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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런 코벤 지음 / 부선희 옮김 / 비채 펴냄
할런 코벤은 충격적이라 인상적인 오프닝을 쓰는 데 재능이 있다. <네가 사라진 날>의 도입부. 뉴욕 센트럴파크의 스트로베리 필즈의 벤치에 앉은 사이먼은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는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 자신의 세 아이들인 페이지, 샘, 애니아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던 길이다. 갖은 장난을 치던, 혹은 온갖 상상을 펼쳐내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지켜보던 아내.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의 사이먼은 멀지 않은 곳에서 연주하는 비틀스의 곡을 듣고 있다. 길거리 음악가라기보다는 부랑자나 떠돌이로 보이는 사람이 원곡을 무시하고 부르는 노래. 깡마른 체격에 누더기를 걸친, 더럽고 망가지고 오갈 데 없는 길 잃은 여자가. 이 장면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사이먼의 딸 페이지기도 했다.”
할런 코벤은 <네가 사라진 날>의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죽는 이야기보다
씨네21 추천도서 - <네가 사라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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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제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낮은 해상도로부터>는 서이제의 소설집이다. 세상의 북적이는 구석구석의 장면들이 고해상도로 포착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에서 벽을 때리는 이웃의 소음에 시달리는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소음? 랩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랩은 소음이 된다. 옆집에 쪽지를 쓴다. 힙합으로 썼다. 매드클라운의 <Flowdown>(feat. 화나 & 탁 of 배치기)에서 인용했다. “그 잘난 이빨 갈아봤자 너는 겨우 다람쥐.” 써놓고 보니 다람쥐는 너무 귀엽고, 다람쥐 하니까 도토리가 생각났고, 도토리 하니까 미니홈피 생각이 나고. 쿵 쾅쾅. 그리고 깨닫는다. 지금 페이퍼를 써야 하는데 백지일 뿐인 페이퍼가 한숨과 두려움의 원천임을. 생각은 흘러흘러 한국문학이란 무엇일까에 닿는다. 쿵 쾅쾅. 생각은 흘러흘러, 쿵 쾅쾅! 한국 힙합의 랩 가사들이 곳곳에 각주 표시되어 등장하는 이 소설은 결국 힘 빠
씨네21 추천도서 - <낮은 해상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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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 지음 / 나비클럽 펴냄
대림동 수정커피호프, 2022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2043년 화성 마오 기지로 옮겨갈 때, 문득 ‘옴니버스 소설인가?’라는 형식에 대한 의문이 둥실 떠오른다. 이내 주인공 이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동일한 인물들이 다른 시공간에서 겪는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사실 대림동과 화성에서 만나는 ‘씨엔’과 ‘미’의 이름이 서로 달랐을지라도 이들은 같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 성격과 말투, 계급조차 다르지만 씨엔의 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화자가 앞선 대림동의 거친 남성과 같은 사람임을 독자가 예상케 하는 감정의 연결선이 기저에 깔려 있다. 답답한데 어디로 나가면 좋을까, 이 항변을 어느 광장에 나가 누구와 외치면 좋을까. 뉴스를 볼 때마다 조여드는 갑갑함에 부대끼는 현실 속에서 김형규의 소설은 노동자와 가난한 자,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 인물들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노동자로 부르기보다는 직장인이라 불리길 원하는 세상에서 그의 소설을
씨네21 추천도서 - <모든 것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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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이주혜,전하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세편의 소설을 선정하는 시리즈 <소설 보다>의 가을 2023 버전이 출간됐다. 김지연의 <반려빚>은 빚을 반려동물처럼 여기는 주인공에게서 착안한 제목이다. 반려빚이라니, 처음엔 빛을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정현은 전 애인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포함해 총 1억6천만원의 빚을 떠안고 있다. 꿈속에서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도 나간다. 물론 목줄을 쥔 쪽은 반려빚이다. 현실에서도 정현은 종일 돈 생각만 하고, 대출 이자에 허덕이느라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사먹지 못한다. 빌려준 돈도 갚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린 주제에 오랜만에 찾아와 “나 너희 집에서 지낼게”라고 요구하는 서일에게 화조차 내지 않는 정현이 구제 불능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정현에게 빚을 떠안긴 서일 역시 전세 대출 사기의 피해자이기 때문일까. 정현은 빚을 다 갚고 대출금이 0이 되고서야 플러스도 아닌 제
씨네21 추천도서 - <소설 보다: 가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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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하 지음 / 메이킹북스 펴냄
