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블로그 읽기를 좋아했다. 정보나 대단한 일이 담긴 블로그 말고, 그냥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 도착 날에 편의점에서 무슨 빵과 무슨 음료수를 어떤 기분으로 샀는지를 시시콜콜 적어두는 블로그 말이다. 막막함과 기대가 혼재된 첫날 밤의 포스팅에 그들은 항상 비슷한 말을 써놓는다. ‘보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써본다.’ (제가 다 봤어요!)
처음 핸드폰과 통장을 개통하러 갔을 때의 긴장감, 한동안 살게 될 동네의 특색 없지만 괜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골목, 더 높아 보이는 하늘, 조금씩 생기는 친구, 그들과의 첫 술자리, 들떠 보이는 단체 셀카, 아르바이트 구하기, 일하다 급하게 주방에서 먹는 점심밥(메뉴에 없는 맛있는 게 잔뜩 올라가 있는 덮밥-셰프가 기분이 좋으면 귀한 재료가 들어가는 듯하다), 조금씩 생기는 단골 가게, 지나가는 길고양이, 누군가의 이런 시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돈을 주고도 못 보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그쪽의 생활에 적응해서 블로그를 멀리하게 되어 포스팅이 뜸해지고 성의 없어지는 부분까지가 완성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 기차에 탔을 때, 아름다운 자연 속을 달리는 것도 좋았지만 어떤 집 담벼락 옆을 천천히 달릴 때,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나, 햇볕이 좋은 날 꺼내둔 두툼한 이불, 그리고 날아가지 말라고 가운데에 집어둔 아주 커다란 집게를 보면 나도 모르게 하,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그건 정화였을까. 미켈란젤로의 조각도 아니고 고작 누군가의 빨래에.
에세이라는 말은 몽테뉴의 <수상록>(Les Essais)에서 왔다고 한다. 1588년에 나온 이 책을 서양에선 최초의 수필집으로 본다. 2017년 발간한 육문사 버전의 책 소개는 이렇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인류의 영원한 스승 몽테뉴 자신의 체험에 몰두한 인생의 솔직한 고민.” 감히 인간이 신에게 모든 걸 바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한 것이 괘씸했는지 바티칸, 즉 로마교황청은 이 책을 300년간이나 금서로 지정했다. 바티칸도 참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동양의 경우에는 남송 시대에 홍매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이 최초로 꼽힌다. 그는 1123년에 태어났다. 수필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홍매는 (기록상) 그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이 가는 대로 써내려갔으므로 두서가 없어 수필이라 했다.”
수필과 에세이, 산문이라는 단어에 대한 한국 출판계의 태도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나부터가 그렇다. 2015년에 <익숙한 새벽 세시>라는 책을 낼 때 나와 편집부는 에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산문집’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꼬리표를 말이다. 에세이라고 했을 때 독자들이 책에 갖는 편견, 그리고 산문이라고 했을 때 희석되는 무언가를.
에세이를 읽는 건 시간 낭비라는 말을 가끔 본다. 서사도 없고, 고로 재미도 없고, 일기는 일기장에 썼으면 좋겠고, 오글거리면 더 싫고, 결과적으로 나무에 미안하고 등등. 수필로 넘어가면 조금 더 복잡해지는데,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단어인 경수필과 중수필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포털 검색을 하면 제일 위에 뜨는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분류는 명쾌하다. 경수필은 미셀러니, 신변잡기 글이고, 중수필은 에세이, 어느 정도 사회적, 논리적 성격을 지니는 수필을 말한다고 한다(‘어느 정도’라면 그건 대체 어디까지…?). 뉴스란에 경수필을 검색해보면 3페이지에 이미 2016년 기사가 뜰 정도로 별로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교과과정에서는 아직도 수필을 그렇게 구분하고 시험문제로 내는 듯하다. 네이버 지식에 올라오는 학생들의 질문을 보고 유추했다. 수필, 그중에서도 경수필. 신변잡기, 가벼울 경, 문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 높은 가치가 있진 않은 것, 그래서 아마도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미국에는 유명한 도서상이 있다. 전미도서상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이다. 전미도서상은 4개의 분야로 수상작을 뽑는데 소설, 논픽션, 시, 아동문학이다. 우리가 알 만한 에세이 중에는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즈>,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 논픽션 분야에서 상을 받았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에는 자서전 분야가 있는데 요즘 화제의 책인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가 2020년에 상을 받았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은 두 상의 후보로 동시에 올랐다. 상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에는 구멍이 많다. 하지만 상은 때때로 괜찮은 아카이브가 된다. 계보도 된다. 세상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증거도 된다. 아, 돈도 준다.(명예도 조금….) 한동안 잘 팔렸던 어떤 젊은 여성 작가의 에세이가 있었다. 사실 그런 작품은 항상 있고 그런 현상 후에는 ‘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해?’ 하고 뒤늦게 분석하는 어른들이 있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 책과 요즘의 가벼운 에세이 현상에 대해 중년 남성 셋이 이야기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필을 둘로 나눴다. 요즘 유행인, 디자인이 예쁘고, 제목을 잘 지은, 가벼운 에세이.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대문호나 나이 든 대학교수가 쓴 중수필(!)이 있었다. 이런 토론에는 만드는 당사자 또는 향유하는 소비자 당사자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항상 생각하지만 일단 여기까지. 여하튼 그들의 분석은 ‘촛불 이후 국가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소소한 삶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진 탓’이었는데 여기서도 옅은 꼬리표를 보았다. 대의, 진짜 중요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나약하게 무슨 소리 하고 앉아 있는 거야…. 대의는 무엇일까. 소소한 삶은 무엇일까. 일단 제쳐둬야 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 중요한지, 가치가 있는지는 누가 정할까. 그리고 무엇이 소거될까.
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든, 창조된 서사로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도 바라봐야 한다. 쓰기까지 하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용감한 문학이다. 산문, 수필, 에세이, 뭐라고 불리든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하는 일은 뻔하다. 지나가다 보이는 빨랫감도 뻔하다. 뻔하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마음이 하는 일’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이번 칼럼을 끝으로 ‘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