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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오해가 겹겹이 쌓이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아픔만 남겼지.
난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왜 내 손을 잡으려 했는지.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말해줘.
-<Say It to Me> 글렌 한사드 노래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분주했던 그 골목에 어둠이 깔린 지 오래.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 중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정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래서 가슴이 미어지는 독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가 그에게로 걸어간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선 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울 무렵, 카메라가 살짝 물러서면, 소녀의 등이 보인다. 카메라가 곧 그녀의 시선이었던 것. 진심이 담긴 노래를 알아본 소녀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10센트짜리가 2유로짜리라도 되는 듯 기타 케이스에 집어넣는 소녀에게 남자는 투덜대고, 동그란 눈의 소녀는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노래의 주인공을 아직도 사랑하냐고 묻는다. 계속해서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한 올해의 인디영화, <원스>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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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금(心琴)을 울린다, 고들 한다. 마음의 거문고라니. 붓도, 펜도 아닌 악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07년 선댄스의 신데렐라로 올 여름 미국 틈새시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둔 <원스>는 그 필연적인 이유를 잘 아는 음악영화다. 그 매력을 말로 설명하는 건 무척 어렵다. 방법은 하나다. 오는 9월20일 국내 개봉을 앞둔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 기름진 명절 속에서 청명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분명히.
아일랜드 연풍에 실려온 작은 음악회, 뮤지컬 영화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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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and 2 Days
크리스티안 문주 | 2007년 | 113분 | 35mm | 루마니아 | 월드 시네마
낙태가 금지된 차우셰스쿠 독재하의 1987년 루마니아. 오틸리아는 기숙사 친구인 가비타가 불법 낙태를 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던 중 불법 낙태 시술자를 고용한다. 사실 모든 것은 간단하게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몰래 낙태를 시술하기 위한 호텔방도 잡았고 돈도 모았다. 하지만 가비타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인해 괴물 같은 낙태 시술자는 점점 더 위험한 대가들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200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낙태의 윤리적인 대가 따위에 대한 쓸모없는 언변을 늘어놓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크리스티안 문주는 낙태한 아기를 싸들고 칠흑같은 거리를 내달리는 오틸리아의 뒤를 아무런 인공조명도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로 뒤쫓고,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비타의 모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서방견문 西方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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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天然コケッコ-
야마시타 노부히로 | 가호, 오카다 마사키, 후지무라 쇼코 | 2007년 | 121분 | 35mm | 일본
7명이 전교생인 학교, 초등부와 중등부가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이 마을에는 모든 게 조용하고 온화하다. <후나기를 기다리며> <린다 린다 린다>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신작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소요(가호)는 오줌 싼 막내를 챙기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기다리고, 급식 점심 메뉴는 학교 방송의 귀여운 멘트를 타고 공지된다. 도쿄에서 전학생 오사와 히로키(오카다 마사키)가 등장하며 인물들의 관계가 새롭게 그려지지만 도시와 시골의 만남을 화해의 무드로 끌고가는 전형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야마시타 감독은 <후나기를 기다리며> <바보들의 배>가 그랬던 것처럼 작고 귀여운 이 학교의 공간을 시간의 축으로 환원한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동방명주, 東方明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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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Sukiyaki Western Django
미이케 다카시 | 2007년 | 121분 | 35mm | 일본 | 미드나잇 패션
하긴 불가능한 게 뭐가 있겠는가. 마카로니 웨스턴이 영웅적인 앵글로 색슨들의 서부극을 비정한 라틴식 개싸움으로 바꾸어놓은 지 어언 40여년이 흘렀다. 이제는 스키야키 웨스턴이나 카레 웨스턴도 나올 만하지 않을까. 황당한 서부영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장르의 관습을 가져와서 ‘미이케 월드’의 신종 놀이기구로 만들어버리는 미이케 다카시의 변태적인 재능이 빛을 발하는 영화다. 황금이 묻혀 있다는 어느 산골마을에 라이벌 갱단인 겐지와 헤이케가 찾아온다. 카우보이 모자와 권총을 쥐고 무사도를 논하는 코스프레 갱단들 때문에 마을은 바람 잘 날 없다. 물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쉐인이나 장고이며, 다행히도 끝내주는 훈남 총잡이가 등장해 갱단들에 맞서기 시작한다. 간략하게 설명하자. 첫째,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다. 둘째, 일본인 배우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명장귀환 名匠歸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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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혹은 겨우 12번째다.