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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함의 노골적인 매력 <사쿠라 대전>
2002-05-16

컴퓨터 게임

‘새턴’에서 ‘드림캐스트’까지 세가가 만든 게임기의 간판 게임이었던 <사쿠라 대전> 시리즈가 드디어 완결되었다. 믿었던 <그란디아>도, <데드 오어 얼라이브>도 다른 게임기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세가를 지킨 의리의 게임이다. 정식 시리즈는 4편이지만 별별 희한한 컨셉으로 미니 게임이 10여개나 나왔다. 캐릭터 상품이 수억종 나온 것은 물론이다. 이 게임만을 하기 위해 ‘새턴’이나 ‘드림캐스트’를 사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다른 블록버스터와는 다른 묘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게임 배경은 20세기 초 일본이다. 현실은 아니고 일종의 패럴렐 월드다. 일본은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시절은 뒤숭숭하다. 주인공격인 사쿠라는 제도라고 불리는 도쿄에서 가극단 배우를 하고 있다. 가극단은 사실은 특수부대다.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다국적 소녀 군단이 도쿄(3편은 파리)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운다. 그때부터 새로 부임한 지휘관으로 부대를 통솔해야 한다.

게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어드벤처 모드다. 극장이나 기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성 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눠 호감을 얻어야 한다. 누구와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엔딩에서 다른 히로인과 엮인다. 다른 파트가 턴방식 전략 시뮬레이션인데 이 부분이 참 맹랑하다. 난이도가 놀라울 정도로 낮아서 한판 한판 진행하는 게 노는 게 아니라 엔딩을 향해 곧장 달리는 숙제를 하는 느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투의 목적은 이기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공격이든 방어든 딴 건 할 필요없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감싸주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어드벤처 파트에서 실수했더라도 감싸기로 성의를 보이면 만회할 수 있다. 가끔씩 합체 공격도 해줄 필요가 있다. 멋진 비주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쿠라 대전>의 전투에는 전략이 필요없다. 어떤 긴장도, 흥분도 없다. 선택문을 고르는 데 시간 제한이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파트쪽이 오히려 아슬아슬하다. 그렇지만 스토리로 보나 시스템으로 보나 이쪽 역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연애 시뮬에서 제일 중요한 캐릭터성은 높다. 곰인형을 안은 깜찍한 프랑스 소녀 아이리스, 항상 냉정한 모습이 매력인 마리아, 도도해 보이지만 사실은 개그 캐릭터인 스미레, 인민복을 입은 발명 소녀 홍란 등은 개성이 분명하다. 하지만 캐릭터성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성공의 기본이지 결정 요인은 아니다.

이 게임의 개성과 매력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뻔뻔함과 촌스러움에 있다. 시대극이라는 걸 내세워 요즘 사람들 보기에는 낯간지러운 신파조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쏟아놓는다. 세계가 다 망하게 생겼는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소녀 전사들에게 연극은 전투만큼이나 중요하다. 놀랍게도 <보물섬> <서유기> 등 계속되는 극중극에서 함께하다보면 정말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게임 분위기에 걸맞게 연출도 70년대 열혈 소년 만화풍이다. 전투가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펼쳐지는 요란한 승리 포즈를 자기도 모르게 같이 하고 있고, 요란한 엔카풍 주제곡이 나올 때마다 목청이 터져라 부르는 건 물론 엉덩이까지 들썩들썩한다.

즐거워하다보면 눈감아버리는 사실이 있다. 일본도를 휘두르는 ‘북진일도류’ 계승자 사쿠라가 지키려는 건 일본 제국주의다. 새옷을 입히고 설탕을 쳤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와 향수는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주제가를 따라부르며 ‘제국 화격단’을 외치다보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게임의 힘은 가끔 무섭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MadorDead.com