일상생활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평상시의 생활이라고 한다. 평상시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보통 때를 가리킨다. <단 하루의 부활>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상 풍경으로 시작하는 네 편의 단편집이다. 첫 단편 <단 하루의 부활>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휴대전화에 전달된 스미싱 문자로 시작한다. 다들 이런 사기 문자를 한 번쯤 받아보았을 것이고, 링크를 누르면 큰일 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렇지만 보낸 상대가 아버지 이름을 하고 있어서, ‘나’와 엄마는 마음이 흔들린다. 또 다른 단편 <할머니의 방황>은 오랜 세월 살아온 집을 재개발 때문에 넘기고 이사한 할머니가 마음에 드는 새 교회를 찾지 못해 이 교회 저 교회 시험 삼아 가보며 방황하는 이야기다. 재개발이나 교회 찾기 또한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런데 자식과 손주가 할머니의 교회 길에 함께 가주어야 하는 이유는, 할머니가 교회 지인의 아들
씨네21 추천도서 - <단 하루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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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펴냄
‘생활명품’이란 직접 사용해서 고른, 일상의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뜻 한다. 일상이 소중하다면 그 일상을 채우는 흔한 물건부터 잘 골라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아마 자취를 좀 했거나 살림을 맡아본 적 있다면 쉽게 동의하리라. 책에는 장보기 목록에 올려둘 법한 물건이 잔뜩 실려 있다. 이미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바 있는, 택배 상자 전용 커터 ‘트로이카’는 아무래도 사야 할 것 같다. 계란찜을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실룩실룩’ 실리콘 찜기는 지금 쓰는 도구를 버릴 때가 되면 사봐도 좋겠다. 콧수염 가위 브랜드 ‘카이’는 여성들에게는 눈썹 칼로 유명한 브랜드다.
비싸지만 언젠가는 사고 싶은 제품도 있다. 어느 재벌가 회장이 입어서 유명해진 캐나다의 아웃도어 브랜드 ‘아크테릭스’ 재킷은 재봉선이 꼼꼼하고, 산에 가나 콘서트홀에 가나 어색하지 않은 디자인이라고 한다. 매끄러운 핸들링으로 유명한 유아차 브랜드 ‘부가부’에서 바퀴 잘
씨네21 추천도서 -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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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_ 윤광준 지음
<단 하루의 부활> _ 김서하 지음
<소설 보다: 가을 2023> _ 김지연, 이주혜, 전하영 지음
<모든 것의 이야기> _ 김형규 지음
<낮은 해상도로부터> _ 서이제 지음
<네가 사라진 날> _ 할런 코벤 지음
<마주> _ 최은미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9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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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영화 <행복을 찾아서>
지치고 힘들 때 찾아 봤던 영화다. 마지막에 자기만의 직업을 찾은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가 면접에 합격해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많은 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드라마 <무빙>
탄탄한 스토리가 옴니버스로 펼쳐져 캐릭터마다 감정이입이 되었다. <무빙>의 카메라워크가 특히 좋았다.
격투기
가수가 한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쏟듯이, 격투기는 한 라운드에 모든 걸 쏟는 게 비슷한 것 같다. 체력을 기르는 데도 좋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도 좋다. 잘하진 못하지만 즐겨 한다.
여행 계획 세우기
여행지를 선택하고 나만의 힐링을 위한 여행 계획을 미리 짜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근처 맛집을 찾고, 패션도 생각해보고, 어떤 영상을 찍고 싶
[LIST] 유노윤호가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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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마>
왓챠 ▶▶▶▷
시인이자 실직 교수인 엘(릴리 톰린)은 여자 친구 올리비아(주디 그리어)와 다툼 끝에 이별한다. 이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엘에게 손녀 세이지(줄리아 가너)가 난데없이 찾아와 몇 시간 뒤 예정된 임신중절수술을 위한 돈 630달러를 빌려달라 부탁한다. 주머니 사정이 궁핍하기로는 손녀 못지않은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수술비를 얻기 위한 조금 특별한 여정에 나선다. 폴 웨이츠의 유쾌한 코미디 드라마 <그랜마>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손녀와 레즈비언 할머니가 중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선 하루 낮의 여로를 따듯한 시선으로 그려낸 로드 무비이자 여성 버디 무비다.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넷플릭스 ▶▶▶▷
“1992년 여름, 난 친구들과 싱가포르 거리에서 로드 무비를 찍었는데, 일종의 도시 괴담이 되어버렸다.”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오랫동안 세상에서 사라졌던 영화가 있다. 싱가포르인 소녀 샌디 탄과
[OTT 추천작] ‘그랜마’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폭포’ ‘우리 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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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 감독 김진원 / 각본 최효비 / 출연 안효섭, 전여빈, 강훈 / 플레이지수 ▶▶▷
1년 전, 남자 친구 연준(안효섭)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잃은 30대 직장인 준희(전여빈)는 여전히 연준을 그리워하며 지내고 있다. 어느 날, 90년대 가수 서지원의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의문의 소포를 받은 준희는 그의 노래 <내 눈물 모아>를 듣던 중 깜빡 잠이 들고, 1998년의 고등학생 민주(전여빈)가 되어 깨어난다. 25년 전, 준희와 똑같은 얼굴의 고등학생 민주는 연준과 똑 닮은 친구 시헌(안효섭)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다. 그런 민주를 또 다른 친구 인규(강훈)가 짝사랑 중인데, 이들의 얄궂은 삼각관계는 조용하고 소심했던 민주의 몸에 당차고 쾌활한 성격의 준희의 영혼이 들어가며 묘한 변화를 맞이한다. 그렇게 준희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 여행을 통해 추억을 쌓고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한편, 모종의 범죄 사건에 얽히게 될 민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국내에