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오는 10월4일부터 12일까지 언제나처럼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서 개최된다. 펑샤오강의 전쟁영화 <집결호>로 문을 열고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로 문을 닫는 이번 영화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싱싱함’이다. 전체 상영작 275편 중 (월드와 인터내셔널, 아시아를 총합한) 프리미어 상영작의 편수만 무려 193편이다. 뒷북치지 않는 발견의 쾌락으로만 치자면 역대 최고라는 뜻이겠다. <씨네21>의 강추 리스트는 올해도 계속된다. 이름난 거장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명장귀환’, 아시아의 새로운 재능을 보여주는 ‘동방명주’, 비아시아권의 흥미로운 작품들을 골라낸 ‘서방견문’ 등 세 가지 카테고리 속에 서른편의 추천작들을 담아냈다. 고민 끝에 추려낸 리스트지만 최선의 리스트가 아니라는 불안감은 예년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영화의 오늘’과 ‘뉴 커런츠’ 부문에서 첫 공개되는 비범한 한국
[제12회 부산영화제 추천작] 5대양서 건진 싱싱한 영화, 총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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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희망의 싹마저 스러지는 날
KBS 독립영화관 1 <망종>
9월23(일) 밤12시30분 | KBS1 | 감독 장률 | 출연 류연희, 김 박, 주광현
보리를 베고 벼를 심어야 하는 계절, 씨뿌리기 좋은 시간. ‘망종’은 어쨌든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다. 지난 계절의 수확이 아무리 형편없을지라도, 다시 한번 생명을 간절히 기다리는 때, 그러니까 절망의 끝에서일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때. 하지만 장률 감독의 <망종>은 끝까지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절망 끝에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현실은 그렇게 무자비하다. 최순희는 중국의 작은 마을, 거리 한 모퉁이에서 김치를 파는 조선족 여인이다. 감옥에 있는 남편 때문에 고향을 떠난 뒤, 그녀는 타지에서 아들 창호와 가난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 주위를 맴돌던 조선족 김씨는 순희와의 관계가 아내에게 들키자, 그녀를 창녀라고 둘러댄다.
[추석연휴백서] 극장에서 놓친 영양만점 명품영화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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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버그의 1940년대 고전을 향한 오마주
<굿 저먼> The Good German
DVD를 넣고 영화가 나올 때 당황하지 말 것. <굿 저먼>은 60년 전에 찍혔음직한 스탠더드 화면비율의 흑백영상과 고풍스런 음악으로 시작한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이 개봉되지 못하고 DVD로 직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1940년대의 할리우드 드라마를 표방한 영화를 찍고 싶었던 소더버그는 옛날 장비들을 동원하고 세트에다 폐허가 된 베를린을 되살렸다. <굿 저먼>은 전후 분할 통치되던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다. 이렇게 유치한 표현을 동원해도 좋을 정도로 <굿 저먼>에는 온갖 클리셰가 가득하다. 포스터부터 제작과정, 엔딩장면에 이르기까지 <굿 저먼>은 <카사블랑카>와 <제3의 사나이>를 쏙 빼닮았으며, 분위기에선 심지어 <독일영년>의 영향까지 느껴진다. 그 결과, 예술적 독창성은커녕 고전시대
[추석연휴백서] 소더버그의 신작부터 케빈 스미스의 코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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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에 찾아온 아스라한 남자충동
<로맨스 킬러> 강도하 지음/ 애니북스 펴냄
<위대한 캣츠비> 강도하의 인터넷 만화를 책으로 엮었다. 인터넷에서의 올컬러를 살려, 스크롤하며 볼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게 편집했다. 이번의 주인공은 불혹의 나이 40을 앞둔 전직 킬러. 이야기의 시작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킬러인 주인공에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질문하지 마라. 둘째, 생각하지 마라. 셋째, 사랑하지 마라. 스스로 청소부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과의 어떠한 교감도 거부한다. 하지만 프리지아 냄새가 풍기는 방에서 남편이 의뢰한 청부살인업자의 총에 죽을 운명인 여자는 그에게 자꾸 질문을 한다. 여자는 꽃 알레르기 때문에 총을 놓친 킬러의 총을 빼앗고, 그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현재. 성형중독인 아내에게는 이미 아무 관심도 없다. 아내가 어머니로 보일 때도 있다. 전직 킬러는 딸이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는
[추석연휴백서] 칸칸이 그려진 만화, 컷컷이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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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전염병이 도시를 뒤덮을 때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펴냄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아주 작은 순간으로부터 거대한 이야기를 끌어내곤 한다. <리스본 쟁탈전>은 교정자가 고의적인 실수로 고친 단어 하나로부터 포르투갈 역사를 다시 서술하고, <돌뗏목>에선 대지에 조그만 균열이 생겨나면서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대륙과 분리되어 바다를 떠돈다. <눈먼 자들의 도시>도 사소한 사고 혹은 질병으로 첫걸음을 떼는 소설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그러나 개인적인 불운으로만 보였던 질병은 빠른 속도로 도시를 점령하여 눈먼 자들이 거리를 뒤덮기에 이른다. 격리도 도피도 소용없다. 남편을 지키고자 눈이 먼 것처럼 위장하여 함께 수용소로 들어간 ‘의사의 아내’는 자신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차츰 눈먼 자들의 무리를
[추석연휴백서] 문장의 상상력 스크린으로 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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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 어떻게들 보내십니까. 여행도 귀찮고 그저 방바닥에 눌어붙어 쉬고 싶다고요? 고향 가서 밤깎고 전만 부치다 올 것 같다고요? 어르신들과 조카들의 등쌀이 귀찮으니 하루 종일 자는 척이나 하겠다고요? <씨네21>이 모처럼의 연휴를 알차게 보낼 즐길 거리들을 소개합니다.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강풀의 <26년> 등 영화화되어 찾아올 국내외 원작 소설과 만화를 미리 읽어보는 건 어떤가요? 국내 극장에선 개봉하지 않은 수작 영화 DVD를 이 기회에 섭렵해도 좋겠네요. 볼 만한 TV 특선영화도 미리 챙겨둡시다. 책, 영화 모두 즐긴 다음 한가위 퀴즈 풀고 선물 응모까지 마치면 올 추석도 ‘즐휴’는 문제없음!
