 있는 아들, 알코올중독에 빠진 딸. 이 네명을 주인공으로 각 챕터에서 이들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제 기간 동안 높은 별점으로 금곰상 후보에 올랐었으며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스크린>은 “매티아스 글래스너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처럼 느껴진다”고 썼다. <마이 페이버릿 케이크>를 연출한 이란의 영화감독 마리암 모그하담, 베타쉬 사나에하 감독은 이란 당국의 출국 금지로 인해 영화제에 불참했고 도리어 이 소식으로 인해 관심을 모았다. 영화는 오랜 싱글 생활을 청산하고 파트너를 찾아나서는 70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가벼운 코미디물이다. 노년이 겪는 외로움을 벗어나 공감과 기쁨을 찾는 순간을 유머로 풀어냈다. 배경이 이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일거수일투족이 아슬아슬하게 그려진다. 영화산업지 <스크린>은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의 기쁨과 부조리함을 재치와 유머로 포착한다”고 표했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프롬 힐데, 위드 러브>도 영화제 내내 수상작 후보로 거론됐지만 최종적으로는 수상에 실패했다. 영화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열정으로 빛나는 여름날의 기억과 출산 뒤 사형수로 살아가는 임산부의 어두운 현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감옥에서 출산과 육아를 하는 힐데에게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 하루하루 버팀목이 되었다고 영화는 역설한다.
<할리우드 리포트>는 “안드레아스 드레젠 감독은 힐데의 삶의 빛과 어둠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공포 가운데서도 희망과 인간성을 찾아낸다”고 썼다. 각본상을 수상한 <더 데빌스 배스>도 자살과 죽음을 다룬 개성 강한 영화다. 1750년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갓 시집 온 아그네스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적응하지 못해 깊은 우울에 빠지고 결국 신경쇠약증에 걸린다. 괴로워하는 아그네스가 목이 잘린 시신을 옆에 두고 넋 놓고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어린이를 살해한 뒤 고해성사를 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자살이 구원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겨졌기에, 죽고 싶어도 자살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어린이 살해를 마지막 방책으로 택했다는 사실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국적 분위기의 향연
여성 해방을 주제로 한 영화 중엔 네팔영화 <샴발라>가 주목할 만하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이국적인 풍습, 일처다부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주인공 페마가 길을 떠나 어려움을 겪으며 변화하는 로드무비이자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페마는 임신한 몸임에도 오해로 인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베를린 방송인 <에르베베>는 “<샴발라>는 불교와 삶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보여준다. 기억에 오래 남을 이미지와 함께 연기도 좋고 연출도 훌륭한 영화”라고 호평했다. 경쟁부문 밖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영화는 파노라마 부문의 <노 아더 랜드>다. 가장 시의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뤘고,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영화에선 웨스트뱅크 남쪽의 마을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담겨 있다. 시상식에 오른 바셀 아드라 감독은 “가자 지역에서 수십만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렇게 있는 상황이 괴롭다”고 전했다.
세계의 거울과 창이 되어줬던 황금곰 파티가 끝났다. 베를린영화제의 5년 임기를 마친 공동 집행위원장 카를로 카트리안과 마리에테 리센벡은 박수를 받으며 떠났다. 내년엔 후임 집행위원장 트리시아 터틀이 영화예술부문과 조직부 모두 떠안아야 한다. 현재 독일 언론에선 영화제 이후 시상식 때 발언과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반유대주의 구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상황은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어떤 상흔도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