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임요한 선수 마린과 메딕의 조합으로 발빠른 러시를 보여주는군요.”
“아마, 홍진호 선수는 여기서 저그의 폭탄 드롭을 생각하는가 보죠.”
비디오 게임하면 <갤러그>를 떠올리는 30대, 또는 “게임은 애들이 오락실에서 코묻은 돈 쓰는 짓거리 아닌가”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기성세대에겐 도무지 요령부득인 대화이다. 이름도 낯설고, ‘마린’, ‘메딕’, ‘폭탄 드롭’ 등 사용하는 용어들도 도대체 뭔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국민 게임이란 거창한 별칭을 듣고 있는 <스타크래프트>(속칭 <스타크>)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눈 감아도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되는 이야기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화는 케이블TV 게임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인 <스타크래프트> 프로 리그 중계의 한 장면이다. 요즘 케이블TV에서는 gembc나 ongame.net 같은 게임 채널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케이블TV의 ‘채널 다양성’을 충족시키는 역할에 불과했던 게임 채널들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고정 시청자층을 가진 주력 채널이 됐다. 게임 채널이 인기가 높아진 배경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겠지만, 역시 가장 표면적인 이유로는 <스타크래프트>의 프로 게임 중계를 꼽을 수 있다. 흔히 ‘스타리그’로 불리는 이 프로 게이머들의 경기 중계는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프로야구 중계보다 더 인기높은 방송이다. 그들에게 임요한이나 홍진호란 이름은 야구의 이승엽이나 축구의 안정환과 같은 선망의 대상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두고 “<스타크래프트>가 워낙 인기가 높으니까…”라고 단순히 게임의 인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타리그의 중계방송을 보면 게임의 인기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게임 채널의 스타리그 중계는 <스타크>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즐긴다(이쯤에서 실토하면 생전 PC방에서 스타크를 해본 적 없는 필자 역시 요즘 게임 채널의 스타리그 중계에 빠져 재방송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잠을 설치기도 한다).
사실 <스타크>에서 테란, 저그, 프로토스로 나뉜 세 종족이 벌이는 대결은 상대의 영토를 철저하게 궤멸시키는 ‘올 오어 낫싱’의 대결이고, 그 패배의 결과는 처참한 죽음이다. 물론 프로 게이머들이 아닌 사이버상의 캐릭터들이 죽는 것이지만,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지가 찢겨져 죽는 모습은 승부를 벌이는 사람보다 오히려 구경하는 이를 강하게 자극한다. 이 대결에서 상대에 대한 관용이나 용서는 없다. 게임상에서 메딕이 여자라고 해서 저그의 ‘럴커’가 용서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온라인의 스타리그가 게이머들만이 즐기는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였다면, 지금 게임 채널에서 보여주는 스타리그들은 도전, 긴장, 반전, 좌절 등 승부의 다양한 요소가 담긴 드라마이다. 캐릭터의 연기를 지휘하는 것은 프로 게이머들이지만, 그 움직임과 전략에 의미와 감정, 극적인 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중계를 맡은 캐스터와 해설자들이다. 마치 고성능 전자기기의 작동설명서를 낭독하듯, 각종 전문용어를 조금은 과장된 감정에 담아 거침없이 쏟아내는 해설자들의 입담은 자극적인 영상과 함께 보는 이를 묘하게 끄는 주술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다. 프로 게이머별로 ‘불꽃테란’, ‘폭풍저그’, ‘대나무류’, ‘살아 있는 마린’ 등 별명을 붙여 추켜세우는 찬사는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얼핏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방송을 통해 게임에 동화된 이들에게는 그들을 현실 속 사람이 아닌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의 영웅화된 캐릭터로 느끼게 한다.
뭐, 이쯤 되면 스타리그는 사이버 공간에서 펼쳐지는 현대판 검투사들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집에서 느긋한 자세로 그 대결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우리는 어쩌면 엄지손가락의 방향으로 검투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로마시대 사람들과 시대적 벽을 뛰어넘어 정서적인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승부에 대한 야만적인 집착과 잔혹한 가학성을 이런 식으로 사이버 공간의 캐릭터를 통해 푸는 것이 과연 긍정적인 방법인지, 솔직히 주말마다 스타리그를 보느라 잠 설치는 필자는 장담을 하지 못하겠다.김재범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