[추석연휴백서] 한가위 즐휴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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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삼순> <안녕, 프란체스카> <두 얼굴의 여친>의 정려원
정려원은 연기자로서의 스타덤보다 ‘패셔니스타’ 스타덤에 먼저 올랐다.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 종영 이후 모 인터넷 쇼핑몰이 한시적으로 ‘연예인 파파라치’라는 세일 코너를 마련해 스타일 좋은 국내 여자 연예인 몇명을 내세워 제품을 팔았을 때 그중 정려원의 코너가 있었다. 려원스타일드레스룸(www.rsdressroom.com)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의류쇼핑몰이 있는가 하면, 최근 모 케이블 채널에서는 ‘정려원 in London’이란 제목으로 “패셔너블한 셀레브리티” 정려원의 런던 여행을 일거수 일투족 뒤쫓듯 촬영해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정려원은 국내 대중, 특히 20대 여성에게 커스틴 던스트, 린제이 로한, 올슨 자매 등 할리우드 젊은 스타들의 이미지처럼 그 이미지가 소비되고 있다. 패셔니스타는 남들 앞에서 나를 개성있고 매력적인 존재로 꾸미고 싶은 청춘의 욕구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두 얼굴의 여친>의 정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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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플라이 대디>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준기
이준기의 부상은 급작스러웠다. 2005년 12월 영화 <왕의 남자>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그는 2006년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랐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턱선, 양쪽 볼을 가파르게 가르는 높고 섬세한 콧날. 여기에 화장과 여장이 추가되면서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스타의 도상이 되었다. 왕과 광대 사이에 선 남자 공길은 지금껏 한국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환영받은 동성애자다. 여성은 광대놀이를 빌려 남성 옆에 앉았고 남성은 시대의 슬픔을 가면으로 여성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엔 혼합된 성적 이미지가 없다. 공길은 정확히 남성과 여성의 경계, 그 위에 위치해 있다. 공길에겐 그간 동성애자에 대한 문화적 텍스트들이 보여줬던 훼손된 남성성, 오염된 여성성이 없다. 이는 곧 대중에 대한 공길의 보호막이었지만, 커밍아웃을 하려는 배우 이준기에겐 아슬아슬한 가면이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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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방과후 옥상>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
누가 길거리 캐스팅을 믿으랴. 대체로 길거리 캐스팅이란 빈틈없이 기획된 매니지먼트사의 신인배우 홍보용 계락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봉태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대체 봉태규 같은 남자를 길거리에서 줍지 않는다면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전문 오디션장이었다면 그가 들어서자마자 “다음!”이라는 외침이 터져나왔을 테고, 연기학원이라면 “여기는 개그맨 육성학원이 아니”라며 공손하게 돌려보냈을 게다. 어느 사진작가는 봉태규의 첫인상을 기억하냐는 질문에 씨익 웃으며 말했단다. “<눈물> 촬영현장엘 갔는데 이상하게 생긴 애가 하나 앉아 있는 거야. 뭐 저렇게 생긴 애가 배우를 하냐 싶었는데 지금은….”
성격파 배우에 대한 오랜 오해 하나가 있다. 성격파 배우라는 사람들이 못나거나 평범한 외모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는 괴상한 믿음이다. 좋은 성격파 배우들은 외모를 극복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
[한국 청춘영화의 계보학] <두 얼굴의 여친>의 봉태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