[OTT 리뷰] ‘너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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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베니스, 요즘은 K드라마에서도 극 중 인물이 가고 싶은 도시로 베니스를 지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를 다시 한번 축제 분위기로 물들였다. 영화제는 8월30일부터 9월9일까지 개최됐다. 올해는 경쟁부문에 진출한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이탈리아 감독의 <사령관>이 개막작으로,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서바이벌 스릴러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이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화려한 라인업을 갖췄다. 원래 개막작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챌린저스>가 선정되었지만 미국배우조합 파업으로 인한 영화제 불참 여파로 결국 개막작이 변경됐다.
본선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미국 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맡았고, <피아노> <파워 오브 도그>의 제인 캠피언 감독 등 8명의 심사위원들이 경쟁부문에 진출한 총 23편의 영화를 심사했다. 경쟁부문에는 뤼크
[로마] 제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 ‘가여운 것들’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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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3대 스포츠는 무엇일까? NBA(농구), NFL(미식축구), MLB(야구)다. 물론 NHL(아이스하키)도 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경기를 하지만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보고 돈이 되는 리그는 NFL이라고 모두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나 OTT 신작이 모두 트레일러로 전쟁하는 슈퍼볼 경기도 NFL 이벤트 중 하나다. NFL은 목요일, 일요일을 경기일로 지정해 방송사 혹은 유료방송사에 판권을 판매했다. 엄청난 돈이 오고 가는 이 딜은 유료방송이 살아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근 이같은 흐름이 OTT로 이어지고 있다. 2022년부터 목요일에 NFL을 보려는 미국 사람들은 방송사가 아닌 OTT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쿠팡 플레이가 영국 카라바오컵(EFL컵)을 중계하고, 2021년 NFL 경기를 3년간 독점 중계한다고 발표한 것은 OTT가 전세계적으로 유료방송에서 라이브를 빼앗아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김조한의 OTT 인사이트] 유튜브가 NFL 선데이 티켓의 경기를 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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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극장가 한국영화 라인업이 완성됐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내세운 작품들이 연휴 대전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관객이 만날 영화는 9월21일 개봉하는 <가문의 영광: 리턴즈>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영화로, 12년 만에 후속작이 나오게 됐다. 9월27일에는 <1947 보스톤>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동시 개봉한다. 임아영 롯데엔터테인먼트 홍보마케팅팀 팀장은 “<1947 보스톤>은 한국 마라톤의 전설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이라는 실존 인물들과 역사적 사실을 다루며 스포츠의 짜릿한 경쟁과 승리의 쾌감을 선사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즐길 수 있다. 길어진 추석 연휴 기간 동안 폭넓은 연령대의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판단했다”며 가장 먼저 개봉일을 확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거미집>을 개봉하는 바른손이앤에이 관계자는 “모든 분들이 즐길 수 있는 유쾌한 티키타카의 코미디 장
이번 한가위에는 어떤 영화를?, 추석 극장가 한국영화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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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극사실주의 데이트 프로그램 <나는 SOLO>를 보기 시작했다. 화제의 16기 출연자들 방송분을 정주행하는데 듣던 대로 솔로나라에서 헤어 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8월28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로 살펴본 청년의 의식변화’에 따르면 19∼34살 청년 중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36.4%, 즉 3명 중 1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혼 1인가구 역시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솔로들이 모여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이 매주 뜨겁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연애 예능의 탈을 쓰고 있지만 문화인류학에 가까운 관찰 프로그램 <나는 SOLO>에서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단어는 ‘경각심’이다. 경각심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을 차리고 주의 깊게 살피어 경계하는 마음’인데,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스스로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각심이 불러온 나비효과 혹은 가짜뉴스가 불러온 파국의 교훈은 (
[이주현 편집장] 경각심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