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인디포럼 극/실험영화 부문은 중편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극영화보다 실험영화가 강세다. 개·폐막작을 비롯, <빨간 모자> <삼천포 가는 길> 등 갖가지 실험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연애담> <Sweet Dream> 등 내러티브 위주의 영화들과 어울려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모색한다.
빛 속의 휴식
채기 / 30분 / 16mm컬러 / 개막작
매트리스에 엎어져 자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샤워를 한다. 한 여자가 창 밖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어떤 이가 풀밭에 쓰러져 있다. 그런 식이다. 인디밴드 옐로우키친이 연주하는 모습을 길게 비추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계속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인물들은 내러티브의 연관에서 이탈해 ‘휴식’중.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는 침묵 속에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는 파괴돼 있고 숏들은 병치돼 있다. 역시 인디포럼2002 상영작인 <목록1/묻어있는>에서 빠르게 바뀌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영상실험을 해보이는 채기 감독이 여기서는 소리와 속도를 제거한 채 독특한 실험을 시도한다.
반(反)변증법
김곡·김선 / 55분 / DV6mm흑백 / 폐막작
“변증법은 언제나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한다. 그 폭력을 거부하고 차이를 생성하고자 했다.” 대학생 쌍둥이 형제 감독 김곡·김선의 이 작품은, ‘니체와 메를로퐁티에게 보내는 밀도형식의 편지’라는 부제하에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반변증법’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개진한다. 난해하지만 곳곳에 도사린 유머와 재기발랄한 촬영이 딱딱한 주제를 감싸안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작품. 화실에 살며 뮤직비디오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효식과 그가 욕망하는 MTV의 VJ 미나, 효식을 욕망하는 또 다른 여자 경숙의 행위와 관계가 내러티브를 이끄는 가운데, 장면들의 변주와 반복, 시간적 어긋남 등 영화적 실험이 전통적인 영화언어에 도발을 시도한다. 후설의 <시간의식>을 영화화한 이들의 다른(더 난해한) 작품 <시간의식>도 이번 인디포럼에서 선보인다.
7AM, SLOWLY;opposite page
이난 / 13분 / beta컬러
수상가옥에 살던 한 아름다웠던 친구, 이제는 묘지 속에 누워 있는 할머니, 사랑했던 연인, 그리고 또 많은 따뜻했던 기억들. 이 작품은 메모지의 ‘뒷면’을 보여주듯 좌우가 뒤집힌 글씨들을 화면에 새기며 아련한 꿈들을 거칠고도 매혹적인 이미지로 스케치한다. “저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시겠습니까?” “나와 함께 할머니 묘지에 가 줄래요?” 영화 속 스치는 질문들은 바로 관객을 향해 있다. 고구마가 수상가옥에 사는 친구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다.
달을 먹다
최반 / 29분 / 16mm흑백
꽃무늬 치마를 입고 서울역 지하도에 사는 여자 노숙자의 하루. 노숙자인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은 거리의 꽃집에서 장미꽃을 훔쳐 그와 동침하는 신문지 위에 놓는다. 새벽, 그가 사라진 뒤 여자는 떠나는 기차마다 붙들고 떠나간 남자를 찾는다. 아무리 남루한 삶일지라도 희로애락은 꽃잎처럼 처연한 법. 그 원초적 생의 기쁨과 아픔을 이 영화는 수려한 세피아톤 영상으로 그린다.
A True Memory
최익환 / 7분 / DV6mm흑백
코믹단편 <나는 왜 권투심판이 되려 하는가>의 최익환 감독의 신작. 이번에는 아포리즘적 에세이다. 영화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와 그녀의 ‘잊혀진’ 연인인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남자의 친구가 읊조리는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준다. ‘기억’에 대한 세련된 우화라 할 만한 이 작품은 “This is True Story”라는 내레이션의 반복 속에 ‘실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삼천포 가는 길
윤성호 / 39분 / DV6mm컬러
대학생들의 연애와 성을 솔직하고 재기발랄하게 이야기하는 디지털영화. 액취증이 있는 남자애는 축농증이 있는 여자애를 만나고, 교회에서 연애를 시작한 커플은 오지에 선교활동을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인터넷 에로물을 즐기던 한 아이는 셀프 포르노를 찍다 엄마에게 들켜 학업에 열중하게 되고 등등 황당하고 코믹한 내용뿐만 아니라, 중국어와 불어로 흐르는 내레이션 역시 이 작품을 통통 튀게 만든다. 장난스런 상상력과 현란한 편집이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재미있는 작품. 각종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추운 겨울 일요일 아침 따뜻한 율무차 한잔
문상철 / 16분 / 16mm컬러
국철 플랫폼의 자판기 앞을 배경으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스침을 포착한 잔잔한 영화. 공복의 한 남자는 한눈을 판 사이 다른 사내에게 율무차를 뺏기고, 또 어떤 여자는 동전을 넣은 뒤 차 대신 두배의 동전을 손에 얻는다. 배고픈 일요일 아침의 추위와 따뜻한 율무차의 온기가 오감에 와닿는 깔끔한 작품. 대사가 자막으로 처리돼 조용한 아침 분위기를 살렸다.
A.F.P.2001
전일성 / 17분 / DV6mm컬러
감독과 스탭이 앞으로 찍을 영화에 관해 토의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그냥 ‘토의하는 모습’만으로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에게 스탭들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욕실 거울 앞에서 감독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스탭은 “잘했다”며 감독의 연기를 칭찬한다. 영화만들기의 안팎을 오가는 흥미로운 작품.
Sweet Dream
한부현 / 19분 / 16mm컬러
올해 인디포럼 상영작 중 눈에 띄는 전통적 서사구조의 드라마. 생활사이클이 전혀 다른 한 신혼부부에 카메라를 들이대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을 고발한다. 제철소 철야근무조인 남편과 까르푸 주간근무조인 아내는 신혼의 단꿈에 젖기는커녕 ‘아기 만들 30분’도 빠듯하게 바통 터치를 하며 살아간다. 이들이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45분씩 두번 하루에 90분뿐. 씻고 밥먹기 바쁜 그 시간이 지나면,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남은 베개 하나를 껴안고 밀린 잠을 청한다. 아내 역을 문소리가 맡았다.
빨간 모자
이창석 / 24분 / DV6mm컬러
빨간 모자 소녀 동화를 패러디한 영화. 이 영화에서 빨간 모자 소녀를 덮치는 건 늑대가 아니라 엄마 잃은 불량소년이다. 사고로 엄마를 잃은 뒤 성격이 이상해진 소년은 소녀의 강아지를 방 안에 가두고 소녀의 모자를 지하철 선로에 던지며 끝내 소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야기 내용과 무관하게 시종일관 발랄한 동화구연체의 내레이션이 높은 톤으로 울려대는 이 작품은, 보는 이에게 역겨울 정도의 불쾌감을 야기한다. 동화의 내용을 비꼬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적 장치를 총동원해 감각적으로 동화의 세계를 ‘더럽히는’ 도발적인 영화.▶ 인디포럼2002 5월18일부터 9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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